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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한 나라의 주민A Apr 19. 2022

22.04.01 나의 한계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명작보다는 괴작을 남기고 싶다” 작년부터 사탕을 녹여 먹듯 혼자 입안에서 굴리고 있는 말이다. 이 해괴한 말에 대한 주석으로 나의 괴변을 남겨본다. 명작을 쓰기는 어렵지만, 세상에는 명작, 명품이라 불리는 것들이 많다. 요컨대 잘난 놈들이 많다는 뜻이다. 오스카와일드의 동화, 헤세의 소설들을 읽다 보면 뭐랄까, 형언할 수 없는 벽 같은 게 느껴진다. 그게 재능의 영역에 있는 것인지, 삶을 보는 사유의 높이차가 만드는 현상인지는 모르겠지만(둘 다 일지도 모르고), 그것들이 명작이라 불리는 이유는 알겠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이 세상에는 명작이라 불리는 것들이 너무 많다. 고전 명작, 현대인이 읽어야 할 명작, 띵작 등등. 좋은 작품이 많은 건 좋은데, 너무 많다 보니 ‘명작’이라는 단어의 진정성이 희미해지는 느낌이다. 아무리 빛나는 별도 은하수 속에서는 수많은 별들 중 하나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글이든 그림이든, 조각이든, 뭐든 좋다. 누군가에게 회자될 만한 괴작을 남기고 싶다. 세상에 명작은 많고, 괴작은 그보다도 훨씬 많겠지만, 사람들에게 읽히는 괴작은 그리 많지 않다. 게다가 괴상한 것은 그 자체로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는 법이다. 귀신이나 도깨비 같은 온갖 오컬트적인 것들이나 세상을 뒤집어놓은 천재들이 그렇지 않은가. 천재라 불리는 자들은 대게 괴짜다.     


  난 괴상한 것들에 매력을 느낀다. 팍팍한 세상에서 보고만 있어도 피식 웃게 하는 건 분명 괴작의 굉장한 점이기는 하나, 가장 대단한 점은 그것들이 간직하고 있는 야생성에 있다. 사회의 거만한 의미 체계에 길들여지길 거부하고, 스스로가 정한 길을 걸어가는 그 모습은 거만한 것들을 물어 죽이는 사나운 포식자와도 같다. 스스로를 문명에서 추방시켰던 괴짜, 데이빗 소로우는 그의 저작 「월든」에서 ‘옷은 그들을 따듯하게 하는 게 아니라, 유행에 따라 그들을 요리하고 있다’라고 말하며 유행에 휩쓸려 사는 현대인들에게 날 선 조소를 보냈다.      


  누군가에게 회자될 괴작을 쓰고 싶다. 하지만 괴작을 쓰기에 나는 세상에 너무 길들여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이를 30살이나 먹고도 뇌 용량의 대부분을 먹고사는 문제에 쓰고 있으니 말이다. 어쩌면 나의 영혼은 사춘기는커녕 부모에게 밥을 달라 울어대는 유아기에 머물러 있는 걸지도 모른다. 오늘 끼니를 때우면서 어떻게 내일 끼니를 때울지 생각하는 게 내겐 흔한 일상이다. 주변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나뿐 아니라 대부분 이렇게 살고 있는 듯하다. 커진 건 문명의 외연일 뿐 정작 우리는 동굴에 살며 모든 정력을 생존에 쏟아붓던 그때와 별반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 달라진 게 있다면 그때는 사냥을 하려 아등바등거렸지만, 지금은 사냥된 걸 얻으려 그렇게 한다는 것 정도일까. 인간만 아니라 먹어야 사는 것들의 한계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나의 한계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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