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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한 나라의 주민A Apr 19. 2022

22. 04. 05 스스로를 폐기하기 전에

  변덕이 심한 바다처럼 세상에는 종잡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중 가장 알 수 없는 게 사람 마음이다. 약속했던 영원이 다음날 관째 묻히고 마는, 세상이 끝난 것처럼 울다가도 어느새 웃는 괴상한 풍경이 우리에게는 익숙하다. 옛 선현들은 ‘천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라는 말을 남겼는데, 수백 년은 더 됐을 말이 풍화되지 않고 현재에도 유효한 것은 놀랄만한 일이다. 현대 기술의 총체인 스마트폰도 평균 수명이 2년밖에 안 되는데, 선현들이 남기고 간 교훈은 수백 년이 지나고도 맛이 가기는커녕 오히려 더 싱싱해 보이니 말이다. 물론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라는 말처럼 맛이 가다 못해 곰팡이를 이불처럼 뒤집어쓰고 있는 것들도 있지만, 이마저도 죽은 시체와 요리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별미로 통한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부패와 발효를 구분할 줄 몰라서 썩은 것을 치즈처럼 각별히 즐긴다. 그리고는 탈이 나서 여기저기에 냄새나는 배설물을 퍼질러 놓는 만행을 저지른다. 아무튼, 앞의 말들을 종합해서 말하자면 언어는 유통기한이 길다는 것이다.     


  말이 잠시 다른 길로 샜지만, 샛길로 빠지는 건 대개 낭만적인 것들이니 오히려 좋다고 하겠다. 대학을 다닐 때 가끔 수업을 땡땡이치고 낮술을 하곤 했는데, 대낮에 꾸는 꿈처럼 몽롱해지며 정신이 신비적인 무언가와 합일을 이루고는 했더란다. 그러니 학문의 목적이 정신의 고양에 있다고 믿는 자라면 누구든 땡땡이를 몸소 실천하는 게 좋을 것이다.     


  언어의 유통기한이 긴 까닭은 그것이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책으로, 때로는 바람을 타고 떠도는 풍문으로 언어는 인간 존재의 심연에 대해, 고개를 높게 쳐들고 바라보는 별에 대해, 그 우습고 비루한 꼴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야기가 멈추지 않는 까닭은 인간이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은 미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끝을 모르고 발전하는 문명은 별에 까지 닿았고, 목 위에 달린 캔을 따서 그 안까지 훤히 들여보고 있음에도, 우리는 정작 스스로에 대해서는 한치도 진보를 이루지 못했다. 진보는커녕 수천 년 전보다도 퇴보했을 확률이 높다. 운명을 이야기하는 예언자들의 목소리와 인간의 근원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사색은 삭은 나무토막처럼 바스러져 그 맥이 끊긴 지 오래이다. 인간의 갈비뼈 안쪽에 둥지를 튼 붉은 열매의 신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이제는 그 수가 눈에 띄게 줄어 천연기념물 정도로 취급되고 있다.   

 

  간단한 산수를 할 수만 있어도 우리가 직면한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인에게 학습이란 한 가지를 배우는 대신 두 가지를 까먹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의 인간성은 금방 바닥을 보일 것이고, 밑천이 바닥난 우리는 결국 파산하게 될 것이다. 나는 실제로 그렇게 해서 파산한 사람들을 뉴스에서 심심치 않게 보곤 하는데, 멍게의 성장만큼 그들에 대한 적절한 예는 없으리라 확신한다. 멍게는 유년기 때까지는 뇌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온종일 물멍만 때리는데 뇌 따위는 사치라 생각한 그들은 성인이 되면서 스스로의 뇌를 소화시켜 버린다. 스스로를 폐기함으로써 마침내 그들은 어른이 된다. 현대에서 어른이 되는 과정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생각을 폐기하고 사회라는 굴뚝 없는 공장의 톱니바퀴가 되는 걸 우리는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라 부르지 않나. 고작 톱니바퀴 따위가 되기 위해 우리는 초등학교 6년, 중·고등학교 6년, 대학 4년 동안 부단히도 노력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장사고, 비효율에 극치다. 여기에 맞서 땡땡이로 세상에 대한 반역을 시도했던 나의 선택은 역시 틀리지 않았다.     


  우리는 알기보다는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한 호흡에 깃든 생명의 온도를, 나침반이 가리키는 운명의 별에 이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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