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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한 나라의 주민A Apr 19. 2022

22. 04. 07 목이 길어 슬픈 짐승이여

시인 노천명은 사슴을 ‘목이 길어 슬픔 짐승이여’이라 하며 불렀다. 사슴의 슬픔이 긴 목 때문이라면 인간의 슬픔은 어디서 오는가. 누군가 이에 대해 이야기해줄 수 있다면, 혹은 시 한 줄 읊어줄 수 있다면 내 안의 슬픔도 들판을 향해 흘러 냇물과 함께 노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당장 그런 근사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가슴속에 시 한 줄의 싱싱함을 가진 사람을 만나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러니 나라도 나의 슬픔을 이야기해야지.     


  사슴이 긴 목 때문에 슬픈 짐승이라면 인간은 그 존재 자체가 슬픔일지도 모른다. 하늘은 저렇게 넓은데 나는 작은 자리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어서. 흘러가는 시간을 따라가지 못해 남겨지는 마음이 있어서. 30년을 나로 살고도 작은 나 하나 어쩌지 못해 쩔쩔맬 때. 글 한 줄 쓰지 못해 돌처럼 굳어버릴 때, 내게는 비가 내린다. 나는 재주가 부족한 사람이라 셀 수도 없이 비를 맞아보고도 그것을 그치게 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렇다 해서 아예 얻은 게 없는 것은 아니다. 비라는 게 오라고 해서 오고, 가라고 해서 가라는 게 아니라는 걸 배웠다. 맞아도 예전처럼은 떨지 않고, 그치지 않는다고 야속하다 말하지 않는다.     


  슬픔과 떨어질 수 없는 게 운명이라면 차라리 그것을 힘껏 끌어안겠다. 단단한 팔로 그것의 허리를 휘감고, 내일이 없는 연인처럼 뜨겁게 키스를 나누겠다. 비를 맞아 청초한 꽃으로 내가 다시 피어날 때까지 그것과 함께 끝나지 않는 춤을 추겠다. 나는 지금 그리하기 위한 법을 배우고 있는 것이라 믿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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