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고 확실하게 설명할 수 없어 두리뭉실한 것들은 두려움과 불안을 일으키곤 한다. 나에게 두려움과 불안이란 우울함과도 곧장 연결되는 감정이기 때문에 그런 '두리뭉실하지만 불안하거나 우울한 감정'이 확실히 마음에 파고들었을 때에는 그 원인이 되었던 사건을 파헤쳐서 그 실체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확인하려고 한다. 막연하게 찾아온 것 같은 감정을 그대로 놔두게 되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또한 할 수 없게 되고 그럼 그것이 가지를 치면서 우울한 감정과 불안을 증폭시키기도 한다. 오늘 내 작은 우울의 트리거는 나의 애플 워치 4였다. 재작년 남편이 선물로 사주었던 애플 워치는 순전히 예뻐서 가지고 싶었던 사치품에 불과했다. 산지 얼마지 않아 코로나가 닥쳤고 자주 나갈 일이 없던 나는 그 애플 워치를 겨우 손에 꼽을 만큼 차고 다녔던 것 같다. 지난달에 서랍에 모셔두었던 애플 워치가 갑자기 떠올라 다시 충전을 하려고 충전 장치 위에 놓았더니 이게 충전이 되질 않는 거다. 번개모양만 나타나다가 애플 로고가 화면 중간에 뜨는데 거기에서 더 나아가 애플 워치가 켜지는 상태로 이어 지지를 않았다. 일년의 개런티 기간은 일찌감치 끝난 상태였기에 인터넷에 나와있는 온갖 방법은 다 해보고 애플사의 기술 문제 상담원과도 삼십분간 전화를 했었다. 그러고도 애플 워치는 켜지지 않아 애플 스토어에 가지고 가서 점검을 했더니 워치 4부터는 내부 전체를 갈아야 해서 무려 260유로 정도의 비용이 든다고 했다. 이미 구형이 되어버린 이 시계의 새것 가격과 맞먹는 비용이었다. 오기가 생긴 나는 어떻게든 야매로라도 고쳐보겠다며 사설 수리업체에 얼마 전 시계를 보내보았다. 뭐든 뚝딱 싸게 고쳐주겠다는 홈페이지의 약속을 믿은 나는 며칠간 예쁘게 짠 하고 켜질 애플 워치를 상상하며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오늘 두둥... 애플 워치의 메인보드를 갈아야 하며 비용은 최소 180유로. 중고 애플 워치 4 가격보다 더한 가격일지 모르는 비용이 든다고 한다. 망할 놈의 애플. 사백 유로짜리 사치품을 팔아먹으면서 서비스는 이게 뭐란 말인가? 고장 자체도 이해가 안 가지만 지난 몇 주간 내 마음고생도 몇 백 유로어치는 된 것 같은 마음이었다. 진퇴양난이다. 고치자니 너무 비싸고 안 고치자니 이 멀쩡해 보이는 게 쓰레기가 되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하여간 이 사건은 내 우울감의 트리거가 되었다. 무엇보다 이 진퇴양난의 상황이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이것도 저것도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 나에게 무력감을 주고 있다. 어떤 선택이 가장 현명한 선택인 것일까. 내 손목위에서 터지지 않은 것을 감사해야 하나? 지금으로서는 깨끗하게 손절하고 애플 워치와 같이 나에게 전혀 유익함을 주지 못한 사치품 따위는 다시는 사지 않겠다는 마음을 먹는것만이 최선인것만 같다. 고작 작은 물건 하나에 우울 트리거 운운하고 있는 것이 한심하기도 하지만 이 미련을 떨칠 방법은 무어란 말인가? 하여간 인물값 했다. 애플 워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