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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호사 J Nov 15. 2020

지금까지 이런 아빠는 없었다

잘알못 사춘기 아이와 잘 지내기

얼마 전 남편의 생일에 딸이 케잌을 가져왔다.


'지금까지 이런 아빠는 없었다'


케잌에 쓰여진 문장을 보자마자 나는 울컥했다. 아빠도 케잌을 보고 바로 눈시울이 벌개졌다.


둘째인 아들은 장난처럼 웃으며 성대모사까지 했다

"이거 그거잖아~ 영화 극한직업에서~~ 지금까지 이런 치킨은 없었다, 치킨인가 갈비인가, 수원왕갈비치킨입니다."


듣고 보니 깔깔 웃음이 나왔지만 나와 남편의 감동은 여전했다.


첫째는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접근이 어려울 정도였다.

툭하면 방문을 잠그고 들어가 안 나오고, 뭔가 삐져 있는 거 같은데 말을 걸면 말도 안하고 우두두 눈물부터 쏟고, 그러면서 엄마아빠가 지 마음에 안 드는 말을 한마디라도 하면 어떻게 저 고운 입에서 저런 말을 할까 싶을 정도로 공격적인 말투로 쏘아붙였다.


그 앞에서 나는 달래기도 하고 안아주기도 하고 때론 맞서 싸우다 같이 울기도 했는데 남편과 딸은 자주 이런 식이었다.


(딸 방문을 열며) "똑똑 00아 뭐해?"

"....."

"아빠가 오늘 무슨 일이 있었냐면....."

"(침대에 누워 듣다 말고 눈을 치켜뜨고) 나한테 왜 이래~~ 좀 나가줄래?"


자신의 따뜻한 미소와 접근에 썩소를 날리며 방에서 나가달라는 딸 앞에서 매번 당황하고 말 한번 길게 붙여보지 못했던 불쌍한 남편.


하지만 남편은 포기하지 않았다. 치유선생님이 알려주신 표현대로 실천하려고 애썼다.

아이에게 "니가 어떤 사람이 되건 널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 공부도 무엇도 그 사실을 바꾸지 못한다"는 손편지를 쓰고 밥상머리에 이렇게 적은 하트 모양 포스트잇을 붙여 놓기도 했다.

"딸, 밥 맛있게 먹어"

연애를 해도 저렇게 못하겠다 싶을 정도였다.


그때마다 딸은 시큰둥하게 반응을 보였지만 정말 아주 천천히, 거북이 걸음보다 느린 속도로(거의 한두마디 정도의 증가량?) 아빠 얘기를 들어주는 시간이 늘어났다. 썩소나 나가달라는 말은 여전하지만.


그런데 아빠 생일이라고 급기야 저런 멘트가 적힌 케잌을 떡하니 그것도 아무도 시키지도 않았는데 본인이 다 알아보고 주문제작을 해오니 저 글귀를 보는 순간 지난 시간이 스르륵 지나가면서 눈물이 차오를 수 밖에.


엄마인 나와 딸이 제대로 대화가 되기 시작한 것도 몇달 되지 않았다. 그 전에 대화는 이런 식이었다.


"ㅇㅇ 아 요즘 왜 이렇게 말이 없어? 뭐 화난 거 있어?"

"(핸드폰을 쳐다보며) 없어"

"아 그러지 말고 얘기 좀 해봐"

".... 할 말 진짜 없어"

"(욱한 목소리로) 니가 말을 해야 알지 말도 안 하면서 알아달라고 하면... 그리고 핸드폰도 작작 보라 그랬지. 엄마가 말하는데 핸드폰만 보면 대화가 되겠어?"

"(눈물이 또르르)...."

"왜 울어, 울긴 왜 울어. 말을 하면 되지"

"(짜증내며) 나도 몰라. (휙 하고 일어나 제 방으로 들어간다)


아이가 담임선생님, 상담선생님한테 마음이 힘들다고 상담을 해서 몇차례나 전화를 받았고 난  은근히 화가 난 상태였다.


선생님들의 전화에 망신스럽다는 느낌도 들고 나는 저 나이 때 엄마가 무서워서 학교 선생님들한테 말은 커녕 엄마 눈치만 보며 아무 소리 못하고 더 애만 썼는데 이 정도면 좋은 엄마지 뭘 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방법을 알려주든지!!란 생각에 답답하고 짜증이 났다.


그러다 치유선생님을 만난 자리에서 신세한탄을 하니 선생님께선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이가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데 제가 말을 계속 걸어야 할까요? 사춘기니까 냅둬야 하지 않을까요?"

"아이가 엄마랑 얼마나 말하고 싶겠어. 선생님들한테 자꾸 자기 얘기를 하는 것도 사실은 엄마한테 하고 싶은 말을 못해서 답답하니까 SOS를 친 거 아니겠어. 그게 모든 아이의 마음이지. 다만 엄마가 자기 말을 제대로 들어줄 준비가 안 되어 있고 상처를 줄 거 같으니 입을 꾹 닫지.. 그러니 먼저 엄마가 너랑 진심으로 대화를 하고 싶다고 그런 준비가 되었다고 알려줘야지"


난 선생님이 알려주신 대로 말하기 위해 사전 연습을 여러 번 했다. 애랑 대화하기 위해 연습이 필요하다니..

한심하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어릴 때 집과 학교에서 익히지 못한 소통을 어른이 되어 하려니 사막에서 꽃을 피우는 것 마냥 힘들었다. 그래도 나는 다르게 살고 싶으니까 아이와 정말 행복한 관계가 되고 싶으니 연습해야 한다.


"엄마가 니 말을 안 들어주는 것처럼 느껴져서 속상했지. 미안해. 엄마가 이젠 니가 무슨 말을 해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얘기해 줘"

혼자 거울을 보며 연습을 하는데도 목이 메이고 눈물이 났다. 평생 해 본 적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는 마음을 읽어주는 언어.


어찌 보면 내가 어린 시절 너무나 듣고 싶었던 말이 이런 말이었나 보다. 매일 숙제했니, 왜 안 했어, 학교에선 뭐했어, 선생님 말씀 잘 들어야지, 어유 이것도 80점을 받냐. 조언과 평가, 비난이 주였던 대화. 엄마도 아빠도 선생님도 그 시절엔 강하게 키워야 한다는 인식 외엔 없었으니까. 이젠 내가 어른이니까 내가 바꾸면 된다.


연습을 마치고 딸을 불렀다. 딸은 여전히 뽀로통한 표정이었다.  

과연 연습한 데로 말한다고 얘가 마음을 열까. 약간 두려운 마음도 들었지만 연습한 그대로 말을 했다. 꼭 말을 꺼내면 구구절절 내 변명이 먼저 나오는데 길게 말하지 않았다.


"엄마는 너랑 꼭 얘기를 하고 싶어. 그 사이에는 엄마가 잘 안 듣는 것 같아서 니가 속상했지. 엄마가 준비가 덜 되어 있었어. 미안해. 이번엔 정말 들을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얘기 해 줘"


몇 번 비슷한 취지로 간절하게(?) 말하고 나니 딸이 눈물을 닦으며 드디어 입을 열었다.

"사실 꼭 엄마 잘못도 아니라서 말하기가 그랬어. 엄마도 노력하는 건 아는데 내 핸드폰을 다른 친구들보다 몇 년이나 늦게 사줬는데 사자마자 밤 10시 이후에는 마루에 내 놓으라고 하고 집에 들어올 때마다 핸드폰 내 놨냐고 체크부터 하고 그러니까 내가 불안한 거야..  엄마 아빠 소리만 들리면 심장이 떨리고 혼날 것 같고 그래서 집을 나가고 싶었어."


딸은 가출계획을 세웠었다는 충격적인 말까지 털어놓고 나는 딸과 내가 얼마나 다른 생각을 하고 사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내가 어릴 때 부모님과의 관계를 기준으로 좋은 엄마라고 철떡같이 믿고 있는데 딸은 딸의 주변아이들과 비교하며 자신을 믿어주지 못하는 엄마를 야속하게 생각했다.


딸이 많이 예민한 편이고 그래서 불안이 높지만 자기 할 일도 똑부러지게 한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게 필요했다. '객관적으로' 밤 10시에 핸드폰을 마루에 내놓으라는 정도의 기준이면 아이를 배려한 것이고 아이도 당연히 수긍해야 하고 그게 아니면 아이가 이상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일방적이었다.


이후 지금까지 딸은 자기 핸드폰을 알아서 관리한다. 나 역시 불안한 마음이 있었는데 딸은 시험기간이 되면 야무지게 핸드폰을 집에 놔두고 독서실로 간다. 내가 믿어준 덕분에 우리는 더 이상 핸드폰으로 싸우지 않았고(정말 이것만 해도 넘 편해졌다) 핸드폰이 방해가 될 때면 알아서 조절하는 힘을 스스로 키웠다. 내가 내 불안을 지속적으로 내려놓고 믿고 기다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때 내가 핸드폰을 언제까지 사용하는 게 맞는지 객관적으로 시시비비를 가리고 딸과 끝없는 토론을 했다면 내가 딸을 믿을 기회도 딸이 나를 믿을 기회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나아가 코로나로 학교도 잘 안 가는 요즘, 딸과 나는 매번 큰 소리로 싸우고 있었을 거다. 서로 상처받을 데로 받고 대화는 안 되고 아이는 결국 가출을 감행했을 수도.


내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객관적 기준'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 거 같다. 남들이 어떻게 말하든 무엇을 믿든, 아이와 나 사이의 관계에서 중요한 건 둘만의 대화와 교감이다. 아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차분하고 인내심 있게 들어주는 것, 인정해 주는 것이 정말 필요하다. 내가 먼저 아이의 마음을 읽어주려는 태도를 보이면 아이가 엄마에 대해 '나를 존중해 주려고 하는구나' 하고 믿게 된다. 그런 신뢰가 생겨야 사춘기 아이와 비로소 대화가 시작될 수 있다는 걸 늦된 엄마는 이제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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