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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프맨작가 May 22. 2024

백-10, 음악사의 친구 아니 라이벌

피아니스트의 결투 속 우정 리스트와 쇼팽의 스토리  


예술은 무엇일까? 감동을 위해 탄생되었고 다양하고 개방적인 창조의 작품이다. 


음악이 무엇일까? 음악은 자연을 닮아서, 사람들의 감정과 영혼을 대자연과 조화를 표현하는 소리의 예술이다. 음악은 한 옥타브 도, 레, 미, 파, 솔, 라, 시 7개의 온음과 반음 - 각기 다른 다양한 음색의 조화로 우리를 감동 플러스 행복하게 하는 예술이다. 이를 완벽하게 예술로 끌어올린 두 피아니스트 천재들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싶다. 


앞으로 음악가의 이야기를 연재할 것입니다. 

첫 번째 : 리스트와 쇼팽의 이야기입니다.


  


"음악은 왼쪽에서 오른쪽을 읽어야 하는 중첩된 선들이 아니라, 


아래서 위로 읽어야 하는 화음들의 연쇄로 구성되었습니다. "




음악의 화음은 정말 우리 모두를 감동하게 하는 조화다. 


혼자서 내는 독주곡도 아름답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곡을 처음 들었을 때 그 감동은 고독이었다. 


하지만, 화음을 만드는 음악이 훨씬 좋다. 


성악가의 노랫소리와 오케스트라의 관현악이 어울리는 조화의 감동, 


피아노과 오케스트라와 어울리는 피아노 협주곡의 감동이 좋다.  






"진보라기보다는 변화였죠. 예술에 진보는 없습니다. 경향들이 있을 뿐이죠. 


하나의 경향이 잘 전개되다가 완벽한 작품에서 정점을 찍으면 그 후엔


다른 시도들이 나옵니다. 예술은 그런 식으로 생명력을 이어가고요." 




예술에 진보가 없다는 이 글이 마음에 와닿는다. 


어쩌면 르네상스 예술이나 고대 그리스의 예술이나 조각품들을 보면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피아노가 창조된 이래로 18세기부터 클래식 음악은 폭발적인 혁명의 시대를 열었다. 


클래식 음악이 세상의 음악 발전을 최고의 단계로 끌어올렸던 천재 작곡가, 연주가의 시대를 열었다. 


융합된 음악이 더 큰 감동을 주는 시대이다. 피아노는 이 두 천재 음악가들을 통해서 서로 다른 장점과 피아노 사랑을 통해 융합의 시대를 열었다. 그들은 경쟁하였고 존경하였으며 서로의 음악세계를 지고지순의 세계로 끌어올렸다.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의 두 피아노 거장을 이야기해 보련다. 프란츠 리스트와 쇼팽이다.


왜 이 둘을 함께 이야기하는지는 그들의 삶이 교차되고 대비되어 음악사에서 다시없는 큰 도약과 발전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특히 피아노곡의 발전에 이바지한 두 거장이 존경스럽다. 아니 깊이 사랑한다. 












그들의 우정과 인간적인 면모, 스토리들의 가치와 시사하는 바가 너무 큰 것 같아서 오래전부터 공유하고 싶었다. 




> 리스트의 헝가리 랩소디의 피아노곡을 감상하다 보면, 피아노의 무지개 빛깔과 손가락이 해낼 수 있는 최대치의 피아노 신의 기술을 본다. 기교가 아니다. 신의 음역과 빛깔이다. 






> 쇼팽의 곡들은 정신적 명상의 행복감과 안식을 가져다주는 피아노의 알파와 오메가를 느낀다. 폴란드 사람들을 포함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쇼팽 음악을 명상과 치유의 음악으로 깊이 빠져들곤 한다. 






> 리스트는 19세기의 록스타, 아이돌 같은 피아노 연주의 팬덤을 만들어낸 최고의 명사였지만, 제자들에게 친근하고 후원으로 금전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인간적인 면도 많았다. 






> 쇼팽은 19세기에 피아노 음악의 절대 경지를 이루어낸 수많은 피아노 전 무곡을 만들어낸 피아노의 시인이었고, 그의 충만한 감수성은 여성의 경지를 넘어서고 그의 내성적인 카리스마는 그가 떠난 후에 수 천 배의 팬덤을 만들어내었다. 






> 리스트는 마성적인 남성 매력과, 작가 등의 다재다능을 보인 천재성을 가진 음악가였다. 그가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연주를 듣고 피아노로 파가니니의 명성을 단숨에 능가하였다. 그의 광대한 보폭과 음악감독의 역량은 74년의 예술가의 삶을 통하여 끊임없이 성장하였고 수많은 역할에서 대성공하였다. 






> 쇼팽은 39세에 꽃잎을 떨어뜨리고 마는 짧은 생애의 천재적 삶에서 그만의 피아노 예술을 녹턴, 프렐류드, 에튀드, 왈츠, 등의 독창적 장르를 열었던 선구자였고, 그의 피아노곡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 명상음악과 같은 정신적 파동을 진동시키는 독특한 세계를 일구어내었다. 






> 리스트와 쇼팽 모두 파리에서 최고의 성공을 거두지만, 그 둘 모두 출생과 성장의 고향인 헝가리와 폴란드 조국에 대한 사랑이 넘쳐서 음악으로 극대화하여 인류의 유산을 남긴 음악가이지 피아니스트 연주자들이었다. 






> 리스트가 담배, 술을 곁들이고 팬들과 더불어 공개적인 피아노 연주 홀을 만들고 대규모 스케일의 음악회를 오픈하는 록스타와 같은 매력과 흡입력의 외향성에 비해서, 쇼팽은 귀족풍의 소규모, 비공개성의 개인적인 모임의 연주를 즐겼던 고매한 매화 같은 산속 깊은 숲의 순결한 내향성의 아름다움에 가깝다. 






> 리스트는 헝가리 랩소디를 최고 정점에 두고, 그의 유작의 대표곡을 만들었다. 쇼팽은 녹턴(야상곡) 등 수많은 폴란드의 가락을 연주하고자 했다. 


특히 폴란드 노래에 의한 판타지아는 쇼팽의 18세에 작곡된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곡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18세는 세상을 알게 되기 시작한 가장 순수하면서 고결한 나이였다. 쇼팽은 그 나이에 그의 청춘에 가장 숭고한 영혼을 담았고 그 중앙에 그의 고향, 폴란드에 대한 애정을 듬뿍 얹었다. 그가 10년간 음악 학원에서 안정을 누리면서 피아노와 음악에 온 정신을 쏟고 마스터가 될 때였지만, 여전히 바르샤바 음악원 원생이었던 쇼팽의 18세는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새하얀 눈과 같았을 것이다. 새하얀 도화지에 새하얀 눈밭에 쏟아지는 피아노로 적은 시들이 조용할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초반의 고요한 걸음걸이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웅성거린다. 그 끝에 들여오는 피아노와 협조되는 관현악기들은 서로를 환상적으로 응대하다가 속도를 내고 달린다. 피아노의 보폭이 넓어지고 고음과 저음을 관통하면서 마차가 달리듯 질주한다. 그렇게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는 서로를 깊고 격렬하게 포옹하면서 여러 악상들을 변주시키면서 지나간다. 





리스트 : 그 당시 수많은 여성팬들을 몰고 온 슈퍼스타 피아니스트 연주가였다. 







쇼팽


< 뉴욕타임스 등등 자료 수집> 




쇼팽과 리스트는 아마도 19세기 중반의 세속적인 피아노 거장들을 넘어서는 뛰어난 예일 것이다. 그리고 꾸준히 이어지는 그들만의 음악의 흐름은 오늘날 그들의 계속적인 선행을 증명한다. 파리 사회와 유럽의 상류사회가 우상화한 이들은 새롭게 인식되는 중산층에게도 손을 뻗치는 음악을 작곡했으며, 그 당시의 친밀한 환상과 대담하고 민족주의적 자부심을 모두 간파했다.




 비록 리스트가 쇼팽보다 37년 더 오래 살았지만, 두 사람 모두 대략 동시대적이었고, 쇼팽은 1810년에 태어났고, 리스트는 1년 후에 태어났다. 둘 다 현대적인 콘서트가 예술적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한 최초의 음악작품들을 만든 위인들 중 하나였으며, 두 작품 모두 화려한 전시 작품의 공급자로서 그들의 이미지를 빛낸 조화로운 발전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사이에는 심오한 차이가 있었다. 쇼팽은 더 내성적이고 귀족적이며 몽상적으로 시적이었다. 연주자로서의 모든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파리 살롱의 더 친밀한 환경에서 자신의 음악을 선보이거나 조르주 상드와 함께 시골로 철수하여 작곡하는 것을 선호하면서 평생 30회 이상의 진정한 대중 공연을 하지 않았다. 






쇼팽의 옆에는 항상 비교되는 리스트가 있었는데, 1830년대와 40년대에 리스트가 외향적인 위대한 쇼맨이었고, 아마도 피아노가 알고 있는 가장 위대한 기술자였을 것이다.




두 사람이 전성기에 연주하는 것을 들은 찰스 할레는 다음과 같이 그 차이를 묘사했다.








"쇼팽이 너를 데리고 영원히 살고 싶어 했을 꿈나라로 데려갔다. 


리스트는 어느 누구도 견딜 수 없는 힘으로 


그의 상속자들을 복속시키는 햇빛과 눈부시게 화려했다.'' 



< 한 음악 전문가의 글에서> 




리스트는 쇼팽의 에이전트, 공동 작업자, 개인 친구, 격렬한 라이벌이었으며 궁극적으로 그의 첫 전기 작가였습니다. Franz Liszt는 또한 Fryderyk Chopin의 'frenemy(친구이자 적'였습니다. 쇼팽과 리스트 모두 피아노와 지울 수없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 1 년 만에 태어났으며 둘 다 파리에서 가장 큰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쇼팽을 그의 마지막 연인인 조지 샌드에게 소개한 사람은 리스트였다. 




그 후, 그들의 관계는 복잡해집니다. 쇼팽이 처음 파리에 도착했을 때 그는 리스트가 또 다른 피아노 거장인 "칼크 브레너 옆에 있는 제로"라고 일축했습니다. 그는 또한 "그의 작품의 주제가 신문과 함께 자리를 잡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리스트는 그가 받은 만큼 좋은 것을 주었다. 1841 년 봄, 쇼팽이 파리에서 드문 공개 독주회를 열었을 때 리스트는 리뷰를 썼습니다. 쇼팽의 리사이틀에 대한 그의 설명은 쇼팽의 전기 작가 데릭 멜빌 (Derek Melville)의 말에 따르면 "유일하게 불쾌하고 보복적"이었습니다. 






다른 때는 그들의 관계가 따뜻했습니다. 쇼팽은 프란츠 리스트에게 그의 첫 번째 연습 곡을 바쳤습니다. 리스트는 진심으로 칭찬했고, 그의 연주회에서 자주 공연했습니다. 비록 자신의 높은 비행, 리스트만의 방식으로 쇼팽을 자극할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쇼팽의 첫 전기를 쓴 사람은 리스트였지만, 그들의 애증 관계는 책 전체에서 분명합니다. 리스트는 쇼팽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그의 성격은 실제로 쉽게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천 가지의 미묘한 음영, 혼합, 교차, 모순 및 위장은 첫 번째 시점에서 거의 해독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구르는 뱀의 꼬인 주름처럼 그들의 감정은 반은 숨겨지고 반은 드러납니다.” 




그러나 리스트가 쓴 쇼팽의 전기는 리스트 자신보다 그의 여주인이 더 많이 쓴 것처럼 보이므로 두 피아노 거인 간의 진정한 관계는 "반은 숨겨져 있고 절반은 드러나게"남아 있습니다. -벤자민 K. 로우






엄청난 음악적 성취를 이룬 작곡가로서의 그의 위상을 고려할 때, 리스트가 낭만적인 작가로서 덜 자주 고려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지만, 그의 글들은 음악과 피아니스트의 우뚝 솟은 모습에서 특이하고 덜 널리 친숙한 면을 드러내고 있다. 그의 작품과 그의 일생 동안 그가 옹호했던 예술적 원리들이 밀접하게 얽혀 있는 그의 글에서 우연히 연결점을 발견하게 된다. 리스트의 쇼팽에 관한 책은 시적 질과 미묘한 분위기의 묘사에 있어서 그의 다른 쓰인 작품들 가운데에서도 돋보인다. 두 사람 사이의 친밀한 우정이라는 개념은 사실 낭만적인 전설에 지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직업적이고 개인적인 삶은 종종 교차하고 겹쳤다. 






< 두 거대한 음악가의 유년 시절 환경 비교 > 




그들은 둘 다 중앙 유럽인이었다. 쇼팽은 1810년 3월 1일 폴란드 리투아니아 연방의 일부였던 도시 젤라조바 울라에서 1795년 최종 분할 이전에 태어났으며, 리스트는 1811년 10월 22일 도보르잔(오늘날 오스트리아 뫼블링겐)에서 태어났다.






두 아이 모두 음악가로 성장하는 힘이 되는 환경에서 자랐다. 그들의 부모는 아들의 특이한 재능을 재빨리 깨닫고, 싹트고 있는 신예들이 적절한 교육과 훈련을 받는 것을 주의 깊게 보았다. 두 집안은 소년들의 부름을 지원하기 위해 기꺼이 희생도 불사했다. 아버지인 아담 리스트와 미콜라이즈 쇼팽은 악기를 구입했는데, 그들이 살고 있는 상황에서 결코 적은 투자는 아니었고, 일급 개인 교습비를 지불했다. 쇼팽의 가장 훌륭한 강사를 찾기 위해 쇼팽의 가족은 결국 그 소년을 바르샤바로 보내 조니, 그리고 후에 엘스너와 함께 공부하게 했다. 쇼팽이 항상 가장 존경심을 가지고 말하는 두 작곡가는 음악에 대한 그의 접근법과 예술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형성했다. 






리스트의 부모는 그들의 훌륭한 아들이 최고의 가르침만을 받도록 하기 위해 그들의 교육에 비용을 아끼지 않았다. 따라서 리스트는 칼 체르니의 제자가 되었고, 그로부터 음악 및 피아노 기술의 기초를 배웠으며, 그로 인해 그는 평생 동안 지속할 수 있었다. 쇼팽이 그의 첫 번째 강사를 오래도록 존경했던 만큼, 그래서 리스트의 체르니에 대한 존경심은 결코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에게 바쳐진 수많은 작품들과 (그 유명한 헤라메론이 작곡된) 이탈리아 난민들을 위해 파리에서 조직된 콘서트 동안에 리스트는 그의 모든 동족을 패러디했다...








그러나 리스트와 쇼팽이 예술을 공부하면서 보낸 세월을 비교한다면, 쇼팽의 학교 교육은 아마도 더 호의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스무 살이 될 때까지 그는 방해나 격변 없이 익숙한 환경에서 배우고 발전할 수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프랑스인이었지만, 그는 항상 그의 폴란드 뿌리에 열렬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폴란드 민요뿐만 아니라 폴란드 문학과 시에도 정통했다. 이민 기간 동안 그는 고국에 대한 고통스러운 그리움을 견뎌냈고, 항상 모국어로 가족과 친구들과 소통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리스트는 우둔한 사람들의 생활방식에 금방 휩쓸려버렸고, 그로 인해 (피아노 연주 이상의) 체계적으로 또는 체계적으로 어떤 것도 공부하거나 배울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이것을 일찍부터 인식했고 후에 인상적으로 넓은 것으로 인식된 학식을 습득하기 위한 자동 학술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는 열여섯 살 때부터 파리에 살았기 때문에 프랑스 문학과 문화가 그의 관심사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프랑스어는 그의 모국어인 독일어를 가장 자연스러운 자기표현의 언어로 재빨리 대체했다. 헝가리에 남아 있는 친척이나 친구가 없어 관계를 유지했을지도 모르는 관계로 헝가리 언어와 헝가리 문화 정체성에 대한 어떤 감각도 1838년의 홍수까지 그 배경으로 밀려들었고, 그 후 그는 자신의 헝가리 정체성과 헝가리 민속음악을 모두 재발견하기 시작했다.






쇼팽과 리스트는 아동 신예들이 등장하자 재빨리 대중 앞에서 공연을 시작했고 현대 언론은 즉시 그들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1822년 12월 1일 비엔나에서 리스트가 주최한 음악회의 라이프치히의 《알게메인 뮤지칼리스체 차이퉁》 1823년 1월 호에 실린 리뷰에 따르면, "젊은 거장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의 나이를 고려할 때 이 소년의 연주에 대한 가장 깊은 경이로움으로 우리를 옮겨주는 사람은 바로 그것이다. 구제할 수 있는." 몇 달 후, 1823년 2월 24일 바르샤바에서 쇼팽이 개최한 콘서트의 쿠리에르 들라 페시 필크네즈에서 출판된 리뷰는 "오늘 저녁 이후 우리는 비엔나의 리스트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수도는 그와 동등하거나 아마도 더 완벽한 피아니스트를 자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들의 만남, 리스트의 후원 > 


그들은 이후 파리에서 만났는데, 1832년 2월 26일 쇼팽의 살레 플라이엘에서의 첫 공연인 쇼팽의 콘서트에 리스트가 참석했다. 그들은 종종 콘서트와 행사의 일부로 함께 출연했다.


리스트의 헝가리 광시곡을 여러 차례, 오케스트라 연주와 피아노 연주를 번갈아가면서 들어본다. 역시 원곡인 피아노 연주의 헝가리 랩소디를 감상하면서 리스트를 더 깊게 느끼게 된다. 헝가리에서 자라나고 헝가리 국립음악원을 실질적으로 후원하고 설립한 리스트에게 헝가리는 그의 음악의 기둥이고 뿌리다. 쇼팽보다 35년간 더 삶을 살면서 쇼팽의 피아노 음악을 훨씬 발전시키고 쇼팽의 전기를 쓰고 쇼팽을 널리 알린 리스트는 음악사에 큰 영향을 끼친 위대한 인물이었다. 






< 더없이 존경하게 되는 리스트의 음악사적 업적> 




리스트는 교향시를 창조한 심포니에서도 위대한 음악을 탄생시킨다. 그의 ‘파우스트’ 교향시는 표제음악이 풍미하던 시대에, 바그너와 더불어 독일 음악가를 이끌면서 괴테의 파우스트를 오케스트라 음악에 담았다. 리스트가 존경하였던 베토벤의 교향곡의 음악을 일정 부분 넘어서는 낭만주의와 대 문학의 주제를 심오하게 시처럼 표현한 것이 리스트의 ‘파우스트’ 교향시이다. 그가 이 곡을 듣고 있으면, 리스트가 피아노곡을 넘어서서 오케스트라에서 이룬 음악적 업적이 압축되어 있음을 감동받는다. 1000여 곡의 피아노곡을 만든 리스트, 베토벤 교향곡을 비롯하여 수많은 관현악곡들을 피아노곡으로 재탄생시킨 리스트, 그러하기에 그의 교향시 ‘파우스트’에서 베토벤의 후예. 음악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프란츠 리스트의 위대함을 감격받지 않을 수 없다.


더불어 리스트는 전 재산을 털어 음악가 후배들을 양성하는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리스트 음악 학원을 비롯하여 수많은 음악가들을 지원하였다.






나는 10대 예술학교 시절까지 피아노를 열심히 공부한 경험이 있다. 


예술 학교 시절, 리스트는 저 멀리 경계 너머에 피아노의 귀신, 신처럼 다가설 수 없는 분만 같았다. 그에 비해, 쇼팽은 가까이 곁에 있을 수 있는, 아름다운 시를 쓰는 큰 형님 같은 존재였던 기억이 난다. 




중년이 된 지금의 나는 이 두 분에 대한 느낌은 존경과 흠모뿐이다. 두 분 다 가까이 다가가기에는 너무 거장이고 위대한 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스트에 대하여는 한 가지 달라진 감정이 있다. 위대한 위인이지만, 너무도 '인간적'이고 큰 '스승'같은 음악가라는 점이다. 신보다는 한참 가까워진 흠모이다. 그가 없었다면 쇼팽이 지금처럼 우리 곁에 가까워져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쇼팽의 음악적 업적이 명상과 같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시적인 그것이라면, 리스트의 음악은 신이 허락한 인간 최고의 경지를 피아노에 표현한 너무나도 인간적인 신의 모습이다. 사랑한다. 리스트와 쇼팽의 음악을.... 이 두 분이 인류 곁에 세상에 태어난 것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https://youtu.be/xgzzedM1bHY?si=l4SxNqCVF02awQE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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