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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프맨작가 Jun 17. 2024

최고의 성공, 차이콥스키의 불행한 삶 두 얼굴

차이콥스키 비창교향곡 6번, 제5번 교향곡의 비화

차이콥스키의 두 얼굴을 아시나요? 세계 3대 발레 음악의 대가인 낭만적인 작곡가의 사교적이고 성공한 얼굴과 마지막 작품이 된 <비창>의 얼굴 그 성공과 비련의 주인공,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음악가 중에 한 대가인 차이콥스키를 만나보세요!   




일요일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5번과 교향곡 6번을 들으면서 이 글을 적습니다. 

가장 낭만적인 선율들이 고통스러운 울부짖음과 뒤섞이는 차이콥스키의 우수가 깃들어 있는 이 교향곡들을 들어보세요. 그는 겉으로 보이는 화려한 낭만적 아름다움 뒤에 울부짖고 피를 토하는 고통을 감추지 못해 폭발하게 되는 빛과 그림자를 모두 가진 음악을 창작한 천재 음악가입니다. 그의 음악을 연주하는 현악의 부드러움은 러시아의 목가적인 시골을 보여주다가도 시베리아의 칼바람의 광기와 살인적인 폭풍우를 보여줍니다. 열정으로 가득한 젊은 시절의 낭만도 승리를 쟁취한 팡파레의 순간의 희열도 담겨 있습니다. 죽음을 임박한 삶의 애뜻함과 추억들이 아련하게 펼쳐집니다. 그 모두가 러시아의 설경 속에서 녹아내리는 것도 같습니다. 그런 위대한 음악을 남겨준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차이콥스키의 두 얼굴을 아시나요? 세계 3대 발레 음악의 대가인 낭만적인 작곡가의 사교적이고 성공한 얼굴과 마지막 작품이 된 <비창>의 얼굴 그 성공과 비련의 주인공,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음악가 중에 한 대가인 차이콥스키를 만나보세요! 




“그 어느 분야에 차이콥스키처럼 강력하고 맹렬하며 흡인력이 강한 사람이 있단 말인가? ... 그는 브람스처럼 심오하지는 않지만 그보다 좀 더 시적이다. 무엇보다도 함부르크 출신의 작곡가(브람스)보다 그림을 잘 그린다. 그는 붓을 더 눈부신 물감 속에 담그며 팔레트에는 색깔이 더 많이 들어 있다. 야수 같은 붓놀림은 유럽 문화와 절제미로 조절되었다.”


<차이콥스키의 음악> 뉴욕 카네기 홀 연주의 평가 



1893년에는 런던에서 초청연주회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 수여식에 참석했다. “지금 벌어지는 것과 같은 현상은 겪어본 일이 없다. 사람들은 내가 무슨 위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경의를 표하고 도처에서 와달라고 해서 나는 숨쉬기도 힘들 지경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내심 이런 관심과 인기를 만끽했다.


<영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을 때>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 <비창>을 아시지요? 차이콥스키를 닮은 교향곡 <비창>은 슬픔, 절망, 애도, 추억, 극복 등의 연결들이 이어지는 선율들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세계 3대 교향곡이라고 하면 베트남의 운명 교향곡,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 그리고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이 꼽힙니다. 


그가 죽기 전 9일 전에 초연된 비창 교향곡이 탄생하기 전에, 5번 교향곡은 이미 전설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1888년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초연이 된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은 청중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얻었습니다. 


오히려 비평가들이 이해하지 못하였던 이 교향곡은 그 배경을 이해하면 공감하지 못할 사람들이 없을 겁니다. 




숨겨진 이야기를 공개합니다. 



첫 번째, 10여 년간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폰 메크 부인이 병마와 싸우고 있는 파리로 가는 중에 작곡이 시작되었습니다. 3개월 동안 이 대 작품이 작곡된 것은 차이콥스키의 폰 메크 부인에 대한 애증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정합니다. 그녀를 만나지도 않고 편지로만 교류한 것도 특별한데, 그녀에게 차이콥스키의 고백이 있었던 겁니다. 자신은 동성연애자라고 밝힌 것이지요. 그 때문일까요? 폰 메크 부인의 후원금도 끊기고 편지도 끊기게 되었지요.. 1년에 6000루블의 후원은 1877년부터 10년간 지속한 이 둘의 관계는 무엇이었을까요? 폰 메크 부인은 차이콥스키를 사랑하였을 겁니다. 하지만, 소울 메이트로 예술적 동반자로서 만족하였던 겁니다. 펜으로만 후원하는 것으로 충분히 기뻤을 것인데, 차이콥스키의 동성연애자 고백에 발병하고 후원을 끊었던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차이콥스키가 무려 1200통의 편지를 보내고 약 15년간 교류하였던 지고지순한 소울메이트의 인연이 1890년 갑자기 파국이 나버리게 된 비극이 됩니다. 그러한 배경에서 이 교향곡은 그의 6개 교향곡 중에서 가장 감정 기복이 심하게 보이는 멜로디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폰 메크 부인에 대한 애증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두 번째, 1941년 독소전쟁이 레닌그라드(현 페테르부르크)에서 발발하던 그때, 차이콥스키의 이 교향곡 5번이 연주되었습니다. 히틀러의 나치가 쳐들어왔을 때, 소련의 시민들과 군인들은 끝까지 저항하였는데요. 그때 소련군을 위해서 끝까지 연주된 것이 이 교향곡입니다.  나지 군의 포탄이 터지는 전쟁 중에서도 끝까지 연주자들과 관중들이 필 하모닉 공연장에서 남아서 공연을 이어간 것이 BBC의 실황중계되었습니다. 전 세계에 소련의 항전 - 나치 독일군에 저항하는 의지를 보여주는 교향곡이 되었지요. 












부모 모두 음악가로 성장하는 것을 반대하였던 차이콥스키는 부모의 요청대로 법률학교에 입학하지만, 결국 음악가의 길을 걷게 됩니다. 늦깎이로 20세에 음악대학교에서 공부를 하였고, 20대 중반에 음악대학교수에 이릅니다. 드러내지 못한 천재성이 폭발한 것이지요. 러시아를 대표하는 가장 성공한 낭만주의 음악가였지만, 그는 한 편 생 불행한 개인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동성연애자였기 때문입니다. 한때, 그에게 절박하게 매달렸던 여인과 하고 싶지 않은 결혼을 하였지만, 수개월만에 그 결혼도 파국을 맞게 됩니다. 그가 아내에게 동성연애자임을 고백한 것과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었던 것을 아내가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그의 불우한 삶이 그의 음악에 흐릅니다. 영화 <차이콥스키의 아내>에서 3개월밖에 결혼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고 남편 차이콥스키에게 버림을 받은 아내 안토니 나와 불행한 삶을 보여줍니다. 




<차이콥스키의 지휘로 초연, 교향곡 6번 '비창'>



이 우울한 교향곡의 초연에는 좋은 반응이 없었습니다. 5번 교향곡에 모두가 열광하던 것과 대조적이었습니다. 초연 이후 사람들이 이 교향곡의 음악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염려하던 차이콥스키는 그의 동생의 아이디어로 <비창>이라는 제목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마지막 교향곡을 초연한 후 9일 뒤에 차이콥스키는 죽게 됩니다. 콜레라 유행하던 그 당시 끓이지 않은 물을 마신 것이 그의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설, 그가 동성연애의 추문을 가지고 있는 것을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독살을 유도하였다는 설 등이 있습니다. 1893년 차이콥스키가 죽고 나서 이 마지막 교향곡 <비창>이  그의 레퀴엠 장송곡 같은 그의 불운한 삶을 모두 들려주는 것 같습니다. 그의 사후 2번째 연주 때 공연장에서 울지 않는 청중들이 없었고 공연장은 울음바다였다고 합니다. 실제로 이 음악을 들으면서 슬퍼지지 않는 감상자를 없을 겁니다. 애도, 슬픔, 비련, 비애, 비극, 죽음, 고통.. 이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교향곡 6번 차이콥스키의 음악은 <비창>이라는 제목처럼 그의 삶의 양면적인 성공의 환희와 개인적인 비창의 삶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 차이콥스키의 장례식이 열렸습니다. 장례식은 슬픈 의식이지만, 오늘날과 같이 그렇게 장엄하고 엄숙하게 거행될 때, 이 슬픔은 다소 덜 분명해집니다; 고인들에 대한 보편적인 존경의 장면은 우리에게 한 사람의 삶과 노동이 흔적을 남기지 않고는 지나치지 않는다는 위로를 제공합니다. 도시의 지성인 전체가 차이콥스키를 매장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음악적 인상을 느끼고, 감사하고, 인식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 위대한 작곡가에게 마지막 경의를 표하고, 그의 관을 살짝 보기 위해, 그러한 때아닌 죽음에 대해 씁쓸한 한숨을 쉬기를 열망했습니다. 고위 관리들, 학생들, 말과 생각의 예술가들, 그리고 일반인들이 차이콥스키의 무덤으로 동행하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의 화환에 쓰인 것처럼, 꺼진 "러시아 음악 예술의 선도적인 빛"의 영혼에 평화를 주기 위해 신에게 간청했습니다."


<차이콥스키의 죽음> 책에서 인용




차이콥스키는 그의 마지막 교향곡 6번을 초연하면서 평소 그의 큰 움직임을 보여주는 지휘가 아니라 촛불이 꺼지는 듯한 지휘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 곡이 그의 레퀴엠이라고 느끼게 됩니다.  4악장의 끝에서 한동안 지휘봉을 잡고 멈추어 있는 그의 모습에서 그를 가까이에서 알던 사람들은 울게 되었습니다. 귀족 가문의 젊은이와 동성연애로 소문이 파다했던 차이콥스키는 죽음을 예감하고 이 곡을 작곡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세력이 있는 권력가들의 비밀 법정에 서게 된 차이콥스키는 '자결'이라는 판결을 받았다는 음모론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차이콥스키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독약이 사인이라는 러시아 정부의 추적을 밝힌 많은 저술, 책들이 있습니다. 그가 이 교향곡 6번을 마지막으로 저세상을 간 것은 어쩌면 그의 삶의 끝에서 의도된 그 자신을 위한 레퀴엠 장송곡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차이콥스키가 알았을 겁니다. 그를 압박하였던 당시 러시아 정부와 권력자들의 상황도 차이콥스키의 마지막 교향곡 <비창>에서 그의 비참한 고뇌를 담게 만들었던 겁니다.




"차이콥스키는 1840년에 태어나 1893년에 사망한 러시아 작곡가이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제정러시아의 말기로 극심한 혼란기이다. 1850년대 러시아는 크림전쟁에서 패한 후, 군사적, 사회적 후진성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를 극복하려고 농노 해방 등 근대화가 시작하였으나, 이는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였다. 해방된 농도들이 경제적으로 성장하지 못하였고, 각지에서 소수민족의 소요가 일어났다. 경제 공황 속에 노동 운동이 과격화되어 혁명의 싹이 커져가고 있었다. 차이콥스키가 사망한 지 불과 8년 후인 1905년에 제1차 러시아 혁명이 일어날 정도였으니 그 시기의 러시아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차이콥스키 ‘비창’ 교향곡 [Pyotr Ilyich T chaikovsky Symphony No. 6 B minor “Pathéque”] (클래식 명곡 명연주,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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