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나라의 단편소설 1장
생애 두 번째 화초를 곁에 둔다. 첫 번째 화초는 고무나무였고 중국의 해외살이 방 한 칸에서 죽어갔다.
그때 죽어간 화초에 얼마나 미안하였는지 다시는 키우지 않겠노라 스스로 다짐하였었다.
생명체에 죄를 지은 것 같아서 꺼이꺼이 울던 그 아픈 기억에서 멀어져 갔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흘러서, 베트남 시골 일터의 사무실 창가에 라우람 열대 식물을 가져다 놓았다.
사실 고향으로 돌아간 아내가 억지로 떠맡겨 놓은 녹색생명체였기에 애정을 키워가려고 애쓰는 중이다.
* 라우람(베트남어: rau răm, 학명: Persicaria odorata 페르시카리아 오도라타[*])은 마디풀과의
열대 식물이다.
첫날은 우리 둘 다 데면데면 어색하였다. 자기가 무슨 고귀한 귀족의 품계를 가진 여인이라고 새침 떼는 것 같았다. 아니다. 그녀는 너무도 수줍어서 할 말도 못 하고 숨어버린 모양이었다. 그러한 여인에게 물을 길어다 주었다. 너무 많이 주면 안 된다고 들었지만 또 검색을 해보니 물에 잠겨서 행복한 수초라고 해도 될 것 같았다. 정말 어떻게 다가서야 할지 걱정이 많았다. 일단 하루에 한 번씩 물을 주기로 작정한다.
물을 줄 때마다 그녀의 얼굴은 청초한 물광 피부가 되었다. 잎새들이 파릇파릇 솟아나고 물기 먹은 얼굴이 반짝였다. 윤슬이 잎새마다 차오르는 것을 보니 그녀의 모습이 우아함으로 펄럭이면서 내게 미소를 보내는 것 같았다. 그것도 잠시 한순간이었다. 그녀는 좀처럼 내 친구가 될 수 없었다. 그녀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 또한 마음에 상처 같은 빚이 있었다. 책임감에서 무너지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게 더 깊이 다가서고 싶지 않았다.
베트남 5,6월의 더위는 불구덩이 같기도 하고 사우나 지붕 안에 있는 것 같다. 한낮의 불쾌지수가 한창일 때, 라우람 그녀를 자꾸만 쳐다보게 된다. 등 뒤에서 나를 보고 불평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내게 할 말을 못 하고 울고 있는 것 같기도 하였다.
사실 라우람은 아내에게 내쳐짐을 당했다고 호소할 수도 있었다. 아내가 고향으로 떠나면서 내게 강제로 맡기게 된 것이다. 아내와 함께 있던 아늑한 집에서 오래도록 그 자리에 있었으니 집을 잊어버린 셈이다. 그 자리에 바깥바람도 불었고, 태양이 지고 뜨는 것도 볼 수 있었던 전망 좋은 테라스였다.
그곳을 강제로 퇴출당하고 수년간 지켜오던 자리를 잃어버린 라우람은 새집으로 옮겨온 것을 서글퍼 하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서야 그 슬픔을 깊게 이해할 수 있었다.
라우람을 며칠동안 가만히 바라보다가 꼭 <어린 왕자>의 유일한 장미 같은 생각이 들었다.
창문 밖에 숲을 이룬 수많은 나무들은 모두 친구 나무들이 곁을 지키고 있다.
라우람은 동족 친구 없이 혼자서 떨어져서 살고 있었던 게다. 그녀의 외로움, 서글픔, 애닲음이 느껴진다.
그것도 새로운 주인 아니 유일하게 기대여야 하는 무뚝뚝한 남자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겨야 하는 것이
참으로 기막힌 변화였을 것이다. <여름나라 화초여왕,라우람과 어른왕자>이렇게 이 이야기의 글 제목을 지어보았다.
내 등에서 라우람의 시선이 천 갈래의 잎사귀로 변해서 나를 노려보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다시 라우람의 다정한 시선이 나를 격려하는 것 같다.
엇갈린 감정, 섞이고 혼합된 감정이 라우람과 나의 등에 맴돌고 있다.
그녀를 더 이상 모른척할 수도 없고 더 이상 무관심할 수도 없다.
나는 그녀와 연애 감정에 빠진 것 같았다.
마치 어린 왕자에게 투정하는 장미에게 사로잡힌 것처럼...
주말부부, 격월 부부인 아내가 이번 달 내내 돌아오지 않고 나 혼자 해외살이를 할 때 라우람이 더욱 큰 위로가 된다. 라우람은 말더듬이도 아니고 실어증 환자는 더욱 아니다. 그녀는 아주 고요할 뿐이다. 그녀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할 뿐이다. 우리 사이에 특별한 언어와 대화가 필요할 뿐이다.
어린 왕자가 다른 점은 나는 어리지도 않고 어른에다 결혼한 처지인지라 누군가를 이성으로 사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사랑에 빠졌다. 라우람에게 사로잡힌 것은 확실히 사랑의 감정이다.
그것은 아내에 대한 명백한 배신이겠다. 라우람을 사랑하는 것을 플라토닉 러브라고 변명하고 싶었다.
아내에게 이 마음을 고백할 수 있을까? 아내가 돌아오기 전에 아니면 돌아온 후에 아니 다시 라우람을 돌려주고 싶지 않다고 고백하고 싶었다.
어느 날 노랗게 변한 잎새를 발견하였다. 잎새가 갈라져서 생채기가 난 것도 보였다.
라우람과 이별하고 싶었다. 아픈 라우람을 곁에 둘 수가 없다. 아내에게 책임을 돌려버리기로 결정하였다.
나는 라우람을 곁에 둘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가장 기본적인 책임감인 생명체 수호의 자격을 놓쳐버렸다.
라우람이 아파하고 있다. 며칠이 또 지나면 잎새들이 모두 누렇게 변해갈 것 같았다.
내가 감당할 수준이 아닌 것 같다. 또다시 화초를 죽일 수는 없었다.
모든 것이 되돌릴 수 없는 삶과 죽음의 상황에 직면하기 전에 끝내고 싶었다.
무관심의 책임을 회피하고 싶었고, 라우람과 헤어지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인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의 짧은 동거 생활은 끝이 날 것으로 이미 만날 때부터 결정되었다.
이렇게 헤어질 바에야 만나지 않는 것이 날 것인데, 왜 우리는 늘 새로운 존재를 만나야 하는가!
살아가는데 왜 관심을 기울이고 애정을 갖게 되는 것인가? 이렇게 마음이 아픈데, 왜 그렇게 감정 낭비를 하였을까? 라우람은 죄가 없었다. 오로지 나의 욕심이 문제였다.
라우람을 제대로 키울 수 있을 것이라는 오만이 부른 사고였다.
절망의 끝에서 병든 라우람을 돌려보내기로 하였는데, 상황이 급반전 되었다.
베트남 사람 정원사 할아버지가 나타난 것이었다. 그 정원사에게 라우람의 병을 진단받았다.
이 정원사는 정확히 라우람이 어디가 아픈지 알고 있었다.
향수병이었다. 집이 그리워 걸려버린 향수병, 수년간 그 자리에서 바라보던 풍경을 빼앗긴 병,
라우람은 속가슴에 상처가 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것이 맞은 것 같았다.
정원사는 치료의 진단을 해낸다. 자연으로 돌아보내자는 것이다. 일터의 여름나무들이 많았는데, 그들 중 하나로 입양시키고자 하였다. 아니 사람의 손길이 더 이상 타지 않는 자연으로 돌려보내자고 한다.
정원사의 먼발치에서 잘 살아남아주면 좋겠다. 그렇게 소리치고 도망 왔다
그렇게 우리는 완전히 헤어졌다. 때로는 헤어지는 것이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경우도 있다.
정원사에게 맡겨져서 자연으로 돌아갔다. 라우람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람들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자연으로 돌아가버렸다. 라우람이 떠나는 날, 나는 어른 왕자가 되어 그녀를 그리워하기 시작하였다.
- 제1장 끝, 제2장 연재 계획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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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맨작가는 언제인가 소설책을 출간할 겁니다. 문피아에 이미 등록된 소설도 있지만요.. 이렇게 이따금 브런치에 공개하는 단편소설들에 공감해 주시면 작가로서의 삶에 큰 위안과 위로가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