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프맨작가 Jul 27. 2024

백-20.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베트남전쟁 역사 한장

한장 요약, 베트남 전쟁의 역사 


미국은 역사상 첫 패배라는 굴욕을 당했다. 5만 8,000명 이상의 미군이 사망했고, 베트남 추산 500만 명 이상이 이 전쟁에서 죽었다. 이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미국에서는 거대한 반전 운동이 일어났고, 결국 징병제가 폐지되었다. -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은 오만의 결과, 처음으로 패자가 되었다. 












호찌민시에 관광지 중심에 독립궁이라고 불리는 역사적 현장은 베트남전쟁 당시 남부 베트남의 대통령궁이 있었다. 


이곳이 베트남인들과 세계인들에게 특별한 것은 북부 베트남이 미국과 우방군에게 승리한 기념관이자, 미국에게는 뼈아픈 패배의 기록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곳 옥상에 놓여있는 헬리콥터는 당시 탈출하는 남부 베트남의 고위 정부 관련자들을 위한 것이었을까? 


50년이 지나서 이곳에 헬기가 놓여있는 것은 베트남 전쟁의 상황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일까? 


베트남 전쟁은 50여 년이 지난 오늘날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을 만들었고 또 베트남인들의 자긍심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 전쟁은 너무 참혹하였는데, 지금도 러시아-우크라 전쟁은 끝나지 않고 있다. 


세계 평화를 위하여 이 글을 쓰고 싶었다 






독립궁-이전 남북 베트남의 대통령궁의 지하 벙커에는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는 정보 탐지 연락 시설들이 전시되어 있다. 


반세기 전 오랜 세월이 묻어 나오는 첩보영화에 나오는 교육 시설, 연락 시설들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이곳에 앉아서 남부 베트남의 패망을 목격하던 사람들이 상상된다. 


하지만, 무능한 남부 베트남의 대통령과 그 정권의 부패로 그들은 질 수밖에 없었다.


냉전시대 자유진영이었던 남부 베트남을 지원하던 미국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심각한 정치 현실이었다. 부패한 자유진영 국가, 남부 베트남은 국민의 원성만 샀다. 


그 당시 가톨릭만 적극적으로 장려하면서 민중의 종교였던 베트남 불교를 탄압하던 남부 베트남의 권력자들이 있었다. 







영화를 상영하던 장소가 지하 벙커 안에 있다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갑자기 낭만적인 영화 <시네마 천국>의 영사기가 생각난다. 낭만은 평화로운 시대의 향수일 뿐이다. 




아니다, 이곳은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 <지옥의 묵시록>이 더 잘 맞는다. 


영화 속에 지옥으로 그려진 그 전쟁터에서 바그너의 음악을 듣고 베트남의 정글에 폭격을 가하는 헬기 안의 미군들이 떠오른다. 






당시 베트남 호찌민 주변의 상황을 담은 지도들과 현황판들이 전시되어 있다. 


호찌민 루트를 보여주는 지도 같기도 하다. 북베트남은 호찌민까지 베트공들을 지원하기 위한 병참도로와 오솔길을 만들었고 그 길들을 호찌민 루트라고 부른다. 이 루트가 라오스, 캄보디아까지 연결되어 있었는데, 미국은 베트남전쟁에서 철수 전 라오스, 캄보디아까지 공습을 하는 이유로 이 호찌민 루트를 만든 북베트남을 공격하는 것으로 명분을 들었다. 

















전쟁 당시의 군사 연락 시설들이 정말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 


미국 세계 최강 국가와 가난한 신생국 베트남과의 전쟁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되었다. 미국 패전의 결과는 미국이 베트남의 사정을 읽지 못한 것이 원인이었다. 더 큰 원인은 부패한 남부 베트남 정부가 농민들의 강력한 지원을 얻은 북부 공산당 베트남과 남부의 베트콩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 원인이었다. 




1954년 베트남이 미국의 지원을 업었던 프랑스군을 이겼다. 전쟁을 이긴 베트남 북부의 지도자 국부 호찌민은 1956년 남북 베트남과 함께 통일을 위한 총선을 제안하였지만, 남부 베트남의 응오디지엠 대통령은 이를 거부한다. 미국도 베트남이 통일되면 도미노 이론처럼 베트남과 동남아시아가 공산국가들이 되는 것을 막으려고 한다. 그렇게 미국이 개입하게 되면서 베트남 전쟁이 촉발된 것이다. 




물론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던 남부 베트남의 응오디지엠 대통령의 정권이 제대로 나라를 재건하였다면 상황을 달라졌을 것이다. 응오디지엠 대통령의 무능과 부패로 국민들의 신망을 잃었다. 특히 남베트남의 농민들의 반발을 탄압하고 엘리트들만을 위한 정치를 하였다. 그는 농민들은 베트공화 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남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 = 남베트남 공산당 + 농민군 = 베트공의 출현으로 미국 군인은 베트공과의 지상전에서 수많은 미군들의 목숨을 잃게 된 것이 베트남 전쟁의 참혹한 지상전이다. 




1964년 미국은 명분을 확보한다. 통킹만 사건으로 북베트남과의 교전을 구실로 미국 군사개입 시작되었다.


이때 대한민국도 1964년~1966년까지 4차에 걸쳐서 파병하고 1973년 철수할 때까지 장, 단기 체류 한국군은 약 30만 명의 월남 파병을 하게 된다. 그 당시 한국으로서는 한국전쟁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은 가난한 국가로서 국가 재건을 위한 월남파병이라는 최선의 결정을 내린 것이다. 한국군의 월남 파병은 미국의 경제 지원을 이끌어내었다. 그렇게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내게 된 초석을 깔았다. 
















당시 세계는 냉전시대이었기에, 미국은 중국과 구소련의 눈치를 보고 북진하지 않았다. 


1965년 베트남 남부의 베트공 소탕 시작으로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였다. 


하지만, 정글의 베트콩을 상대로 미군들을 제대로 싸울 수가 없었다. 부비트랩으로 25%의 미군이 죽었으면서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의 실패를 감추고 미국 국민을 속였다. 




1968년 1월 30일, 북베트남군은 60만 군인을 투입, 미국에 대한 공세 대규모로 전세를 뒤엎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새로운 미국 대통령인 닉슨은 닉슨 독트린(1969/1970)을 발표하면서 '미국이 정치적, 군사적 개입 없이 아시아 국가들은 스스 협력하고 대처하여야 할 것이다'라는 것을 선언한다. 닉슨은 미군을 베트남에서 슬슬 발을 빼되, 미국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베트남 북부에 엄청난 폭격을 한다. 1960년대에 이어서 1970년대 미국에서는 반전시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닉슨 정권은 위기에 봉착한다. 미국에서 히피 문화가 트렌드를 만들게 된 것도 이 시대였다. 




닉슨은 중국과 러시아와 화해정책으로 북부 베트남을 협상 테이블에 끌어내는데 성공한다. 그렇게 미국의 뜻대로 베트남 남북 분단 유지할 수 있는 국제 환경 조성을 만들었던 것처럼 보였다. 그것도 2년을 가지 못해서 북베트남이 직접 남베트남 공격하면서 베트남은 통일된다. 사이공 도시 이름은 호찌민시로, 베트남 건국의 아버지 이름으로 도시 이름이 바뀐다.




1973년 파리 강화 협정에서 남북 분단을 잠시 유지하였다. 하지만 미군 철수 후 미군이 지원한 무기만 보유한, 남베트남 부패는 북베트남 침공을 막지 못하였다. 남베트남은 자유 방종, 부패의 온상이었고 그에 대한 대가는 인민을 위한 공산당 북부 베트남 정권에 필연적으로 정복당할 수밖에 없었다. 












1975년 베트남 남부의 수도 사이공은 북부 공산국가로부터 완전히 정복당한 이후, 베트남은 중국과 같은 개방의 길을 걷는다. 10년 만에 베트남 공산당은 도이머이 정책을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9년이 지나서 1995년 베트남은 미국과 수교한다. 


오늘날, 미국과 베트남은 떼어낼 수 없는 관계로 베트남은 발전하고 있다.


또 한국은 베트남에 투자 1위국으로서 베트남 경제와 가장 밀접한 이웃 국가가 되었다. 




도이 머이(베트남어: Đổi mới / ��, renovaton 또는 innovation, 쇄신이라는 뜻)는 베트남에서 흔히 사용되는 용어인데, 1986년에 베트남 공산당 제6차 전당대회에서 건의된 슬로건이며, 공산주의 기반의 혼합 경제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주창한 개혁 개방 개념이다. (백과사전 인용)








호찌민의 중심지에 위치한 독립궁 관광의 끝은 기념품관이다. 그곳에 중심을 차지한 것은 다양한 무기의 장난감들이다. 베트남 전쟁의 승자는 베트남의 내셔널리즘이었고 오늘날 베트남인들의 자존심이 되었다. 

















세계인이 바라보는 베트남 전쟁은 서방과 동방이 보는 시선이 엇갈릴 수도 있다. 이미 50년 전의 냉전시대의 과거로만 보기에는 희생이 너무 컸다. 또한 1945년 해방 후 베트남의 근대, 20세기 역사는 아직도 남북한으로 분단되어 있는 한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잘못 그려진 태극기이지만, 한국-베트남의 우방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보여주는 태극기 농라 모자가 시선을 잡는다. 












미국진영에서 베트남 전쟁 파견 참전국이었던 한국은 오늘날 베트남과 가장 가까운 무역교역국 투자국, 관광여행국 중에 1.2위 국가가 되었다. 호찌민 독립궁 안에서 찍은 한국의 태극기가 그려진 베트남 전통 농라모자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베트남전쟁에 파견된 한국군 32만명 중 5,099명의 사망자(KIA)와 11,232명의 부상자를 기록하고, 31만명이 생존 귀국하였다. 또한 159,132명이 고엽제 피해자로 간주되며 화공약품 후유증으로 귀국후 병사자가 다수 발생하였다. 




베트남 전쟁 참전의 대가로 대한민국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경제원조자금을 지원받았고, 이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비용으로 일부 충당되었다. 베트남 전쟁 파병은 한국 경제의 활로를 트고 군을 현대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위키피아 백화점 인용)











매거진의 이전글 백-17, 여름나라 거인 나무 친구에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