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 인사이트-천사의 시’ 화가이자 도미니크 수도회 사제인 '김인중 신부의 삶과 예술 세계'
에서 인용된 글들이다.
“김인중 신부의 그림은 하늘에 쓴 시다.”
“천사가 그림을 그린다면 그의 그림과 같을 것.”
세계적인 미술 평론가 故 웬디 베케트가 “만약 천사가 그림을 그린다면 그의 작품과 같을 것”이라 평할 정도로 현지 화단의 사랑을 받고 있는 김인중 신부다.
동양화의 선과 서양 추상화의 기법을 접목한 김 신부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유럽 작가들의 창작물과 뚜렷이 차별화되는 작품으로 유명하며, 그의 작품들은 스테인드글라스 종주국인 프랑스의 샤르트르대성당을 비롯, 독일·이탈리아·스위스 등 세계 38개 나라에 설치되어 있다.
스테인드글라스는 내 작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빛은 사랑이다
볼 수 있는 것과 아닌 것....
진정한 예술가는 돈과 무관하게 산다.
"결국 빛이 남는다.
색채가 시각적인 영감이라면
빛은 그 온갖 주관을 걷어낸 순수함이다"
<김인중 신부의 말씀 중에서..>
사진출처 : KBS 인사이트 김인중 신부에 대한 다큐멘터리에서 인용..
그림은 예술작품은 감상하는 사람들이 그 아름다움에 영감과 감동을 받을 수 있고 카타르시스를 받아야 하는 소명을 지닌다고 믿는다. 절대 일부 현대미술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현대 미술 중에서 일부 모호성과 순간적인 포착성 등이 주는 대중성에만 매몰된 작품들에 대하여 감상자로서 조금은 평가의 말을 주고 싶을 때가 있다.
빛의 화가 김인중 신부의 그림은 색채와 빛을 담은 현대미술이라고 할 수 있지만, 동시에 종교미술이다.
종교미술은 거룩하고 경건한 영감을 준다. 그 종교에 신앙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존경과 경외감을 갖고 있는 유신론자들에게도 깊은 감명을 받게 한다.
그런 점에서 김인중 신부의 기도에서 그가 흘리는 눈물을 보고, 그의 작품에서 또 한 번 감동을 받게 된다.
천사가 그린 작품일 것이다, 이 말에 동감한다. 그의 작품은 그가 그린 것이 아니고 신에게 온 삶을 바친 한 인간의 깊은 신앙심이 녹아서 신의 언어로 표현된 것이다.
본인은 특정 종교에 신앙심을 갖고 있지 않지만, 경건하고 신실하게 법당에도 천주교 성당에도 기도를 올린다.
신에 대한 겸허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유한한 삶을 충실하게 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된다고 생각한다.
3년 전 한국에서 떠나올 때, 동네 성당에 들려서 홀로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기도를 하였다.
앞으로 새로운 도전에 굴하지 않고 잘 버텨나가기를 그래서 안정된 제 자리를 찾게 해주십사, 하고 머리를 깊이 파묻고 스테인드글라스가 두른 성당에서 기도를 하고 왔다.
시끄럽지 않고 성스러운 종교는 분명히 위안을 주고 그런 위안을 김인중 신부님은 사람들에게 신의 언어를 볼 수 있게 해준다. 김인중 신부님 같은 분과 그의 작품들이 세상의 정신적인 눈을 깨끗하게 씻겨주는 구원자임에 틀림이 없다.
"누구든지 자기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기 혀를 억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셈이니 그의 신앙생활은 결국 헛것이 됩니다." <야고보서 제1장 26절>
새벽에 모든 것이 빛으로 바뀌어 가는 시간, 우리는 깨어난다. 빛이 세상을 뒤덮으면 그 광채가 그림자로 덮여있던 어둠을 무너뜨리고 마는 것이다.
어둠은 그저 어둠이 아니고 빛을 위해 숨기고 있는 그림자로 생각해 본다.
밤은 새벽의 빛을 품고 있는 그림자일 뿐, 이는 달이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태양빛에 반사되어 보이는 것과도 일맥 한다. 아침의 광명으로 햇빛에 반사되어 타오르는 우리들의 모습이 선명해진다.
2024년도 여름도 중순이 넘어선다. 8월이 지나면 가을빛 한가위가 다가온다.
장마철이 지나면서 빛이 변하는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된다.
여름철 찬란한 빛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잠시 빛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아침에 6시 반 출근하면서 하늘을 바라본다. 태양이 어디쯤 있는지 찾아본다. 그쪽을 향하여 잠이 덜 깬 두 눈에 빛을 담는다. 그 빛에 두 눈은 반짝이면서 잠이 달아난다. 세상이 다시 밝게 보인다. 머리도 맑아지면서 뇌는 새로운 오늘을 받아들이는 부팅이 시작된다. 새벽 글쓰기는 방 안에서 인공의 빛에 쌓여 한 일들이다. 침착하고 반듯한 문장들이 바로 선듯하나 내밀하고 내성적이다.
바깥으로 나와서 대자연의 중심인 태양별의 빛을 목격하고 그 빛에 쌓여 하루의 일과가 시작되어야 한다. 온몸의 세포들이 꿈틀거리면서 용솟음친다. 빛의 에너지는 그만큼 인체와 정신을 깨어나게 한다. 이때 써내려간 태양의 글들은 온통 눈부시다.
2024년 여름의 태양도 새로운 한주의 시작도 우리를 깨어나게 한다. 사람들이 우주의 순환, 지구의 순환을 관찰하여 얻어낸 주기를 나눈 한 해의 첫 날 첫 달 첫 주가 시작된다. 그 태양이 특별할 수밖에 없다. 한 해의 시작이 맑고 투명하게 새로운 기운을 온 세상에 공평하게 나누어준다. 문제는 그 공평한 빛을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촉수가 되어야 하는 점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무료한 한 해의 시작일 수도 있지만, 우리 모두 특별하게 시작하자!
우리는 여름이 지나기 전 여름의 카운트다운을 하고 어둠 속에서 기도를 하였던 그 순간의 설렘을 기억해야 한다. 그 순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아낌없이 기도하였던 순간, 우리 모두 새롭게 부활한 것이다. 이기적이고 나쁜 마음을 정화시켰고 이타적인 마음으로 세상을 위해 기도하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의 다빈치 노트에서 빛과 그림자, 빛과 어둠에 대한 질감, 명암에 대하여 많은 글을 남겼다. 그가 화가로서 과학자로서 관찰한 그의 통찰에서 감명을 받게 된다. 그의 업적은 후대 위대한 화가, 램브란트를 탄생하기에 이른다.
빛과 그림자에 대한 탐구로 거대한 영향을 끼친 빛의 화가, 램브란트(1606~1669, 바로크 시대 네델란드 화가)의 업적은 멈추지 않았다. 이후 수많은 제자들이 그를 공경하고 따르는 작품들을 발전시켰다. 그가 빛에 대한 혁신적인 접근을 탐미하고 완성하려는 노력은 빛의 조명 아래 주인공의 빛나는 순간을 위해서 그림자와 어둠을 이해하고 반영시켜야 했다. 그의 화풍을 따르는 작품들은 빛이 모이는 질감을 위해서 주변 대부분의 배경은 어두운 질감으로 채웠던 것이다.
램브란트 제자의 작품
램브란트 제자의 작품
니체와 융에 이르러서 그림자에 대한 무의식적인 해석을 심리학적으로 풀어내었다. 의식과 무의식을 빛과 그림자와 대비해 본다. 의식적으로 빛을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무의식적인 그림자 속에서도 빛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무의적인 것이 긍정적인 에너지로 가득 차오른다면 의식적인 현실의 삶에도 긍정의 성취감으로 가득할 것이다. 그림자가 어둠이 아니다. 그림자는 빛을 위해 생겨난 것이고 빛의 곁에 생긴 존재의 무의식이다.
동기부여는 빛에서만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어둠을 감싸고 있는 그림자에서도 빛의 에너지를 발견하고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새해에 다시 태어나는 것은 그간 빛을 생성하기 위해 노력한 그림자 속 노력이기도 하고, 동시에 새롭게 다시 부활하기 위한 소중한 기회다. 그 기회를 저버리지 말고 세상을 향해 빛을 쏘아낼 수 있는 우리가 되자! 그림자조차 사랑할 수 있는 빛이 되자! 새벽의 그 빛이 쏟아지기에 기다리면서 우리는 또 다시 어둠속에서도 기꺼이 책을 읽을 수 있다. 어둠 속에서도 빛이 스며들면서 책을 읽고 있는 이 장면이 감동이다.
램브란트의 제자 작품, 고상한 방의 식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남자
하루를 사작하는 종이 울리는 해돋이의 그 흥분과 설램 가득한 여운이 빛이 되어 일하러 가는 우리들에게 동기부여가 된다. 우리는 빛을 향해 살아가는 것이다. 어둠마저 품으면서 새벽을 깨어나게 하는 우리들이다. 빛이 가득한 세상에 살 수 있는 것에 감사한다. 이 어두운 밤을 깊이 잠을 잘 수 있는 것도, 빛으로 깨어날 수 있는 빛의 아침을 살아갈 수 있도 행복하다. 빛이 있기에 어둠마저 사랑하리라! 새로운 한주 어둠을 뚫고 출근하는 길에서 빛을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