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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24, 우리가 몰랐던 데일카네기 일대기

세계최고 동기부여 인간관계 베스트셀러작가 데일카네기의 삶


<일하고 노력하고 버텨라! >


올해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시고 버티셨나요?


혹시 열심히 일하셨지만 버티시지 못하셨나요? 꾸준함이 모자르지 않으셨나요?


그렇다면 데일 카네기를 다시 읽어보세요!




모든 성장에는 활동이 필요하다. 노력 없이는 육체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성장하지 못하며, 노력이란 곧 일을 의미한다.


일은 저주가 아니라 지성의 특권이며, 인간다움의 유일한 수단이자 문명의 척도이다.


내가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중요한 무언가를 이루고자 할 때는 사람들의 말에 너무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불가능하다고 단언한다. 하지만 나는 바로 그때야말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최적의 타이밍이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서 인내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재능? 재능이 있으면서도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천재성? 속담도 말하지 않는가, 대부분의 천재는 보상을 받지 못한다고. 교육으로도 안 된다. 이 세상은 교육받은 부랑자들로 넘쳐난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성공할 수 있는 힘은 오직 인내와 결단력뿐이다. 지금까지 ‘버텨라’라는 슬로건은 인류의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해 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인용문 <데일 카네기 비밀의 문장>




데일 카네기의 책들은 아직도 세계 최고의 현실 동기부여의 조언들이 주옥같은 문장으로 이루어졌다.


<핵심 문장과 나의 해석>


1. '모든 성장에는 활동이 필요하다!'




이 한마디에 숨이 멎는 것 같다. 성장하려는 모든 생명체들은 노력하지 않고 성장할 수 없다.


그 노력하는 것이 곧 활동이고 그 활동을 위해서 우리는 에너지를 쏟는다.




나 또한 성장하기 위해서 지난 3년간 부단히 노력했지만, 그 활동은 정말 피땀어린 노력의 연속이 아니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다. 물론 더 큰 성장을 이룬 많은 존경하는 분들은 또 얼마나 큰 노력을 하였을까!




2. 일은 저주가 아니라 지성의 특권이며, 인간다움의 유일한 수단이자 문명의 척도




일을 하는 것은 지성의 특권이다. 이 세상 모든 지성인들이 열심히 일을 하는 것이 인간다운 것이고


그 일은 문명의 척도이고 수단이라는 이 글도 기막히다.


일을 하지 않으면 우리의 지성의 특권을 포기하는 것이다. 또한 문명이 세워지지도 않게 되는 것이다.




3. 다른 사람의 말에 너무 많이 귀 기울이지 말라는 조언도 중요한 일을 할 때 정말 필요한 핵심이다.




어차피 결정 내린 후에 목표를 향해 달리는 것은 나의 몫이다.


그것을 다른 사람의 말에 휘둘려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시간을 소모하는 것은 일을 그르친다.


물론 결정 전에는 신중을 기울여야 한다. 무겁게 내린 결정에 나의 온 정신을 쏟고 몰두해야 한다.




4. 이 세상에서 인내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교육받은 부랑자들로 넘쳐난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성공할 수 있는 힘은 오직 인내와 결단력뿐이다.




정말 꾸준함을 이길 힘은 없다. 토끼와 거북이의 스토리도 잘 알려져 있지 않는가!


버텨라! 이것이 마법의 힘이다.


나의 경우 Keep going이라는 주문을 외운다.


이 상태로 계속 버티고 가야 한다는 말이다.


인내와 결단력으로 무장할 때, 눈덩이가 불어나고 크기가 커지듯 우리의 성과로 눈에 보일 만큼 커진다.










세계 최고의 현실 동기부여 강연가 저술가인 데일 카네기를 다시 읽는다.


젊었을 때 읽어보고 신중년의 연말연시에 다시 책을 꺼내들었다.


연말연시에 에너지 동력을 얻기 위해서이다.




그만큼 유명한 동기부여 강연가 저술가가 있었는가!


물론 있었다 해도 데일 카네기는 고전의 반열에서 가장 신뢰할 만한 위인이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허튼 소리로 어지럽히지 않는다.




연말연시 현실적인 동기부여 조언이 필요하신 분들,


<데일 카네기>의 책들을 집어보십시오!








데일 카네기(Dale Breckenridge Carnegie, 1888년 11월 24일 ~ 1955년 11월 1일)는 미국의 작가, 강사이다. 미주리주 매리빌의 농장 출생이며 미주리주 워렌스버그에 위치한 University of Central Missouri(당시 Central Missouri State University)를 졸업한 뒤 네브래스카에서 교사, 세일즈맨 등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였다. 1912년 YMCA에서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대화 및 연설 기술을 강연하면서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데일 카네기 코스'라는 정식 명칭을 가진 강좌가 되었고, 교육은 참가자의 실천 사례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특징을 보이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에 따라 데일 카네기는 Dale Carnegie Training을 설립하였고 현재는 전 세계 90개국에 데일 카네기 프랜차이즈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다.






데일 카네기는 세상에는 많은 능력이 존재하지만 '사람을 사귀고 친구로 만드는 능력'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능력이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철학을 바탕으로 교육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그 교육에서의 실천사례와 내용을 종합하여 《데일 카네기 인간관계론(How To Win Friends and Influence People)》을 저술하였다. 현재 이 책은 전 세계적인 스테디셀러로 여전히 많이 판매되고 있다.






공식적인 대표 저서로는 《 How To Win Friends and Influence People 인간관계론》, 《 How To Stop Worrying and Start Living 행복론》, 《 The Quick and Easy Way to Effective Speaking 스피치&커뮤니케이션》이 있다. 국내에는 이에 대한 다양한 번역본인 《데일 카네기의 1% 성공습관》, 《데일 카네기 나의 멘토 링컨》, 《화술 123의 법칙》 등이 출간되었다.
















데일 카네기 코스는 데일 카네기 생전 시절부터 현재까지 90개국에서 진행 중인 명망 있는 교육 코스이다. 사람의 이름을 딴 민간 교육코스로는 유일하다. 최초에는 13주에 걸쳐, 현재는 8주~12주에 걸쳐서 참가자들의 관계/소통/리더십/스트레스 관리 등에 대한 실천적인 사례 중심의 독특한 교육 코스로 유명하며, 미국의 전설적인 투자자 워런 버핏도 교육을 수료하였고 자신의 저서《 Snowball 》에도 수차례 언급하였다.


Dale Carnegie & Associates는 데일 카네기 사후 세워진 공식 법인으로, 미국 뉴욕에 본사를 두고 있다. 전 세계 90개국에 프랜차이즈 계약을 통해 교육 설루션을 유통하고 있고 한국에는 1992년 데일 카네기 코리아가 설립되어 현재에도 데일 카네기 코스와 같은 B2C, 맞춤형 기업교육인 B2B 비즈니스를 수행 중에 있다.


데일 카네기 트레이너는 ISO9001인증에 의해 엄격하게 선발/훈련/관리되는 강사로서 데일 카네기의 철학과 DNA를 계승하고 있다. 전 세계 3000명이 활동 중이고 국내에도 50여 명의 Active Trainer가 존재한다. 그중 Carnegie Master라는 최고 등급 강사는 전 세계 40여 명에 불과하고 한국에도 한 명이 있다. 데일 카네기 코스를 수료하고 카네기의 철학과 스피릿, 인간의 성장을 돕고자 하는 누구라도 데일 카네기 트레이너 자격에 도전할 수 있다.




<위키 피아 사전 인용>











<우리가 몰랐던 데일 카네기의 일대기,


실패를 딛고 재능을 펼친 용기있는 웅변가, 작가>




데일 카네기는 자기계발 분야의 선구자가 된 베스트셀러 작가였습니다.


1888년 11월 24일 미주리주 메리빌에서 태어난 그는 도시 외곽에 있는 가족의 농장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연설회를 즐겼고 고등학교 토론팀에 참여했습니다. 카네기가 16살이었을 때, 그의 가족은 미주리주 워렌스버그 외곽의 농장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데일 카네기는 나중에 그 유명한 기업가의 철자와 일치하도록 철자를 바꾸게 되었는데, 재정적 실패로 계속 굴욕을 당한 아버지와 아마추어지만 카리스마 넘치는 평신도 설교자였던 어머니에 의해 길러졌습니다.




젊은 카네기는 "농촌의 성공에 필요한 육체적 노동에 대한 명백한 혐오감을 갖게 되었다"며 "큰 도시에 살고 일주일에 7일 동안 화이트 칼라를 착용할 것"이라고 다짐했습니다.






미주리주 워렌스버그에 있는 주립학교의 대부분 학생들이 캠퍼스에서 살기 위해 약간의 주거비를 지불한 반면, 카네기는 근처에 있는 부모님 농장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는 매일 말을 타고 마을로 가서 수업을 하는 동안 그것을 탔습니다. 그는 말똥 냄새가 났습니다. 그의 옷은 겹쳐서 재봉 패치가 되어 있어서 잘 맞지 않았습니다. 그 말똥 냄새에 코와 귀가 튀어나왔다고 합니다. 그가 팻시라는 이름의 소녀에게 마차를 타러 가자고 했을 때, 그녀는 그를 거절했습니다.






캠퍼스의 거물들은 모두 웅변가들이었고, 세기의 전환점은 문학협회였기 때문에 카네기는 재빨리 그 모임에 가입했습니다. 2학년 때 그는 캠퍼스 전체의 마스터 토론자였습니다. 카네기는 "보다 자연스럽고 대화가 많은 전달력"으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감정, 특히 열정의 요소들로 그의 발표에 박차를 가했습니다."라고 와츠는 말합니다.






그는 3학년을 중퇴하고 덴버로 가는 기차를 탔고, 그곳에서 서부 네브래스카에서 통신판매코스를 통해 파는 영업 직업을 발견했습니다. 카네기는 "저는 성공하기를 애처롭게 열망했습니다."라고 썼습니다. 그는 금광 계획으로 돈을 잃었고 "거의" 통신판매코스에서 만회하고 잘 팔았습니다. 판매는 그의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제품의 결함이 문제라고 그는 판단했습니다. 그럴 경우 그는 다른 상품으로 바꿨습니다. 그는 회사에서 떠오르는 스타였고 마침내 은행 계좌를 개설할 만큼 벌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통조림 고기의 세계에서 약간의 성공을 보고 있을 때, 카네기는 지루해 했고 더 큰 목표들을 위해 떠나야 한다고 결정했습니다.




그는 미주리 주립 학교(현재의 센트럴 미주리 대학교)에 입학했으나 졸업하지 못하였습니다. 야심찬 학생이었던 카네기는 운동적으로 재능이 없었지만, "최소한 일어서서 보통의 연설자보다 조금 더 활기차고 열정적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학교 토론팀에 합류했지만 처음에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던 카네기는 초라하고 몸에 맞지 않는 옷 때문에 동료 학생들로부터 외면당했습니다. 그는 큰 키에 아주 마른 체격이었습니다.






워렌스부르크에서 차우타우쿠아 강연자가 강연하는 것을 본 후, 카네기는 그 남자의 연설 스타일과 매너를 크게 성공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카네기는 인기 있는 학생이 되었고 그의 동료 학생들에게 대중 연설 수업을 했습니다. 하지만 라틴어에 실패했을 때, 카네기는 학사학위를 마치지 못한 채 1908년 대학을 떠났습니다.






그는 부모님께 뉴욕이 "내 삶의 과정"을 바꾸기 위해 캠프를 떠나는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그는 배우가 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American Academy of Dramatic Arts(드라마 아트 미국 학원) 에서 6개월 후, 카네기는 Polly of the Circus 라는 순회 연극에서 작은 역할을 맡았습니다. 투어에 참가한 그의 룸메이트는 나중에 "나는 그가 어떤 대화의 재능이 있다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대화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연설을 했습니다."




이 극단이 투어를 중단하고 다른 연기 직업이 나오지 않자 카네기는 뉴욕에서 중고차 판매원으로 잠시 경력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허풍을 의지했습니다. 그는 "무엇이 자동차 트럭을 운행하게 만들었는지 몰랐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여러 번 해고당했습니다.






카네기는 도시 전역의 중고차 주차장에서 그의 웅변 기술의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컬럼비아 대학교와 뉴욕 대학교의 교수직에 지원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125번가에 있는 그 도시에서 가장 작은 YMCA에게 그가 연설할 수 있도록 설득했습니다. 그는 재빨리 그의 학생들이 "웅변가가 되고 싶어하지 않고, 직업적 발전을 추구한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의 참여에 의존하는 방법을 개발하여 학생들이 열정을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하였습니다.






1914년까지, YMCA 순회는 그를 제대로 대우하였습니다. 그는 카네기 홀에 있는 작은 사무실을 임대할 만큼의 수입을 올리고 있었고, 그는 그의 진로에 대한 주제를 지지하는 잡지 기사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엄청난 역경을 이겨낸 위인들과 운명을 뒤바꾼 패배자들에 대한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프로필들 말입니다. 그는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그들의 직업을 싫어한다는 것을 인식했고, 그들이 더 큰 일을 할 운명이라고 느꼈습니다. 이 무렵에 그는 부모님께 편지를 썼다, "이제 돈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힘든 일 때문이 아닙니다."






언제나 사실을 전부 말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펼쳤습니다. 그의 책, 1915년 방법을 알려주는 The Art of Public Speaking (대중연설의 기술)은 독자들에게 그들이 그것을 만들 때까지 가짜로 만들라고 가르쳤습니다. 뉴욕의 카네기 홀에서 매진된 군중에게 연설을 한 후, 그는 카네기 홀을 짓기 위해 기금을 기부한 유명한 사업가이자 자선가인 앤드류 카네기의 이름을 따서 자신의 이름의 철자를 "카네기"로 바꿨습니다.




자신감과 내면의 힘을 보여주되 너무 자만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하라. 그는 성격은 화자의 가장 중요한 자산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우리의 모습을 요약하고, 우리를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만드는, 무한하고, 상상할 수 없는 것."






그 책은 적당히 성공적이었지만, 카네기의 상승 궤도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중단되었습니다. 그는 징집되었지만, 미주리주에서 농장 사고로 손가락 하나를 잃은 후 롱아일랜드에 있는 사무실에서 격리되었습니다. 그가 1919년 제대한 후 다시 일을 시작하려고 했을 때, 그는 요나 레러(Jonah Lehrer)에 걸맞은 논쟁의 한 가운데에 있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그의 기분 좋은 잡지 기사 중 하나는 대중 연설 과정에 등록하고 재산을 돌려놓은 비운의 남자에 대한 실화로 광고되었고, 언론이 아닌 소설 작품으로 불렸습니다. 카네기가 나중에 인정한 혐의는 충분히 근거가 있었습니다.






1920년대 초 작가이자 비평가인 로웰 토마스(Lowell Thomas)의 요청에 따라 유럽을 순회한 연설 후, 카네기는 새로운 사명감을 가지고 미국 성공을 위한 도시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빠르게 그의 주요 청중이 되어가는 사업가들을 위한 연설을 안내하는 또 다른 방법을 개발했습니다. 그는 또한 공적 인물들의 뒷이야기에 관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점수를 매겼습니다. 미국이 "구시대 기업가 정신에서 복잡한 기업 관료 체제로의 전면적인 전환"을 겪고 있을 때 카네기는 새로운 성공 모델을 찾는 데 능숙했다고 왓츠는 설명합니다.이것은 대공황과 함께 1936년에 출판된 카네기의 가장 큰 업적인 <친구를 얻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방법>에 대한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대중 연설에 대한 명확한 언급은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사람들이 어떻게 주로 자기 이익에 관심을 갖는지에 대한 심리학적 영향을 받은 주제들이 있었고, 그 관심에 변함없는 열정으로 임함으로써 성공은 당연했습니다.






카네기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으로 사람들을 판단하는 대신, 우리는 그들의 갈망을 이해하고 그들의 음식을 먹여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사고방식은 타코 벨의 도리토스 로코스 타코와 같은 현대 자본주의의 공포를 설명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대중 소비 경제의 출현과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20세기 초, "인격 발달, 개인적 행복, 대인관계, 자기 성취에 몰두한 새로운 기풍이 나타났다"고 왓츠는 쓰고, 그것을 "정서적인 행복보다 종교적인 구원이나 명백한 경제적 이익에 덜 관심을 갖는 개인주의의 한 형태"라고 묘사합니다.






카네기의 정신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감성은 자유지상주의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사실 카네기는 자신의 세계관에서 더 큰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이봐, 난 그냥 나에 충실하게 하고 있어" 실리콘 밸리의 형제처럼 확실히 정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너무 인기가 많아서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백악관에서 FDR과 엘리너와 함께 저녁식사 초대장을 받았습니다.






때때로 반발이 왔을 때 그는 놀랐지만 의연하게 대처하였습니다. 싱클레어 루이스와 같은 비평가들은 카네기가 불성실한 식자주의, 교묘한 감정적 우위, 그리고 경제적 음치의 난청이라고 비난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항상 알아내려고 노력한다면, 이론은 어떻게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노동자 계급의 미국인들이 어떻게 기꺼이 정상에 오를 수 있을까요? 카네기는 방어적으로 대답했습니다. "저는 많은 속임수를 옹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세상을 바꾸는 그의 생각들을 설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카네기는 미국 육군에서 복무했습니다.그는 군 제대 후에도 연설을 계속했습니다. 런던에서 강의 투어를 하는 동안, 카네기는 하이드 파크에 있는 도시의 유명한 연설가 코너를 방문했고, 그곳에서 활기찬 웅변가들은 그들의 의견을 말하고 다양한 주제에 대해 말합니다. 카네기는 가장 열광적인 연사들이 가장 많은 청중들을 끌어들이는 것을 관찰한 후, 열정을 그의 직업 철학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만들었고 그것을 그의 인기 있는 "데일 카네기 과정"에 포함시켰습니다. 제너럴 모터스(General Motors)와 IBM을 포함한 수 많은 기업들이 직원들을 카네기 과정을 수강하도록 보내 보다 자신감 있고 성공적인 개인이 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유럽에 있는 동안, 카네기는 1921년 롤리타 바우케어를 만나 결혼했습니다. 아이가 없는 결혼은 불행한 결혼이었고 그 부부는 1931년에 이혼했습니다.






대공황의 한가운데서 카네기는 어떻게 친구를 얻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출판했습니다.그것은 즉각적인 성공이었고 10년 동안 베스트셀러 목록에 머물렀습니다.이 책의 인기는 카네기를 국제적으로 유명한 작가이자 재정적인 성공으로 만들었습니다.






책의 메시지는 간단했습니다:


배려심이 있으라, 다른 사람들에게 진실한 관심을 보여라, 남의 말에 귀를 기울여라, 다른 관점을 고려하라,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라, 긍정적이 되고,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지 말라.카네기는 유명하고 성공한 사람들의 예를 들어 그의 요점을 설명했습니다.그의 성공에 이어, 카네기는 1948년에 처음 출간된 추가적인 베스트셀러, <걱정을 멈추고 삶을 시작하는 방법>을 썼습니다.






1944년 11월 5일 카네기는 그의 전 비서였던 도로시 밴더풀과 결혼했습니다.1951년 이 부부의 외동아들인 도나 데일 카네기가 태어났습니다.




그의 업적에 비추어, 카네기는 그의 모교와 미주리 주의 영예를 당당하게 안았습니다. 1955년 센트럴 미주리 주립 대학(현재 센트럴 미주리 대학)은 카네기에게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했습니다. 2006년, 데일 카네기의 흉상이 제퍼슨 시티의 미주리 주 의사당에 있는 유명한 미주리 주 의사당에 설치되었습니다.


데일 카네기는 1955년 11월 1일 뉴욕 포레스트 힐스에서 호지킨병과 신부전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는 미주리주 벨턴에 있는 벨턴 묘지에 묻혔습니다.




Ann Friedman / Kimberly Harper 등의 칼럼, 데일 카네기 일대기에서 인용되었습니다.



< 2023년 연말에 적은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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