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헤세, 대문호 예술가 철학가
내가 처음 헤르만 헤세를 만난 것은 십 대 중반이었다. 그때 몹시 방황하였고 불안하였다. 사는 것이 힘겨웠고 사춘기 시절 겪어야 하는 것 이상의 악몽 같은 시간들을 남몰래 갖고 있었다. 그때 나에게 한밤의 별빛 같은 소설 <데미안>을 만났고, <수레바퀴 밑에서>를 만났다. 그 등대 빛이 나의 방황하는 바다에 어디로 가야 할지 안내가가 되었다. 모든 젊은 청소년들 청년들이 구도자가 되어 삶을 제대로 꿈꾸어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헤르만 헤세는 사상가이자 시인, 소설가였다. 두 부류의 대문호로 그의 작품들을 나누고 싶다.
첫 번째, 젊은이들을 위한 성장소설의 최고봉이 그의 작품들이다.
<페터 카멘친트>,그의 첫 번째 소설에서 그는 그의 소년 시절과 학창 시절의 자전적 성장을 그렸다.
그가 마흔두 살이 되었을 때, <데미안>을 그의 실명이 아닌 싱클레어라는 다른 이름으로 출간하였을 때, 그의 성장 소설을 절정에 이르렀고, 이는 그의 사상이 고스란히 담기게 됩니다.
그에게 인류의 정신문명을 파멸시킬 트렌드란 전쟁과 평화의 시대의 흐름이었고 그는 나치에 대하여 혹독한 비평가였다. 그는 투쟁가였고 탈권위주의의 냉철한 글을 투고하였다. 하지만, 그는 조국 독일의 광기 어린 전체 주의자들과 그의 숭배자들에게 배척당한다.
헤르만 헤세는 1차, 2차 세계대전의 전쟁 발발 당사국이자 침략국인 독일에서 철저하게 추방되어 편집되었다. 그의 작품의 출간도 그의 조국에 대한 호소의 글도 모두 차단되어 조국 독일은 그를 혹독하게 비판하고 은둔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해서 청년들을 깨어나게 하는 <데미안>, <나르치스 골드문트>의 작품을 스위스에서 출간하였다. 그의 40대 작품들이었다. 그는 평생 청년들의 성장 - 아니 어른들마저 영혼을 성장시키려는 작품들을 완성하였다. 이는 작품들 통해서 인류에게 깨달음의 종을 울리려고 하는 그의 애틋한 사랑이었다.
두 번째, 철학과 사상을 담은 소설가였다.
<싯다르타>와 <유리알 유희>의 두 작품은 그냥 쉽게 술술 읽어버리는 소설이 아니다.
헤르만 헤세는 1차, 2차 세계대전을 통해서 조국 독일이 그를 검열하고 그의 작품을 폐간시키고 혹독하게 비판하여도 꿋꿋하게 그의 신념을 지켜갔다. 세계시민으로서 세계인을 독자로 인류 정신문명을 이야기하였다. 그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것은 그가 그러한 인류의 정신문명을 위한 작품을 세상에 남겨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철학가다. 쇼펜하우어를 이해하고, 니체를 공경했으며, 불교철학을 이해하는 사상가, 철학가다. 하지만 그는 갇혀있지 않았고, 그들을 문학과 예술에 녹였다. 어떠한 동서고금의 철학에도 편협하게 매달리지 않았다.
그의 작품 중에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와 <싯다르타>는 그가 크리스도교와 불교의 철학을 모두 끌어안고 독자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그는 유명한 목사 가문이고 인도에서 활동한 선교사 집안이다. 그에게 신학교를 입학하는 것은 가문의 숙명이었지만, 그는 그곳의 권위적인 것에 탈출하였고 그만의 종교 세계관을 그의 작품에 투영하였다. 그 종교관은 크리스도교와 불교 철학의 모든 것을 담아낸 동서양 종교의 미덕을 깨닫게 해준 것이다.
세번째 그는 예술가이지 시인이었다.
그는 시인이다. 그의 문장들은 시어들이다. 하지만 그의 시는 철학적 메시지, 삶의 성장, 자시 내면의 깨달음을 위한 시들이 많다. 물론 자연에 대한 시를 읊은 모든 시인의 시구들은 모두 그렇지만.. 헤르만 헤세의 시들은 어쩐지 더 자신의 깨달음을 위한 여정을 닮았다.
헤르만 헤세는 14세에 시인이 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였다. 사춘기 시절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 그 시절, 시인의 길을 걷기도 선언한 것이다. 그의 선언은 그의 일생을 문인으로 살게 하였다. 그의 선언은 그의 문장들이 시어들처럼 아름답고 감수성이 풍만하게 만들었다. 그는 소설들을 시처럼 쓰는 가장 아름다운 문장을 시처럼 창작하는 작가 중에 한 사람이 되었다.
헤르만 헤세 그는 화가이다. 또한 음악을 사랑했다. 그는 진정한 예술가였다.
"우리의 할아버지들은 베토벤 모차르트 바흐까지 즐겼다. 하지만, 우리는 쇼팽, 리스트의 음악으로 베토벤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대가 되었다...." 그는 고전을 사랑하였지만 현대의 트렌드 또한 이해하려고 하였다.
헤세의 그림들의 특징은 어쩌면 자신을 치유하고자 하는 것이 담겨 있다. 그는 1,2차 세계대전의 침략국인 독일을 비평하였다. 그로 인하여 독일은 헤세를 가혹하게 내쳤다. 자신의 조국으로부터 추방되면서 얻게 되는 상처들과 여러 가지 비난들을 그림을 통해서 스스로 치유받게 된 것이다. ‘상처받은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는 말처럼 그의 그림들을 보면 힐링이 되고, 치유가 된다.
스스로 위로 한자, ‘상처받은 치유자’ 헤르만 헤세
조국에서 버림받은 헤세는 살아생전 조국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욕했고, 작가로서 굉장히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게 된다. 평화와 반전주의자였기에 히틀러와 나치로부터 탄압을 받게 되고, 그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하지만, 헤세는 절대 그의 신념을 꺾지 않았다. 오히려 “이 손가락질조차 나는 행복하다."라고 했다. 그림이 없었다면 시인 헤세가 없었다고 평가될 정도이다. 왜냐하면 그의 삶이 그림을 그림으로써 치유가 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헤세는 40살쯤 되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게 된다. 이유는 <데미안>을 쓰기 이전의 시기에 받았던 고통들을 치유하기 위해서였다. 구스타프 칼 융이 그림 그리기를 권유했고, “상처받은 자만이 오로지 진실 되게 남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면서 그를 ‘상처받은 치유자’라고 명명하게 된다. 헤세는 그림을 그리면서 스스로를 치유하였고, 그림들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작은 감동을 주고 있다.
헤르만 헤세의 그림들이 우리들에게 주는 것은 어려운 해석이나 풍자도 아니고, 은유적인 초현실주의도 아니다. 그저 그가 치유를 받은 것처럼 우리 감상자들에게도 영혼을 치료받을 수 있는 위로가 된다. 그의 작품들이 모두 그렇다. 현학적인 철학가의 이해하기 어려운 사상도 형이상학적인 보이지 않아 잡히지 않는 선문선답도 아니다. 그의 작품들은 우리의 영혼을 치유하고 나 자신을 찾아가게 하는 길을 뚜렷하게 제시해 주는 내비게이션 GPS 같다. 헤르만 헤세의 그 GPS에서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에 다다르기 위해서 얼마나 남았는지 삶의 단계들을 보여준다.
50대 중반에 다시 만나는 헤르만 헤세는 여전히 나의 스승이고, 남은 내 인생의 나침반이 되어준다.
그처럼 정원을 가꾸면서 살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삶의 치열한 현장에 놓인 환경에서 60대를 꿈꾼다.
그에게 독자로서 다가서는 것은 편안할지 모른다. 죽는 날까지 지켜간 그의 고매한 정신과 투철한 의지는 우리들 모두가 닮고 싶지만 피땀어린 노력이 필요하다. 그는 대문호의 필치로 예술과 문학에 이해하기 쉬운 내비게이션 같은 삶의 철학을 담았다.
그는 은둔자였지만 인류를 위한 여정, 인류를 위한 염려를 그의 글과 그림에 담았다.
그는 중년 이후 그림을 그렸고 그를 치유하였다. 헤세의 그림들이 후반기의 헤세의 글을 더욱 유려하고 예술적으로 만들었을까! 그에게 배운 제자로서 나는 피아노를 연주하는 인생 후반기를 준비할 것이다. 피아노와 글쓰기,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인생 후반기의 모습을 가슴 벅차게 그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