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그리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20세기 문학의 구도자〉로 불리는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1883년 크레타 이라클리온에서 태어났다. 터키의 지배하에서 기독교인 박해 사건과 독립 전쟁을 겪으며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이런 경험으로부터 동서양 사이에 위치한 그리스의 역사적 사상적 특이성을 체감하고 이를 자유를 찾으려는 투쟁과 연결시켰다. 1907년 파리로 건너간 그는 베르그송과 니체를 접하면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투쟁적 인간상〉을 부르짖게 되었다.
21살 1904년의 니코스카잔차키스
자유에 대한 갈망 외에도 카잔차키스의 삶과 작품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여행이었는데, 1907년부터 유럽과 아시아 지역을 두루 다녔고, 이때 쓴 글을 신문과 잡지에 연재했다가 후에 여행기로 출간했다. 1917년 펠로폰네소스에서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이자 실존 인물인 조르바와 함께 탄광 사업을 했고, 1919년 베니젤로스 총리를 도와 공공복지부 장관으로 일하기도 했다. 1922년 베를린에서 조국 그리스가 터키와의 전쟁에서 참패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 카잔차키스는 민족주의를 버리고 공산주의적인 행동주의와 불교적인 체념을 조화시키려 시도했다. 이는 『붓다』와 대서사시 『오디세이아』로 구체화되었다. 이후에도 특파원 자격으로 이탈리아, 이집트, 시나이, 카프카스 등지를 여행하며 다수의 소설과 희곡, 여행기, 논문, 번역 작품들을 남겼다. 대표작의 하나인 『최후의 유혹』은 신성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교회로부터 맹렬히 비난받고 1954년 금서가 되기도 했다. 카잔차키스는 1957년 중국 정부의 초청으로 중국을 다녀온 뒤 얼마 안 되어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1947년부터 아홉 차례나 노벨 문학상 후보로 지명되었고,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에 비견될 만큼 위대한 작가로 추앙받고 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책에서 소개된 글 인용>
- <알렉산드로스 대왕>,<최후의 유혹>, <그리스의 조르바> 이렇게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세 작품의 책을 읽어보았다. 그리스인 니코스 카잔차키스다운 그의 작품들에서 위대한 그리스인 작가의 생각, 삶, 철학과 문학을 만난다.
그중에서도 <최후의 유혹>은 예수 그리스도와 주변 인물들에 대하여 문학적으로 종교를 뛰어넘는 작가의 해석과 통찰을 담아낸 소설로서 가히 충격적이다. 그 당시 금서로 지정된 것이 이해할 만하다. 종교의 원리주의로서 이해하는 사람들은 문학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가 감히 <최후의 유혹>과 같은 인간 예수님에 대한 스토리를 적을 수 있을까? 성인, 신에 대한 어쩌면 위험한 접근이고, 너무도 인간적인 접근이며, 주변 인물들 - 제자들에 대한 사실적 묘사들에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이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받아들이게 되는 소설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을 더 진실하게 이해하게 된다. 예수님이 인간으로서의 유혹과 사탄의 유혹을 싸워서 이겨내는 감동적인 스토리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역시 종교를 넘어서는 대작가이다. 한때 그는 주교가 될 예언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실제로 조국 순례를 통해서 수도원, 수도사들과 만나고 생활하였으며, 특히 20대 초까지 여성들과의 관계에 대하여 그리스도적인 육체적 순결을 지켜주어야 했던 종교적인 인간이었다. 그런데 그가 어른이 되면서 삶을 살아내면서 종교를 끌어안는 철학을 가진 위대한 대문호로 성장하는 것을 알려주는 그의 작품이 인류의 고전, 유산이 된 것이다. 교황청에서도 금서로 지정한 <최후의 유혹>을 꼭 독서해 보기를 추천한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는 화자 - 작가인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붓다>를 그리려고 글을 쓰는 장면들이 여러 번 나온다. 그에게 붓다도 예수님도 인류 모두를 위한 스토리의 주인공이자 그의 삶이 구원을 받고자 하는 해방, 자유를 위한 복음의 주인공이었다. 그 시대, 쇼펜하우어, 니체, 헤르만 헤세 등 불교에 심취하고 공부하려고 하였던 사상가들이 서양 철학과 문학계를 그리스도교의 한계를 넘어선 극복의 초인으로 접근하였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붓다, 예수는 니체의 초인과도 유사한 지점들이 있었다. 이러한 사유를 조르바는 책벌레, 먹물이라고 조롱하고 비판하였다. 정신적인 것이 육체적인 것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이 조르바의 사상이요, 또한 육체적인 자유가 정신적인 해방도 찾을 수 있다는 삶의 설교인 것이다. 불교의 무상, 무아의 경지에 이르는 것은 결국 오온의 직관적 깨달음을 통한 수행의 결과가 아닌가!
역시 <그리스인 조르바>가 대문호,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모습, 아니 그의 구원자로서 가장 근접한 인물이 아닐까! 물론 실존 인물 조르바를 소설의 캐릭터로 데려왔다. 또한 어떤 면에서 소설의 화자와 조르바가 같은 한 인물이라고 해야 하겠다. 작가와 화자, 조르바가 한데 어울린 인물, 그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라는 사람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그 유명한 묘비명에서..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 이는 어떠한 것도 욕망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 이는 죽음조차도 또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겠다는 그의 의지이다. 두려워하지 않기에 미래에 불안하지도 않고 과거에 얽매이지도 않으면 현재를 살아왔다는 것이다.
"나는 자유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계속해서 그의 작품에 자유를 등장시킨다.
그의 자유는 종교로부터 자유로운 인간 정신부터, 심지어 삶을 구속하는 물질적 가치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이다.
그가 실존주의의 철학과 맞닿아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인간은 이 세상에 던져졌다.', '이 세상에 던져진 투척된 인간은 자유의지로 살아야 한다." 이러한 명제들로 현대 철학, 19세기 말에서 비롯된 니체의 철학부터 알베르 카뮈, 사르트르까지 전개한 그 철학은 유신론이건 아니건 이 세상에 우리 의지가 아닌 것으로 던져진 존재이지만, 투척된 후에는 우리의 자유의지로 살아야 한다는 철학을 강조한다.
생의 철학가, 베르그송의 어록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고백으로 그의 제1의 스승은 이렇게 말했다.
"행동하는 사람으로서 생각하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행동하라!"
<그리스인 조르바>의 소설 첫 장면에서부터 풀어가는 작가의 사상이기도 하다.
그는 1883년 오스만 제국 치하 크레타 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미 할리스 카잔차키스 곡물과 포도주 중개상으로 중산층에 속했다. 그의 아버지는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로 <미 할리스 대장>의 소설 주인공이고 게릴라 단체의 지도자였던 아버지를 기리기 위한 작품이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자유'에 대하여 처절한 전쟁터에서 싸우다 전사한 사람들의 시체들을 통해 배우게 된 유년 시절이 그의 인생에 테마가 되었다. 그는 아네테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프랑스 유학에서 베르그송과 니체의 철학을 공부하게 된다. 그의 사상이 공산주의로 경도되었으나, 이는 그 시절 시대적인 상황과 맞닿아 있었다. 러시아와 중국에 다녀온 그의 이력에서도 그의 사회주의 사상이 그의 삶을 이끌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서양 문명의 뿌리인 그리스의 위대한 문명의 후예로서 그가 공경했던 호메로스의 뒤를 잇는 20세기 인류의 위대한 문호였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가 <그리스인 조르바>와 <최후의 유혹>을 통해서 초인의 메시지를 전한 것이 우리들에게 감명을 준다. 인간적인 초인, 인간적인 갈등을 이겨낸 영적인 초인,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자유처럼 초인이 되려는 꿈을 갖게 하는 그 메시지가 우리 가슴에 영원히 남겨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