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르타정신 아테네정신 비교
고대 그리스의 스파르타와 아테네를 비교하면서 오늘날의 상황과 비추어보게 된다.
스파르타는 플라톤이 이상 국가의 모델로 생각하였던다. 소수의 정치가들이 전투력이 강한 나라로 통치하는 노예경제의 국가였다. 스파르타의 영웅, 헤라클레스가 그들의 정신적 지주였을 것이다.
하나, 스파르타의 남자들은 모두 전사였다. 거기까지는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전쟁에서 국가와 가족을 지켜야 하는 고대의 상황을 이렇게 극복하는 스파르타의 강인한 정신에서 감명을 받게도 된다.
문제는 태어나서 허약한 아기는 늑대의 언덕에 버려졌다는 점이다. 어떻게 새 생명을 단지 허약하다는 이유로 죽음에 내던져버렸다는 것은 그들의 비인간적인 면에 경악하게 된다.
강한 사람만 살아남는다는 전사의 세계, 스파르타의 도시국가에서는 이토록 태어나자마자 증명해 보여야 했다.
둘, 공동생활 공동 식사의 사회였다.
우리는 공동으로 움직이는 조직에 참여하는 생활에서 함께 식사하는 것의 의미를 알고 있다.
직장, 일터에서 점심시간에 함께 식사를 하면서, 회식과 같은 활동에서 공동체 의식을 고취하게 된다.
그런데 스파르타의 공동생활의 공동 식사는 60세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결혼한 후에도 60세까지 전사들이 함께 식사를 해야 한다는 점은 그들의 단결이 얼마나 큰 국가 운명체를 결성하였는지 보여준다.
그래서일까? 기원전 480년, 세계 최강의 페르시아 군대가 헬라의 세계로 쳐들어왔을 때, 스파르타의 군대가 소수이지만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의 지도력으로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300명의 결사대로 맞선 사건은 그들이 얼마나 강인한 정신력과 전투력으로 똘똘 뭉쳐서 스파르타를 지켜내었는지 보여준다.
로마제국 시대 AD 73년, 스파르타의 노예들이 큰 반란을 일으켰던 적이 있었다. 로마제국은 노예경제였다. 노예들이 그렇게 반란을 일으키고 로마제국에 자유를 위한 대규모, 조직적으로 대항한 역사가 없었다. 그들의 반란은 실패했지만 그 정신은 세상에 떨쳤다.
우리나라에서도 스파르타식 교육, 스파르타식 군대 생활이 우리 생활의 단어들로 유입된 것이 놀랄 일이 아니다. 공동생활 속에서 우리들이 뭉쳐서 조직적으로 힘을 발휘하게 되는 점은 오늘날에도 같은 현상이다.
셋, 6.5%의 시민들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다수가 노예와 노예에 준하는 경제 산업 활동의 인구였다.
플라톤은 이상주의자였다. 동시에 그의 정치적 국가 모델이 스파르타의 것이었다는 점은 플라톤의 이상은 역설적이기도 하다. 플라톤은 시라쿠사(시칠리아 섬)에서 그의 정치적 신념을 실현하려고 했으나 목숨을 잃을 뻔할 정도로 실패하고 아테네로 돌아왔다.
아테네 국가의 직접민주주의와는 다른 스파르타의 국가 정치는 소수의 철인들, 지혜로운 사람들의 결정으로 운영되는 것이었다. 그곳에 다수의 노예들은 국가의 경제 - 특히 농업에 종사하여 생산 일꾼으로 살아야 하였다. 노예들의 경제는 아테네도 같았지만, 아테네는 해양국가로서 무역 경제의 개방적인 경제 구조로 성장하였다.
아테네는 민주주의 문화를 배우고 철학, 예술을 꽃피웠다. 그런 인간형을 찬양하였다.
스파르타에 헤라클레스가 있다면 아테네에는 테세우스가 있다. 다만 테세우스는 좀 더 지혜와 낭만이 있고 사람들을 위한 인간적인 면모가 눈에 돋보인다. 대표적으로 미노스왕의 숨겨둔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지혜와 사랑의 힘으로 죽이고 미궁에서 탈출하는 테세우스는 낭만과 용기를 모두 갖춘 영웅이었다. 테세우스는 아테네적인 영웅이었다.
하나, 아테네의 남성들은 강한 전사들도 만능형 재능을 겸비한 사람들이 존경받았다.
아테네의 남자들은 올림픽 경기에서 보여주듯 운동, 전투 능력에서 모두 출중해야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문학, 철학, 수사학에서 탁월하여야 인정을 받았다. 그렇기에 아테네에서 비극을 상연하는 무대들에게 그들의 정신, 문화, 예술, 인생에 대한 스토리가 아테네 사람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준 것이 공감된다. 그들이 추구하는 인간형에 대한 스토리들로 채워졌던 것이다.
플라톤은 아테네 명문가의 후손으로 그의 이름 뜻대로 '어깨가 넓은' 사람, 즉 몸짱, 얼굴짱이었다. 그는 극작가로 문학가의 꿈을 갖고 작품을 창작하고 있었지만 소크라테스를 만나서 철학가의 삶을 살기로 작정한다.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는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을 가진, 전쟁에 3차례나 참가하여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었고 생사의 전장에서 그의 제자 알키비아데스를 포함하여 아테네 사람들을 구한다. 그들은 아테네가 존경하는 만능형 재능을 가진 천재들이었다.
둘, 아테네는 제국으로 성장하기 직전의 해양 강국의 문화를 융성하게 꽃피웠다.
해양국가의 선박 제조 기술로 강력한 해상 무역 왕국으로 성장하였다. 무역경제로 지중해 시장을 장악하는 능력이 척박한 땅을 가진 아테네를 부강하게 하였다. 페르시아 제국에 맞서서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 해전에서 승리한 아테네가 최강의 융성기를 맞이한 것은 그들의 해양강국의 면모들을 보여준다.
셋, 아테네 시민들의 힘으로 직접 민주주의가 꽃피워졌다. 그 민주주의는 어두운 면을 포함한 반쪽짜리였다. 아테네는 역설적이지만 그들도 노예경제를 바탕으로 성장하였다.
다만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소수 남자 시민들을 위한 것이었다. 물론 그 민주주의로 아테네 국가를 다스리는데 도편추방제 등을 통한 시민들의 의견이 반영된 것은 오늘날 투표 민주주의에 기원이 되었다. 하지만 외국인 거주자들, 여성들, 노예들은 민주주의에 참여할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소크라테스가 철학자 최초로 순교한 사형의 결정을 내린 것도 아테네의 민주주의 결과였다. 우매한 다수들이 소크라테스를 죽인 것이다.
그러나 스파르타도 아테네도 펠레포네소스 전쟁(기원전 431-404)에서 승자도 패자도 없었다. 겉으로 스파르타가 승리하였으나, 두 도시 국가는 쇠락하게 된다. 헬라 지역이 통합된 것은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대왕(기원전 356년)으로 가능하였다. 그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16세까지 가르친 스승은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파르타와 아테네를 모두 통합한 알렉산드로스에게 아테네의 정신을 전수한 것이다. 통합과 융합에서 더 큰 에너지의 통섭의 힘이 나오는 헬레니즘 문명이 탄생하게 된 것도 그 뿌리는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장점들이 동방의 문화가 화합되었기 때문이다. 어떠한 문명, 어떠한 국가도 그 한 가치 비전이나 가치로 영원히 존속될 수 없었다.
페르시아 제국에 맞서 싸우던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정신은 무너졌다. 마케도니아는 이들을 통합하였으나, 헬레니즘 왕국들도 로마에 차례차례 복속되었다. 이로써 고대 그리스 문명은 로마제국으로 흡수 통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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