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체 김정희의 세한도
<세한도>는 그림으로 그린 한 불굴의 인간을 위한 '철학시'다. 〈세한도〉는 김정희가 예술로 빚어낸 인생의 은유를 담은 제주의 겨울 시다. 더욱 감동적인 것은 부유한 귀족 출신의 한양 명문가문에서 추락하여 제주 유배살이를 하였던 한 인간의 나락에서도 오히려 예술정신으로 굳세게 극복의 철학을 묘사한 작품이다.
사연많은 사람의 생애 역설적인 삶을 극복하는 작품이요, 반전을 꿈꾸던 유배지의 소망이 담겼다.
지금 그대가 나를 대하는 것을 보면, 내가 곤경을 겪기 전에 더 잘 대해 주지도 않았고 곤경에 처한 후에 더 소홀히 대해주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의 곤경 이전의 그대는 칭찬할 만한 것이 없겠지만, 나의 곤경 이후의 그대는 역시 성인으로부터 칭찬을 들을 만하지 않겠는가? 성인께서 유달리 칭찬하신 것은 단지 엄동을 겪고도 꿋꿋이 푸르름을 지키는 송백의 굳은 절조만을 위함이 아니다. 역시 엄동을 겪은 때와 같은 인간의 어떤 역경을 보시고 느끼신 바가 있어서이다.
<김정희의 세한도 발문에서>
<세한도> 작품의 제목은 논어에서 가져왔다.
歲寒然後知 松栢之後凋(세한연후지 송백지후조)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되어서야 소나무 측백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비로소 알 수 있다.
세한도(歲寒圖)는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 시절인 1844년(헌종 10)에 그린 그림으로, 추운 겨울날 소나무와 잣나무가 그려진 풍경화이다. 겨울이면 더욱 생각나는 실학자의 명품 그림, 세한도는 당시 추사 김정희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제자 이상적이 중국에서 구한 책을 보내주는 등 변함없는 의리를 보여주자 이를 기념하여 그려졌다고 알려져 있다.
세한도는 조선 말 성리학적 통치 이념의 치세 능력 상실과 치열한 붕당정치, 세도 정치 등의 시대 상황 속에서 그려진 작품으로, 국보 제180호로 지정되어 있다.
혹한 겨우내 버텨낸 소나무 곧게 뻗은 것도 좋지만,
몸부림치도록 비틀어져 뻗은 것이 더 감동이다.
육지를 그리워하는 외로운 섬,
그곳에도 눈 쌓인 계절이 한반도의 품이고
그곳에도 푸르름 간직한 소나무는
우리 산야의 주인이다.
저 외딴 집에 홀로 사는 곧은 선비는
그림과 글씨로 삭풍을 이겨내리.
소나무 같은 글씨체 - 추사체를
그려내니 예술의 언어는 글과 그림에 꽃피우네.
서방의 독보적인 화가들이 쫓아올 수 없으니
한국정신, 우리 민족의 글그림이 돋보이리.
- 호프맨작가 세한도에 바치는 글..
제주는 거센 바람이 많고 그 바람에 견디는 소나무는 뿌리가 깊지 않으면 결코 살아갈 수 없다. 거기에 돌담으로 쌓아 올린 제주의 소박한 집 또한 스산하고 음산한 바람을 이겨내고 살아가야 하는 유배인의 육신을 보살펴야 했던 것이다. 엄동설한 한겨울에도 푸르름을 간직하고 휘던 곧던 소나무의 생명력을 곁에 두고 살아가는 김정희의 마음가짐을 수백 년이 지난 지금에도 절절하게 느낄 수 있다.
제주는 조선시대에 거의 200년 가까이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못하는 고도의 섬이었다. 제주는 몽고 원나라의 섬으로 경작되어 우거진 초목을 모두 태우고 초원을 가지게 되어 말을 키우던 목장이 되었다. 삼별초의 난으로 원과 고려군과 맞섰던 아픔이 많았던 섬이었다. 그러한 제주의 원래 이름은 탐라였다. 탐라섬의 한 국가는 1000년을 번영하였으나 조선에 들어와서 일개 조선의 행정구역으로 또 유배지로 추락하였다. 그러한 제주도의 쓰라린 역사를 생각하면 한반도의 영토에서 가장 드라마적 극단적인 스토리를 간직한 시공간이다. 그곳의 대자연이 오늘날 유네스코의 공인, 세계 자연문화유산의 3관왕 타이틀을 갖고 전 세계인들의 찬사를 받게 된 것은 역설적이고 반전이며 극적이다.
김정희의 <세한도>는 그의 인생역정이 담겨있는 대역작이다. 그의 생애와 제주도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저 먹물을 뿌린 선비들의 사유적 풍경화일 뻔했다. 하지만, 추사체로 중국에까지 인정받은 김정희의 명성을 있게 만든 그의 유배생활이 고스란히 이 역작품에 담겨 있다.
추사체(秋史體)는 조선시대의 문신이자 서화가였던 추사 김정희가 완성한 글씨체로, 당시의 서체와 구별되는 개성이 강한 서체로 많은 사람들이 추종하였다. 추사체(秋史體)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서화가였던 추사 김정희가 개발한 서체로, 제주도 유배 시절에 완성되었다. 유배 기간 동안 추사는 다양한 서체를 연구하며 이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를 만들어냈다.
추사체는 비문을 연구한 김정희의 창조력이 돋보인다. 굵고 가늘기의 차이가 심한 필획과 각이 지고 비틀어진 듯하면서도 파격적인 조형미가 특징이며, 한례(漢隷)의 필법을 연구, 해서에 응용하여 창출한 서체이다.
<백과사전의 인용 : 김정희의 삶>
1819년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로 합격하여 병조참판에까지 올랐는데 1827년 친구 조인영의 조카사위인 효명세자를 가르치는 필선이 되었다. 하지만 1830년 효명 세자가 죽자 안동 김씨인 김우영이 탄핵하여 파면되고 아버지는 귀양을 갔다. 아마도 김우명이 공주목 비인 현감으로 있을 때 파직된 일로 앙갚음을 한 듯하다. 김정희는 아버지의 복귀를 위해 명성을 떨치던 중임에도 직접 격쟁을 하기도 했다. 순조가 죽던 해에 복귀되어 아버지와 함께 조정으로 돌아온다. 순조는 귀양을 보낼 때도 '조정에서 나오는 말이 쫓아내라 몰아내라 이딴 거밖에 없구나.'하는 투로 말했다. 안동 김씨 기세에 눌렸지 순조도 그다지 내키지는 않았다는 이야기.
1835년 풍양 조씨가 정권을 잡자 복귀해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하지만 관직생활도 오래가지 못했는데 복귀한지 5년이 지나 1840년 윤상도의 옥에 관련되어 고초를 겪었다. 이때 김정희는 고문을 심하게 받아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친구인 우의정 조인영이 '추사를 살려달라.'는 상소를 올린 덕분에 죽음을 면한 대신 대정현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8년간 유배당하는데 귀하게 자란 도련님이라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지 "저번에 보내온 음식들은 태반이 썩었다. 좋은 음식 좀 보내라." 하고 부인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먼 제주도까지 보내야 했으니 음식이 제대로 도착하는 게 이상하다. 설상가상으로 재혼한 부인도 1842년 11월에 죽었는데 부인이 병들었다는 소식에 김정희는 걱정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편지를 썼을 때는 이미 부인이 죽은 뒤였다. 2달이 지나 뒤늦게 부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김정희는 슬퍼하며 '내 생에 다시 부부가 되어 이번에는 자신이 먼저 죽어 배우자를 먼저 떠나보내는 슬픔을 알게 하고 싶다.'라는 애절한 시를 쓰기도 하였다. 유배 기간에 추사체를 만들었는데 2014년 1월 28일 방영된 KBS <다큐 공감>에서 위의 일화가 소개되었다. 당시 김정희가 먹었을 음식인 강조밥(좁쌀만으로 지은 밥)과 생된장을 백종원이 직접 먹어보는데 거칠고 먹기 힘든 음식이라는 반응이었다.
안동 김씨와 풍양 조 씨의 대립 사이에서 일종의 중간 관리자 역을 하던 영의정 권돈인과도 친했는데 헌종의 묘를 옮기는 문제로 1851년 같이 파직되어 함경도 북청 도호부로 유배를 갔다. 67살 늙은 나이였는데 유배 기간 동안 고대 석기를 연구했으며 「석노가」(石砮歌)에서 그는 귀신의 조화로 보던 돌도끼나 돌 화살촉을 생활 도구이자 무기임을 밝혀내고 토성 유적과 갈라서 보자고 주장했다. 그렇게 한 해를 보내고 1852년 겨울에야 풀려났는데 이로써 3년+8년+1년으로 도합 12년 유배가 김정희의 삶을 관통하였다.
북청부에서 돌아온 뒤 김정희는 과거 아버지가 과천에 마련해둔 과지초당(瓜地草堂)에 머물면서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다. 71살 되던 1856년 승복을 입고 봉은사에 들어갔다가 1856년 10월 과천으로 돌아와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날까지 집필을 했다고 하는데 김정희의 마지막 작품은 봉은사의 판전 현판으로 세상을 떠나기 4일 전에 쓴 글이라고 한다. 김정희가 얼마나 작품에 열정적이었던지 평생 동안 벼루 10개에 구멍을 내고 붓 1000자루를 닳게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