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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공원, 바다의 노래> 산을 오를 것인가?

바닷가 해변을 걸을 것인가? 공원을 산책할 것인가?


산을 오르고 있다고 생각하며 걸었지만 사실은 산을 내려가고 있었던 거야. 정말 그랬어. 다들 내가 산을 오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꼭 그만큼 내 발밑에서는 삶이 멀어져 갔던 거야······. 이제 다 끝나버렸고, 죽음만 남아 있어!


- <이반 일리치의 죽음 (개정판)>,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 이순영 옮김



톨스토이는 산을 죽음의 길과 비유하였다. 이 명문장을 통해서 삶과 죽음을 만난다. 죽음을 아직 잘 모르기에 삶을 산에다 비유해 본다. 또 산에 필적할 만한 대자연의 존재들을 우리 생애의 가르침으로 생각해 본다. 생명의 산, 삶의 공원, 살아있는 바다를 만나서 삶의 글을 적어보게 된다.



젊어서는 산을 좋아하였다. 오르는 것을 즐겼다. 그렇다고 등산을 잘하는 체력도 아니었지만, 자신 있다고 스스로 근거 없는 확신을 가졌다. 그 시절 부끄럽지만 고백하자면, 설악산 중턱에서 도망한 적도 있었다. 돈을 벌기 위해 지겟짐을 지고 산장에 올라가려는 객기의 도전에 실패한 것이다. 산이 얼마나 무서운지 그때 알았다. 높이 오르려는 산에서 나의 자긍심을 끌어 오르려고 한 그 젊은 시절이 아득하다. 다만, 지금도 아쉬운 산행의 추억은 언제나 산을 그리워하게 한다. 오르지 않아도 좋다. 산이 있기에 우리의 삶은 도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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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산에 오를 수 있는 기회가 있을까? 오르려는 욕망을 가져도 될까? 오르지 못해도 좋다. 그저 산이 내 곁에 있고 산을 생각할 수 있어서 살만한 것이다. 산을 오르고 싶은 돈키호테의 용기처럼 그렇게 사는 멋을 갖고 살고 싶다. 타인인 산을 정복했는지 부러워하지 않고, 나만의 산, 내가 스스로 만든 살길, 나만의 오르막 내리막길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산을 오르고 내려오고 싶다. 그 산길에 발자국이 쌓여가는 나의 인생에서 올해도 성장하고 싶다.




그런 깨달음이 준 교훈이었을까? 40대 끝에서부터 지금까지 산이 없는 곳(베트남 남부, 호찌민과 근교)에 살고 있다. 대신 나무들이 많은 공원을 즐길 수 있다. 공원은 오르는 언덕조차 없다. 평평한 땅에 사람들이 심어놓은 나무들이 나를 만나준다. 그 공원에서 일요일을 만난다. 사람들이 공원을 즐기는 방법들을 만난다. 그들을 바라보면서 치유가 된다. 고통도 스트레스도 공원을 거닐면 풀잎처럼 위로가 된다. 공원의 산책길도 풀잎, 잔디 위에 가지런하게 돋아난 마음의 행로를 따라간다. 공원은 사람들이 인공적으로 만든 대자연이다. 대자연의 나무들, 풀, 꽃들을 옮겨와서 생태 공원을 만들었으나, 이미 공원은 어느 개인의 것이 아니다. 모든 생명체들이 어울려 한데 즐길 수 있는 생태 환경이 된다. 그 환경에 들어서는 사람들은 생명체들의 한 부분이 된다. 그곳에서 오르고 내릴 필요도 없다. 그 생명력 충만한 공원에서 모두가 평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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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맨작가의 공원 산책길





올해도 그렇게 공원을 거닐듯이 순탄하였으면 좋겠다. 욕심부리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멈추지는 않겠다. 오르려는 욕망보다 산책을 선택하겠다. 공원의 산책길에서 타인들과 같이 걸어가면서 나를 돌아보겠다.


이 공원이 내 곁에 있는데 바라만 보지 않고 꼭 거닐고 싶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서 공원을 즐길 수 있는 능력도 공원에서 건강해지는 정도도 다를 것이다. 올해는 더 즐겁고 유쾌하게 건강한 삶을 위한 노력을 해보겠다. 어렵고 험한 산길이 아니기에 욕심을 접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공원에서 산책하듯 마음 닿는 대로 천천히 욕망하고 싶다.





지구를 아늑하게 포용하는 바다가 좋다. 광대한 바다는 무엇을 오를 필요도 없게 만든다. 바다의 장엄한 서사시를 바라보는 것으로 겸손하게 만들어준다. 바다는 오히려 해변에 멈추어서 게 한다. 하지만, 나는 그곳을 맨발로 걷고 싶다. 해변조차도 바다의 일부이다. 그윽하게 바다를 느끼고 밟고 싶기에 바닷가에서는 천천히 걷게 된다. 바다는 짧은 A4용지에 담을 수 없는 서사이고 원고지에 채울 수 없는 절대 시이다. 바다를 닮고 싶다. 내 발끝에 적시면 닮아질까 감히 그윽한 꿈을 지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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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파도를 통해서 우리를 춤추게 한다. 파도처럼 넘실거리면서 자극을 주고 흥분시킨다. 파도의 포말처럼 하얗게 부서지게도 한다. 그곳에서 새로운 파도를 꿈꾸면서 살고 싶다. 맨발걷기로 단련하고 싶다.


발밑에 파도를 적시면서 걷고 싶다. 그만큼 아버지의 바다는 넉넉하게 나의 꿈을 안아준다. 올해도 바다처럼 꿈을 꾸면서 대항해를 하고 싶다.




바다 앞에 서면 명상할 수밖에 없다. 내면을 들여다보고 귀 기울이게 된다. 웅장한 바다의 영상 앞에서 떨지 않을 수 없다. 바다는 오르는 것이 아니고, 그 품에 파묻혀서 넘실거리는 것이다. 무지개가 되어 파도를 타고 수평선 너머로 여행객이 되는 일이다. 그 바다에서 성장하고 싶다. 파도처럼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고 싶다. 바다의 언어를 배워서 세상의 끝까지 세상의 모든 육지에 닿고 싶다.







산이 곁에 있지 않아도 산에 오를 수 있고,


바다가 보이지 않는 곳에 있어도 수평선을 상상할 수 있다.


공원에서 강물, 호수를 따라 윤슬을 펄럭이다 보면,


산의 우람한 봉우리와 바다의 파도 구비치는 수평선 너머


상상할 수 있어 행복하다.


언제인가 그곳에 다다를 수 있다고 믿기에 글을 쓴다.


글이 산이 되고, 바다가 되어


다시 강물과 호수로 들어와 내가 산책하는 공원으로


흘러들어오면 좋겠다.


나의 무지개 빛깔의 글이 언제인가 산과, 바다가 되면 좋겠다.


그곳에 편안히 쉴 수 있는 위로와 치료의 의자가 되고 싶다.


- 호프맨작가의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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