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살게 되는 이유들
주변에 죽음을 목격하거나, 장례식에 참석하거나, 노부모를 모시고 어려움을 겪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 글을 나누고 싶어진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아니, 죽기 전에 어떻게 살아왔는가? 그것을 더 이야기하고 싶다. 그럼에도 죽음 이후의 상상은 늘 인간의 두려움을 낳게 한다.
“오른쪽으로 목이 긴 암포라amphora의 감탄스러운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이 암포라는 기원전 6세기에 물레 위에서 만들어 채색한 후 가마에서 구운 저장용 항아리다. 항아리의 표면에는 방금 전사한 호메로스의 영웅 아킬레우스를 그의 전우가 전장에서 들어 옮기는 장면이 특별히 공들여 묘사되어 있다. 『일리아스』에 등장하는 아킬레우스는 생명과 활력 그 자체인 인물이다. 그는 화염처럼 밝고 커다란 눈을 가진 견실한 몸의 뛰어난 주자走者로 격렬한 기쁨과 사나운 분노의 포효는 공기를 찢듯이 가른다. 그러나 이 암포라의 그림에 담긴 그의 몸은 애처롭게 축 늘어져 있고, 그의 정신psyche 혹은 영혼도 마지막 숨과 함께 그를 떠난 것으로 보인다(실제로 ‘psyche’는 ‘숨’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파생되었다).”
"이 아름답고도 실용적인 항아리 쪽으로 걸어가며 그리스식 죽음에 관해 기억나는 모든 것을 떠올리려고 노력한다. 이내 그리스 장례식에는 성직자가 배석하지 않았던 것을 기억해 낸다. 불멸의 신들은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관심도 주지 않은 채 등을 돌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족들에게 시신이 인계되고, 생명이 없는 상태의 몸은 온순하고, 가엾고, 놀라울 정도로 어린아이처럼 보인다. 그리스어로 장례식을 뜻하는 단어는 ‘보살피는 것’으로 번역할 수 있다. 가족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씻기고, 성스러운 기름을 바르고, 턱을 끈으로 둘러매서 처지지 않도록 한다. 그러는 동안, 호메로스의 말을 빌리자면 “몸에서 빠져나온 영혼은 어둠의 우물 같은 저승을 향해 퍼덕였다.” 그것이 아닌 모든 것으로 정의되는 곳. 다시 한번 호메로스의 말을 인용하자면 그리스의 지하 세계는 형체도, 피도 없고, “흐릿하고 숨이 막힌다.” 이 불명확한 세계에 대해 읽으며 그리스인들은 죽음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있는 건 거의 없다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오직 삶에 관해서만 알고 있었고 자신들이 아는 것을 <쿠로스 대리석 조각상>과 같은 작품을 만드는 데 쏟아부었다."
-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패트릭 브링리
젊어서는 죽음은 두려웠다. 그렇기에 죽음을 생각하지 않기로 하였다. 하지만 중년이 넘어서서 50대 중후반이 되니까 죽음이 멀지 않은 것이 되어간다. 우리는 열심히 살아야 한다. 죽음이 주는 삶의 의미에 대하여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점 더 선명하게 깨닫게 된다. 특정 종교의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죽음 이후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책을 통해서 영상을 통해서 이해하는 죽음은 분명히 흐릿한 육신 - 육신이 사라진 세계라는 것이 분명한 깨달음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삶은 죽음을 대비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열심히 살지 않고 삶을 낭비하는 사람은 죽음이 두려울 것이다. 열심히 살아서 삶에 충실하고 꿈을 이루어간 사람은 죽음 너머의 세상도 새로운 도전이 될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사형을 언도받고도 죽음 이후에 좋은 세상을 만날 것을 확신하였다. 그는 죽기 전 진리를 위해 살아온 그의 건강한 삶에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죽음을 위해서 준비하는 것이 삶이라면 삶이 너무 슬픈 것일까? 역설적으로 더욱 열심히 살게 되는 동기부여를 받게 된다.
왜 그렇게 피로함을 무릅쓰고 매섭게 살게 되는지 묻게 된다. 흐리멍덩하게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자유롭게 살면 안 되는지 묻게도 된다. 유희와 쾌락으로만 살면 안 되는지 그렇게 살면 과연 낭비하는 것인지 질문하게 된다. 결론은 너무도 짧은 생애 사막처럼 메마르게 살고 싶지 않아서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오아시스처럼 빛나는 공간을 만들 수 있다면 나의 영혼도 또 나의 벗들도 와서 편안하게 쉬면서 그 맑은 물을 마실 수 있게 되면 좋겠다. 살아 생전에 또는 사후에라도 글이 내게도 오아시스 같은 존재이면 좋겠다. 살아내는 것이 생명의 물을 마시는 삶이면 좋겠다. 삶이 오아시스의 샘물을 발견하고 마시려고 노력하는 것이라면, 사막은 죽음인가? 어쩌면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사막의 모래 폭풍을 지나는 것이 삶의 고행이고 그 고행을 성공적으로 마치는 사람들이 죽음 이후 오아시스를 샘물을 마실 수 있게 되는 거다.
열심히 살아온 사람에게 죽음이 주는 삶의 의미와 가치는 절대 비관적인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인간은 어차피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이는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나이가 들면서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럴수록 동시에 삶에 더욱 충실하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이 죽기 전에 "원더플 라이프 - 참 멋진 인생이었다"고 하였다. 우리도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