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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향기>모비딕 작가 불행, 허먼 멜빌의 자전소설

모비딕 소설의 위대한 서사 대자연과 갈등? 공존?


스타벅스의 브랜드명은 소설 《모비 딕》에서 유래했다. 창업주 고든 보커, 제럴드 볼드윈, 지브 시글 세 사람은 《모비 딕》의 팬이었다. 이들은 《모비 딕》에 등장하는 1등 항해사 ‘스타벅’의 이름을 따서 브랜드명을 정했다. 스타벅이 3명이라는 뜻으로 ‘스타벅스(Starbucks, 복수형을 취함)’가 되었고, 세이렌(Siren, 바다의 요정)의 이미지로 로고를 만들었다.




독자들은 모비딕을 읽다보면, 인생이라는 대항해, 거대한 모비딕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아갈 것인지? 맞설 것인지? 포기하고 도망갈 것인지 묻게 된다.



<모비딕>이 1851년 처음 출간되었을 때 일부 작가들만 작품을 인정했을 뿐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가 1891년 72세에 죽을 때 고작 3,200부가 팔렸을 뿐이다. 그는 작가로서 거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불행한 말년을 보냈다. 1866년 12월, 다시 뉴욕 세관의 검사계 일을 얻었고 네 명의 자식을 두었으나, 맏아들 말콤이 권총 자살하고, 자택이 화재로 소실되고, 둘째 아들 스탠웍스가 집을 나가버리는(그는 2년 뒤 샌프란시스코에서 객사하였다) 등의 불행을 겪었다. 그의 걸작이 될 《빌리 버드》를 완성한 1891년에 확장성 심근병증으로 인한 심장 발작으로 사망하였다. 작가는 불행한 삶을 살았지만 불멸의 모비딕으로 세상에 대서사의 메시지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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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딕은 상상의 허구로만 창조된 세계가 아니었다.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1819~1891) 작가는 모비딕의 스토리와 같은 체험을 직접 하였다. 그의 놀라운 경험이 바탕이 되었다.




1840, 19세기 중엽의 일이었다. 허먼은 태평양으로 가는 포경선을 타고 이듬해부터 태평양을 항해하였다. 후에 멜빌은 그의 인생은 이 시점에서 시작되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열여덟 달간의 여행을 통해 그는 《모비딕》을 쓰게 된다).



혹독한 환경에 염증을 느낀 허먼은 1842년 7월 9일에 마라케스 제도의 누크히바에서 도망쳐 원주민 부족인 타이피족들과 만났다. 8월에 오스트레일리아 포경선 루시안 호에 구조되었지만 타히티 섬에서 승조원 폭행 사건에 말려들어 영국 영사관에 체포되었다. 10월에 다시 도망친 멜빌은 에이메오 섬으로 달아나 숨었다. 이 파란만장한 항해는 11월, 미국 포경선에 구조되어 이듬해 1843년 4월 하와이에 닿을 때까지 이어졌고, 이 18개월의 항해와 탈주, 체포의 과정은 그 뒤 그의 저작에 큰 영향을 주었다.




1843년 8월에 하와이 호놀룰루에 있던 멜빌은 미국 해군의 수병으로 채용되어 이듬해 1844년에 린딘버그로 돌아왔다. 그가 없는 동안 집안의 생계도 나아져 형제들도 독립했다. 삶에 여유가 생긴 멜빌은 글쓰기에 다시 몰두해 당시 유행하던 해양소설에 손을 댔고 마라케스 제도에서의 삶을 바탕으로 1845년 7월, 첫 번째 작품인 《타이피 족》(Typee)를 써낸다. 이는 원주민 여인과의 불륜적인 사랑을 포함하고 있다.




멜빌(Herman Melville, 1819~1891)의 가치는 그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1919년에 부활했다. 미국 작가 칼 반 도렌은 모비딕을 미국 낭만주의의 정점이라고 극찬했다. 레이먼드 위버의 전기 ‘허먼 멜빌: 뱃사람 그리고 신비주의자’(1921)가 출판되면서 멜빌과 모비 딕에 대한 관심은 최고조로 올라갔다.



이후 멜빌을 단테나 셰익스피어, 밀턴이나 도스토옙스키와 비교해 그의 위대성을 논하기도 했다. 위버는 모비딕을 “19세기 미국이 낳은 가장 뛰어난 소설적 상상력”이라고 극찬했다. 이후 모비딕은 대작으로 평가되었고, 영국의 소설가 서머셋 몸이 선정한 세계 10대 소설의 하나에 꼽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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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허브 선장(Captain Ahab)



포경선 피쿼드 호(Pequod)의 선장으로 고래잡이 사냥에 나섰다가 모비 딕에게 한쪽 다리를 잃는다. 그 뒤 모비 딕을 잡아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뒤쫓다가 결국 모비 딕에게 목숨마저 잃게 된다.



에이허브 선장은 선원들을 전투사로 이끌었던 승부사적 리더였다. 그럼에도 결국 그가 모비딕과 함께 바다에 수장당하고 다른 모든 선원들도 그렇게 죽고 만다. 어쩌면 에이허브 선장은 복수를 위해서 이미 죽을 각오를 한 무모한 승부사였다.







모비딕에게 복수하는 것이 내 운명이다!


에이허브 선장






에이허브의 선장과 소설 화자의 대사는 참으로 서로 극한 대치를 이룬다.


도저히 사람이 당해낼 수 없는 모비딕에 맞서는 에이허브의 무모한 도전과


아무리 발버둥쳐도 내 마음대로 지배할 수 없는 연약한 인간의 한계..


우리는 어느 곳에 우리의 운명을 던져야 할까!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내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는 것은 밧줄의


한쪽 끝뿐이라는 사실이다."


모비딕 중에서









스타벅(Starbuck)



낸터키트(Nantucket) 출신으로 피쿼드 호의 1등 항해사이다. 큰 키에 열정적인 성격이면서도 신중함을 가진 선원이다. 그래서 모비 딕을 잡기 위해 선원들을 선동하는 에이허브 선장에 맞서려고 하지만 결국에는 피쿼드 호와 운명을 함께 하였다. 그는 미친 리더에게 합리적으로 반항하는 인물이다.








신이여 나를 지켜주소서! — 우리 모두를 지켜주소서! 스타벅이 낮게 중얼거렸다.








퀴퀘그(Queequeg)



아메리카 토착민 추장의 아들로 기독교 세상으로 나오지만, 포경선에서 기독교 세계가 아메리카 토착민의 세계와 다를 것이 없음을 깨닫고 아메리카 토착민의 신앙을 간직한 포경선 최고의 작살잡이가 된다. 이스마엘과 절친한 친구가 되어 피쿼드 호를 타고 고래잡이 사냥에 나서지만 풍랑 속에서 이스마엘을 구하다가 상처를 입고 그 후유증으로 파상풍을 앓다가 사망한다.






"술 취한 기독교인보다 정신이 맑은 식인종과 함께 자는 것이 낫다."


모비딕의 첫장면 중에서


이스마엘 주인공이 작살 전문 선원 퀴퀘그에게








- 이스마엘이 이교도 선원 퀴퀘그에 대해 느끼는 복잡한 감정을 표현한 문장이다.


정말 기독교인들이 술 취한 모습은 식인종의 맑은 정신보다 못할 것일까! 이교도, 이민족에 대한 작가의 생각과 감정들이 시사한다. 오늘날 사회의 주류라고 하는 사람들이 술 취한 모습을 보일 때 느껴지는 동감이다.






"나는 먼 것에 대한 끝없는 갈망으로 괴로워한다.


나는 금지된 바다를 항해하고 야만적인 해안에 상륙하는 것을 좋아한다."


<모비딕의 이스마엘 대사 중에서>











이스마엘(Ishmael)



가난하지만 성실한 청년으로 바다를 동경해 포경선을 타기로 결심한다, 퀴퀘그와 함께 피쿼드 호의 선원이 되어 고래잡이 사냥에 나선다. 모비 딕과의 싸움에서 유일하게 살아남는다. 책의 첫 문장에 나오며 'Call me Ismael'의 해석은 '내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해두자'라고 관조적으로 보는 입장이 이스마엘의 성격상 맞다고 보는 견해이다.



이스마엘은 관찰자 입장이며 상선만 타다가 포경선을 처음으로 접한 터라, 배워 나가는 초보자의 이미지이다. 그는 이름이 주는 아랍적인 성격으로 인해 책이 나왔을 때 미국에서 이방인처럼 취급당하는 비주류를 대표하는 성격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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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살아남은 이스마엘의 대항해 탐험 정신과 도전정신의 모험심 승리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처절한 경험으로 살아남았다. 업계와 인생의 선배들이 목숨을 걸고 사투하였던 것이 그저 모비딕이라는 거대한 존재였을까? 그들은 자신들의 인생을 걸고 자신과의 투쟁을 한 것이다. 물론 그 안에서 살아남은 자, 이스마엘이 있었기에 이 운명과 싸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마저 죽었다면 이 스토리는 바닷속에 떠도는 전설로만 묻혔을 것이다.




인간은 인류가 태어나서 문명을 이룩한 역사 속에서 수많은 거대한 존재들과 싸워서 이겨왔다. 그렇게 목숨을 걸고 지켜내려고 하였던 인생의 목표, 후대에게 싸워온 선배들의 역사를 전달하였다. 우리는 모비딕이라는 존재를 그저 괴물로 볼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일 수도 있고, 악마일 수도 있다. 아니면 인간의 내면에 숨겨져있는 스스로가 만든 괴물일 수도 있다. 그것과 대적하여 싸워 이겨내면서 우리를 그 너머를 알게 되었다. 바닷속에서 살고 있는 미지의 괴물, 인간의 내면이 창조한 괴물 모두와 맞서서 이겨낼 때, 우리는 비로소 이스마엘처럼 생과 사를 넘나들었던 무용담을 후대에 남길 수 있다.



그 무용담은 압도적인 대자연의 힘 앞에서 인간이 쓰러져야 할 것인지? 아니면 맞서 싸우고 극복해야 할 것인지? 대자연의 도전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지? 또한 대자연과 인간의 갈등을 어떻게 포용할 것인지? 철학적인 대서사시로서 감명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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