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의 예술론 맞고도 틀리다!

대자연과 예술, 예술은 대자연의 모방이자 인간의 상상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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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작가의 글



제목 : 여름나라 공원에서 <감성 수필>

부제 : 누가 자연을 모방하라고 하였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맞다.

작가 : 호프맨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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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맨작가의 출간물.. 블로그 1800일째 날마다 글쓰기 작가.. 인문학, 소설, 수필, 시를 창작합니다.

호프맨 작


감히 말하건대 아리스토텔레스는 하나는 맞고 다른 하나는 틀리다.


그는 역시 철학자요, 학자였으나 시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예술이 자연을 모방한다고 하였다. 이는 분명히 현대적인 개념으로는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헤겔은 예술은 창작자의 상상력이라고 말했다. 이는 상당히 현대적인 해석이다.


나에게 예술은 대자연에 대한 모방과 인간의 상상력을 모두 결합한 것이다.




자연을 모방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대자연에 감동을 받고 그 감동을 표현하고 싶기에 예술도 그러하다.


예술에 사람의 영혼이 담겨있기에 자연과 교류하는 것이 아닐까!


에머슨은 자연에 영혼이 있다고 하였다. 자연에 영혼을 부여한 것은 신인가? 사람인가? 묻고 싶다.


자연과의 교류를 해낼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이 부여한 것이다. 신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 사람들 모두 자연의 후예들이다. 결국 같은 영혼을 가진 것이다.




대자연의 품에 안겼다. 공원을 거닐 수 있는 것도 선물이었다. 공원은 인공적으로 조성된 자연이다.


인공에서 조성된 자연과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고 살아가는 대자연은 그 품이 다른가? 그렇지 않다.


자연을 따로 떼어난다고 자연의 영혼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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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거친 자연에서 살아가는 것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자연을 인간성으로 친절한 언어로 해석한 사람들은 예술과 문학을 창작하였다.


예술과 문학은 자연을 모방하려고 하였지만, 절대 흉내 내는 수준으로 그치지 않았다.


사실 대자연은 사람들에게 자연을 닮으라고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어머니 대자연을 늘 흠모하였던 것이다. 영어로 대자연을 Mother nature라고 부른다.




나의 일요일은 축구장 다섯 배 크기의 공원과 함께 산책하는 시간이 채워져 있다. 내가 사는 곳은 산이 전혀 없다. 사람들이 조성한 인공공원이지만 이마저도 감사한 공간이기에 나는 부자 마음이 된다.


이 공원의 나무들과 풀잎들이 향기를 품어낸다. 그 안에서 휴일 한때를 즐기는 사람들은 더없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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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자연의 크기를 통해서 대자연을 음미하고 감상하는 것에 문제가 있음을 많이 깨닫는다.


일터의 걸음걸이에 만나는 작은 정원들이 있다. 이름 모르는 여름나라의 신비로운 화초들이 우리 앉은키보다도 작은 높이로 자라고 있다. 곁에 보이는 적은 규모의 자연 - 이들을 만나면서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날마다 고맙다.




때로는 장대비에 휘청거리는 식물들이 지쳐 보이는 괜한 걱정을 하고 있을 때가 있다.


사실 작은 식물들은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서 생명의 양식을 즐기고 춤을 추고 있는 것이다.


사람도 흠뻑 비에 젖을 필요가 있다. 온몸에 쏟아지는 샤워 같은 체험일 거다.


세포와 DNA 들에 침투하는 생명의 물을 수용하는 식물도 사람도 모두 물의 생명체 일부였음을 기억하리라.



여름나라의 한나절은 열사의 더위다.


때로는 바깥의 식물들이 너무 더워서 타들어가지 않을까 염려할 때도 있다.


이런 오해도 사람다운 오류, 잘못된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작은 식물들은 강렬한 햇살에 더욱 녹음이 짙어진다.


엽록소의 빛깔이 더욱 눈부시게 밝아지는 것은 대자연의 처절한 노력의 결과였다.


햇살이 좋은 곳에 심어진 식물들은 윤기가 흐르지만,


건물의 그늘에 가려진 식물들은 색이 바래고 흐느적거리며 힘이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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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도 그렇게 되어야 하지 않을까! 뙤약볕에 그을린 얼굴에 강렬한 생명력을 담고 있지 않는가!


실내에서 적당한 온도에서만 자란 연약한 화초처럼 허약하게 살고 있지는 않을까!


너무 건물 안에서만 뜨거운 햇살을 피해 그늘처럼 살아가는 우리들은 근육질이 없는 것 같다.


우리의 색깔을 제대로 발산하지 못하는 것일 게다.




대자연은 어디에나 생명을 움터 오르고 살아남기 위해서 처절하게 대자연의 자원들과 교감한다.


식물들은 산자락, 숲, 공원, 작은 정원, 아니 길거리 모퉁이에서도 생명을 꽃피운다.


예술처럼 자연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자연처럼 예술을 감상하겠다는 생각이다.


예술정신, 인간 정신이 자연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생각은 오만이고 거만한 생각이 된다.




이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가가 아니었지만, 정말 현자다운 예술의 정의를 내렸다.


예술은 자연을 모방하여야 한다는 것은 진실이다. 이는 Mother nature 대자연의 영혼과 교류하는 일이다.


예술의 주제인 사람들도 자연을 배우고 그 가르침을 따라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우리 모두 자연의 후예, 자연을 닮은 시인들이요 문학가고, 예술 창작자들이다.


평범한 창작가들은 그저 자연과 교류하여 모방 수준에 머무른다.



특별한 창작가들은 자연을 배우고 모방하지만 인간의 상상력을 더한다.


자연은 무궁한 상상력의 원천이다. 그 상상력을 손에 쥔자 그 열쇠에서 예술을 꽃피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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