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멘헤세의 고통 해방의 가르침
헤르만 헤세를 좋아하면서 20대를 맞이하였습니다. 그의 소설의 주인공처럼 아니 그처럼 방황하던 사춘기는 그야말로 질풍노도의 시기였습니다. 그를 쫓아가고 싶어서였을까요?
20대 전후 폭풍우 언덕에서 그의 작품들의 주인공을 만났고, 헤어졌고, 울고 웃었습니다.
50대 중후반 평온한 초원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이제는 그 주인공들에게 얘기할 만큼 성장하였지요.
헤르만 헤세, 그의 책들에서 발췌하여 공유합니다. 고통마저 해방의 길로 가는 표식이 됩니다.
《데미안》에서 싱클레어는 크로머에게 소위 왕따를 당하면서 괴롭힘을 당합니다. 싱클레어는 고통받고 우울증에 빠지면서 그의 불우한 학창 시절을 견뎌내고 있었지요. 그때, 싱클레어의 삶에 데미안이 섬광처럼 출현합니다. 데미안은 심지어 카인처럼 강해져야 한다고 싱클레어의 고통에서 해방될 것을 주문합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발버둥 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이다.
<데미안에서 인용>
우리의 삶에서 고통 없이 얻어지는 성장은 없습니다. 알을 깨고 나오는 고통,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두려움과 아픔이 있어야 진정한 자신을 만날 수 있습니다.
주인공 싱클레어가 독립적인 참된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겪는 내면의 고통과 성장의 불가분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싯다르타》에서
괴로움은 일종의 잠이다. 모든 고통은 잠을 잔다. 고통이 사라지면 깨어난다. <중략>
그는 슬픔과 괴로움을 겪어 보지 않고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세상의 고통을 직접 겪어 보아야만 진정한 이해에 이를 수 있습니다.
<싯다르타 중에서>
싯다르타가 세상을 유랑하며 고통을 겪는 과정은 깨달음의 중요한 단계임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부처님은 6년간 참을 수 없는 고통의 수행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고통이 수행의 방편이 아님을 깨달으셨고, 중도의 입장으로 수행의 방편을 바꾸셨습니다. 이 소설에서도 고통 자체가 목적은 아니지만, 깨달음으로 가는 여정에서 피할 수 없는 부분임을 이야기합니다.
고통의 잠에서 깨어나기를 원하는 싯다르타 소설의 메시지가 의미심장합니다.
우리 인생이 그렇지 않을까요! 고통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는 평온함에서 성장합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을 이해할 수준으로 중년의 나이를 먹고 성장하는 나를 발견합니다.
《수레바퀴 아래서》에서
세상에는 고통과 슬픔이 가득 차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 고통과 슬픔을 이겨낼 수 있는 힘도 존재한다.
<수레바퀴 밑에서 인용>
한스는 가족의 기대에 부응하여 경쟁적인 교육 시스템 속에서 고통받지만, 그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찾으려 애씁니다.
하지만,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에서 한스는 새로운 것을 깨닫습니다. 기계공으로 일하면서 열심히 일한 후에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에서 일상의 행복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도 잠시 그날 만취하여 돌아오던 중에 강물에 빠져 죽게 됩니다. 허망한 그의 삶에서 헤세의 메시지를 읽게 됩니다.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 찬 세상에 빠질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이겨내야만 한다는 메시지입니다.
사회 시스템에 매몰되어 그 절망에 지지 말고 그 고통과 슬픔을 이겨내려는 내면의 힘을 기를 것을 이야기합니다. 이 시대의 모든 젊은이들에게 고통 속에서 방황하지 말고 극복하라고 합니다.
《유리알 유희》에서
모든 고통은 결국 해탈의 기회이다.
고통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과 세상의 본질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유리알 유희 중에서 인용>
유리알 유희의 주인공, 요제프 크네이트는 최고의 수행자로서 명인의 정점에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파계하고 맙니다. 그 수행자들의 세상에서 보통 사람들이 사는 속세의 세상으로 들어옵니다.
정신적인 수련과 학문을 통해 고통을 초월하려는 인물들의 모습에서 고통이 단순한 부정적인 경험이 아니라, 깊은 성찰과 해탈로 나아가는 디딤돌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 과정이 반드시 속세를 벗어난 세상과 결별한 것이 아니어야 한다는 메시지도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도 크네이트 명인은 유리알처럼 허망하고도 산산이 깨지는 죽음을 맞습니다. 제자와 수영을 하다가 죽게 되는 겁니다. 주인공이 죽어야만 하는 설정이 헤르만 헤세 소설의 한 줄거리이기도 하네요.
아마다 유리알 유희 제목처럼 수행으로 도달하는 것마저 인생에서 유리알처럼 부서지기 쉬운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 아닐까요? 고통도, 기쁨도, 희열도 모두 제행무상이라는 것이지요.
중년이 되어 헤르만 헤세를 다시 만납니다. 젊어서 읽던 그런 느낌과는 사뭇 다릅니다.
왜 주인공들이 죽어야만 하는지? 그전에 왜 고통을 받았고 고민과 갈등에 사로잡혀 있었는지? 질문하고 답하게 됩니다. 젊어서는 의문투성이였지만 답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은 조금씩 고통의 의미도, 극복할 의지도, 해탈까지는 아니지만 놓아야만 하는 해방의 길까지도 답할 수 있게 됩니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들은 구원의 메시지들로 가득합니다. 문학작품이 이토록 큰 힘을 불러일으키네요.
그의 소설들을 좀 더 일찍 이해하였다면 젊은 날의 고통이 조금 덜했을 것인데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헤세의 소설들에서 구원의 길을 찾아보세요.. 우리들의 삶에 오로라 같은 빛을 보실 겁니다. 그 빛을 찾으면 고통에 빠지지 않을 만큼 평온해진 나를 만나실 겁니다. 결국 고통도 구원에 이르는 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