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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않겠습니다! 항일독립운동가 그분들의 피와 죽음!

열사님 의사님 감사드립니다!


한용운 선생님 시인



처음 청소년 시절, 한용운 시인님의 시를 읽으면서 연애감정에 사로잡혔습니다. 실제로 시인님이 스님인 것을 알고 나서 또 남자가 쓴 언어라고 생각하니 그 시어들의 문체가 모두 색다르게 다가왔습니다.


한용운 시인님의 '님'이 우리나라인 것을 알고부터 나라사랑의 지고지순함의 언어를 알게 되었습니다.



한용운 선생님은 민족의 항일운동 열사이시고 시인이셨습니다. 글의 힘으로 겨레의 힘을 모으신 분입니다. 문학을 통해서 시를 통해서 민족, 한국의 정체성을 온 세상에 선포하신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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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 장군님



1930년 1월 24일 김좌진 장군은 그의 옛 부하이자 공산주의자였던 박상실의 총탄에 맞고 쓰러집니다. 이때 김좌진 장군은 사망하기 직전 “할 일이…. 할일이 너무도 많은 이때에 내가 죽어야 하다니... 그게 한스러워서….”란 말을 남겼습니다. 사후 3년 뒤, 아내 오숙근이 유해를 수습하여 고향 홍성에 임시로 매장하였다가 해방 후 김두한에 의해 정식으로 안장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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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장군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의 보고서에 의하면 봉오동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군에게 전사 157명, 중상 200여 명, 경상 100여 명의 피해를 주고 승리했습니다. 독립군의 피해는 전사 4명, 중상 2명이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봉오동대첩이라고도 불린답니다. 봉오동전투의 승리로 독립군의 사기는 크게 진작되었으며, 계속적인 독립전쟁의 수행을 위해서 만주 내 독립군 군벌의 군사적 통일과 아울러 병력보강과 군자금 조달 등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한편 일본군 끼리 서로 교전한 것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일본군 관계자들은 줄줄이 문책을 당하고, 작전훈련 미숙으로 전보 또는 강등 등의 징계 조치를 당했습니다....




영화 <봉오동 전투> 하단의 이전 블로그 내용을 보시면 상세하게 이해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의 승리가 우리나라의 무장독립의식을 고취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음에도 명암이 엇갈리는 가운데, 그의 유해가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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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전투, 홍범도 장군과 독립군 영웅들, 역사 칼럼, 영화 칼럼, 대한독립만세, 잊지 않겠습니다.

한국 사람에게 홍범도 장군과 봉오동 전투가 잊힐 수 있을까요? 영화는 실화를 우리에게 더 생생한 역사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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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 선생님



우리 민족에 신채호 선생님같은 역사가가, 단군조선을 축소하고 고서들을 없애버린 조선시대부터 계셨더라면 우리의 역사는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단재 선생님은 우리 민족의 위대한 역사가이자 독립운동가셨습니다.



https://blog.naver.com/seolhon/222523989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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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3일개천절, 단군의 나라, 단재 신채호 선생님! 역사 칼럼

개천절(양력 10월 3일, 단기 4354년)은 한민족 뿌리를 기리는 날이요. 한민족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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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5월, 신채호는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어 치안유지법 위반과 유가증권 위조 등의 혐의로 10년형의 언도를 받고 만주국 펑톄 성 다롄 부 뤼순에 있는 뤼순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1935년 그의 건강이 매우 악화되어 형무소 당국은 “보호자가 있으면 출감시키겠다”고 했습니다만, 그의 보증인이 친일파라는 이유로 신채호는 가석방을 거절하였습니다. 1936년 2월 18일 감옥 독방에서 뇌일혈로 쓰러졌으나 방치되었고, 사흘 뒤인 2월 21일 감방 안에서 혼자 있을 때에 사망하였습니다. 뇌일혈 및 동상 영양실조, 고문 후유증 등의 합병증이었습니다. 향년이 57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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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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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상하이에 살 때, 특히 윤봉길 의사의 거사가 있었던 홍커우 공원에 가보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15년 전의 방문이었지만 지금까지도 감동이 뭉클합니다.



그는 1930년,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丈夫出家生不還)"


이 유면한 글귀를 남기고 집을 떠나 중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지금부터 93년 전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의 훙커우 공원에서 열리는 일본 왕의 생일연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행사를 폭탄으로 공격한 위대한 거사가 지금도 훙커우 공원에 비석과 함께 생생하게 남겨져 있습니다.


훙커우공원에서의 폭탄 투척을 실행한 윤봉길은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 상하이 일본 거류민 단장 등을 처단하고, 총영사 무라이는 중상, 제3함대 사령관 중장은 실명되었고, 제9사단장 중장은 다리 절단 중상을 당했으며, 주 중국 일본 공사는 한쪽 다리를 잃어 절름발이가 되었습니다.



당시 중국의 국민당 지도자였던 장제스가 이 거사를 두고 남긴 말이 전해집니다.


'중국의 100만이 넘는 대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인 청년 윤봉길이가 해냈다'라고 할 정도로 윤봉길 의사를 극찬했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그 해 11월 18일 일본으로 호송되어 20일 오사카 위수 형무소에 수감, 가나자와에서 12월 19일 총살형으로 순국하셨습니다. 그도 조국의 자유, 민족의 자유를 위해 외치다 24세에 순국하신 것입니다.



민족의 자유와 한 국가의 자유는 스스로 강해질 때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외교력, 외교의 힘도 국가의 총체적인 강력한 힘의 바탕에서 가능합니다. 또다시 큰 시련의 시험대에 놓여 있는 대한민국의 2021년, 국가의 지도자들이 용기와 지혜를 갖고 헤쳐나가기를 바랍니다.



또 국민들은 바른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단결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자유란 가치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켜나가는 데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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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열사님



어려서부터 선생님으로부터 전해들은 유관순 누님의 희생은 가슴을 찌르고 무섭도록 울먹이게 하였습니다. 어떻게 극한, 극악한 고문을 견디시고 비참하게 죽음을 당하신 유관순 누님께 이 땅의 후예로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비폭력 만세운동으로 옥중에서도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17세 꽃다운 나이에 고문으로 돌아가신 유관순 열사님.. 깊이 깊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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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님



시인의 삶이 이렇게 별을 닮았을까요! 그분의 시와 그분의 시가 이렇게 감동이 될까요!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교과서에서 만나면서 시인이 되고픈 그 소년의 마음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영화 <윤동주>를 감상하면서 깊이 감격하였습니다.


그 내용을 블로그에 담아서 다시 한번 공유합니다.



https://blog.naver.com/seolhon/222622892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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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동주>감상 후, 윤동주 시인이여 이 시대를 바르게 보게 하소서!

영화 <동주>를 보면서 부끄러웠다. 그렇게 젊은 나이에 부끄러움을 알고 부끄럽지 않게 살았던 윤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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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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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선생님의 백범일지를 새벽까지 읽으면서 나라 사랑이 어떤 것인지 뜨겁게 알게 되었습니다.


상하이에 살면서 상하이임시정부를 두어번 다녀온 기억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분의 독립투쟁의 역사는 대한민국의 시작이었습니다. 백범 선생님으로 그 당신 모든 공산주의자들이 고개 숙였으면 좋았을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https://blog.naver.com/seolhon/222466836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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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선생님, 백범 일지를 읽고서, 역사 칼럼, 대한독립만세 8.15광복절! 감사합니다. 감사칼럼

백범 일지를 오디오북으로 새벽까지 청취하였다. 눈물이 젖지 않을 수 없었다. 김구 선생님의 반세기 독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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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 선생님



자신의 전 유산과 전 재산을 대성학교와 이상촌 건설을 위한 토지 매입 등에 헌신하고 평생 가난했던 안창호 선생님은 병원비를 제대로 댈 수 없었습니다.



일인 간수들에게서 "기다나이야츠!(더러운 자식)"라고 욕을 들을 만큼 온몸에 병이 든 것은 일제에 의한 대전 감옥 생활과 종로 유치장 생활 때문이었습니다.



대전 감옥 생활로 그의 숙환인 소화불량이 더욱 악화되었고, 폐와 간이 나빠졌다. 안창호의 임종시의 병명은 「간경화증 겸 만성기관지염 겸 위하수증」이었습니다.



상에서 안창호는 선우씨의 손을 잡고 무슨 말을 하려 했으나, 입 안이 마르고 혀가 잘 돌지 않아서 말을 못하였습니다. 몸이 극도로 수척하여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수염은 희고, 머리의 반은 누렇고 반은 희어 황백색이었습니다. 물을 숟가락에 떠서 입술에 축여드리니 비로소 말을 하였습니다.









"너무 슬퍼하지 마오. 부인과 아이들 평안하오? 이렇게 어려운 곳을 오니 참 반갑소. 내 홑이불을 들고 내 다리와 몸을 보오. 이렇게 되곤 사는 법이 없소. 나는 본래 심장병이 있는 중 대전 감옥에서 위까지 상한 몸으로 이번 다시 종로서 유치장에서 삼복 염천 좁은 방에 10여 명이 가득 누웠으니, 내 몸은 견딜 수가 없었소. 의사의 말이 나는 지금 일곱 가지 병이 생겼다고 하오. 지금 이가 상하고 치아가 빠졌고, 폐간이 상하고, 복막염, 피부염 모두 성한 곳이 없소. 그 종로서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소. 나는 지금 아무것도 먹지 못하니, 전신에 뼈만 남고 피가 말랐소. 나를 일으켜 안아 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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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 선생님과 그의 가족분들.. 고맙습니다.



3년전 충무로의 이회영 선생님의 일가 박물관에 다녀오면서 많이 울먹였습니다.


진정한 노블레스오블리주..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쳤습니다.


진정한 부자들의 나라 사랑의 실천을 배웁니다.


한 가족이 모두 독립운동을 위해서 뼈를 깎는 노력으로 살았습니다.


서울 최고의 부자였던 그분들 모두 독립운동 끝에 중국땅에서 굶주림으로 죽어갔습니다.


https://blog.naver.com/seolhon/223357085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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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독립만세운동 삼일운동 정신 신흥무관학교 노블레스 오블리주 이회영 선생님 고맙습니다

고종의 조카딸을 며느리로, 또 젊어서 청상과부가 된 누이를 불러 개가 시킨 분이 기억납니다. 오늘날 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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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아릴 수 없는 많은 무명의 열사님들 의사님들 - 이 분들의 죽음이 우리나라의 오늘을 열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오늘은 수많은 열사 의사들의 죽음으로 이루어낸 겁니다. 그분들이 밥을 굶고 죽음을 선택한 그런 애국정신이 우리의 대한민국을 만들었습니다.



오늘은 8월15일 광복절 80년 기념일입니다. 우늘의 대한민국이 바로선지 80년이 지났습니다.


조국의 광복을 위해 목숨을 던지신 열사님들 의사님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상기 내용들 중 상당부분은 백과사전에서 인용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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