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비법 연재>사람의 감정이 먼저다<말러 교향곡>

말러의 아다지에토 헤어질 결심의 감정선


새벽하늘이 푸르게 변하는 시간에 글을 쓰고 있다. 오늘 새벽은 말러의 아다지에토를 감상하고 있다.


이 새벽은 오로지 글을 쓰는 시간이지만, 그곳에 말러의 음악 현들이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음악을 창작하였을까? 그도 분명히 이 새벽을 만났을 것이다. 온전히 음악에 젖어 이 새벽을 담아내었을 거다.



인류는 이성의 힘을 오만하게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철학이 시작된 이성이 만물의 법칙이었던 시대를


감정의 시대로 바꾼 프리드리히 니체를 공경한다. 망치를 든 그의 철학 서적들이 감정을 뭉클하게 건드리는 문장들로 이루어진 것을 배운다.



살아가는 것은 감정의 연속이다. 그 감정을 어떻게 다스리는 것일지 그건 각자의 몫이다.


어떤 이는 울음을 쏟아내고 어떤 이는 울다가 폭삭 주저앉아 버릴 것이다.


어떤 이는 그 감정을 승화시키려고 한다. 나는 글을 통해서 나의 감정을 객관적으로 담아내고 싶다.



말러의 교향곡 5번 아다지에토는 그렇게 울 것 같지만 울음을 모두 흘려서는 아니 된다. 오히려 터뜨리지 않고 절제한다. 감정이 흥건하게 배어 나오지만 참고 억제하는 음악이다. 그런 감정의 표출은 온전히 온몸과 온 마음으로 흐느끼는 것이다. 흐느끼기에 쏟아버리지 않는다. 그 감정을 담아내고 그릇에 채울지언정 흘려버려서 버리지 않는다.



창작의 문학하는 사람에게 또 예술가에게 감정은 아름다운 소재다. 아니 예술 작품을 이성적으로 창작하는 것은 구상 기획일 것이다. 그 밑에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감정들이 깔려 있다. 그 감정들은 인간성이고 그 인간성은 소중하다. 더 소중한 것은 그 감정을 온전히 담아내는 예술가의 이성적인 억제력, 평정심이다. 예술가에게 감정은 창작의 시작이자 굴절의 소재가 된다.



나는 새벽에 감정을 쏟아붓는 작업을 한다. 글을 쓰는데 감정이 실리지 않으면 진심이 실릴 수 없다. 어떻게 차가운 이성으로만 글을 쏟아낼 수 있을까. 물론 차거운 이성의 철학이 필요한 글이 있다.



하지만 인간적인 감정이 예술가적인 감상이 먼저다. 이성보다 맑고 깨끗한 감정으로 글을 쓰고 싶다.


예술은 사람의 감정을 극단으로 표현하기 마련이다. 예술의 극적인 표현들이 그러하다.



물론 사람의 감정이 글쓰기의 시작을 알릴 수 있는 벨이 된다. 그 벨이 울리는 것을 어떻게 담아낼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그저 벨 소리 그대로 담아내면 너무 식상한 신파극이 될 것이요, 벨 소리에 사람의 목소리를 입힐 수 있으면 소리는 희로애락의 옷을 입게 된다. 글쓰기의 비법은 그 감정을 넘어서는 감동을 담아내는 작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휴대폰 벨 소리를 듣고 그 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대화를 시작하는 것과 같은 흐름이다.



새벽에 음악을 감상하면서 나의 감정을 들여다본다. 그 감정을 보다 객관적으로 담아내는 것이 글이다.


글쓰기는 비록 화자의 감정이 폭발할지라도 한걸음 뒤에서 그 화자의 감정을 적어낼 수 있는 속기사가 되어야 한다. 감정이 없이 무모하게 글쓰기를 할 수 없으나, 감정을 온전하게 담아내기 위한 객관적인 능력을 키워가야 하는 글쓰기를 스스로 배우게 된다.



사람의 감정을 글쓰기에 담아내는 것이 첫번째요, 그 감정을 헤어질 결심으로 적어내는 글쓰기를 하련다.


그보다 더 아름다운 글쓰기가 없을 것 같다. 울고 싶으나 참을 만큼 감정을 추스르는 글쓰기... 그 지점에 이르고 싶다.



이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저 두 남녀의 눈빛에 흘러넘칠 것 같은 눈물을 보라.


그들은 그 끓어오르는 눈물을 참아내고 있다. 의심의 현실과 믿고 싶은 사랑의 괴리에서 눈물을 삼키고 헤어진다. 말러 교향곡 5번의 아다지에토 멜로디가 너무도 애잔하게 이들의 감정선을 표현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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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러 교향곡 5번의 아다지에토를 들으면서 글쓰기를 해보자! 그러면 분명히 끓어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감정의 골곡을 만나게 된다. 그러한 감성의 글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렇지만 더 성숙한 작가라면 <아다지에토>를 뛰어넘는 활자의 완성을 지향하게 된다.


영혼이 고양되는 글쓰기는 감정을 밑바탕에 두더라고 이성의 깔때기로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


https://youtu.be/FjWtGE2cSew?si=dYlheqL8zaEOyyLp






베트남에서 살고 있는 호프맨작가, 베트남 북카페에서 저의 책 <나는 누구인가 > 시집을 읽고 있습니다.. 35년 만에 첫 시집을 세상에 내어놓습니다.. 인문학적, 예술적인 성찰을 시로 옮겨보았습니다.


함께 영상 공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웃님 글벗님들...


https://m.blog.naver.com/seolhon/clip/11996391



어제 베트남 호찌민의 일요일 한때를 영상으로 옮겨 보았습니다.


10월 25일 서울에서 저의 북토크를 열심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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