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것인가? 독서에서 얻어내었다.
나폴레옹 (Napoleon I, 1769~1821)
나폴레옹 1세 하면 백마를 타고 알프스 산을 넘으면서 '불가능은 없다'라고 외치는 영웅의 이미지만 떠올리시나요? 그것은 이탈리아까지지 정복한, 그의 인생에서 분명히 승리의 순간이었지요. 나폴레옹의 이미지들은 그가 정치가로서 탁월한 수완으로 이미지메이킹(조작) 한 것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영웅이 되기 위해서 노력한 점들은, 독서광이었던 나폴레옹의 모습이 더욱 진실하게 보입니다.
독서하는 나폴레옹
그의 일생을 요약하면서 그의 죽음을 그려봅니다.
프랑스의 군인·황제. 코르시카 섬의 하급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고 이후 프랑스의 군인이 되어 1799년에 500인회를 해산시키고 제1통령이 되었습니다. 이후 황제에 즉위하여 제1 제정을 수립하고 유럽 대륙을 정복했지요. 그러나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영국 해군에 격파당하고 러시아 원정에도 실패하여 퇴위했습니다. 이후 엘바 섬에 유배되었다가 탈출했으나, 이른바 백일천하를 실현하고 다시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되었으며 그곳에서 사망했습니다. 나폴레옹 황제, 파란만장한 영욕의 영웅의 죽음은 쓸쓸하고 애잔합니다. 그가 죽인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 또한 죽음을 넘어서지 못한 한 연약한 인간임을 보여줍니다.
나폴레옹은 지금까지도 프랑스인들의 황제로 손꼽히고, 철학자 헤겔에 의하면 “말을 탄 시대의 정신”, “이 시대 최고의 영웅”으로 평가받으며, 한때는 가장 강력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나폴레옹도 이겨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의사들이었다. 나폴레옹은 영국령의 작은 섬 세인트헬레나에서 유형지 생활을 할 때 “의학이란 매우 불확실한 규칙들의 집합”이며 “그 효능이 유용함보다 해로움이 많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주치의에게 치료를 받기보다 염화암모늄, 황 그리고 발포 고약 등을 사용하곤 했다. 전쟁 중 나폴레옹은 포로가 되었고, 이때 영국군의 의사는 나폴레옹이 앓고 있는 간 질환 치료제로 기나나무의 속껍질을 말린 기나피나
구토제, 관장제를 사용했다.
“이러다 예정된 시간보다 일찍 죽겠어.”
임종 며칠 전, 51세의 나폴레옹은 무력하게 속삭였다.
“나는 영국의 과두 정치와 그들이 고용한 살인자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거야.”
그는 세인트헬레나 섬의 총독인 허드슨 로웨 경을 사형집행인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지난 2세기 동안 주장되어 온 것처럼 최소한 로웨 경은 나폴레옹을 무취, 무미한 비소로 음독시키지는 않았다. 이 위대한 프랑스인은 (하지만 키는 168센티미터로 작은) 열대성 전염병인 아메바 적리(적리 아메바의 감염에 의하여 일어나는 이질 -옮긴이)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이 전염병의 치료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 <죽음이 물었다, 어떻게 살 거냐고>, 한스 할터
프랑스에서 수 세기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황제로 추앙받는 나폴레옹도 죽음 앞에서 한낱 힘없는 인간의 모습이었습니다. 병 앞에서 위대한 영웅이라 불리는 자들도 굴복당하고 맙니다.
죽음이 물어옵니다. 어떻게 살 거냐고 물어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실 겁니까?
많은 사람들이 신앙에 의존하여 죽음 너머에서 희망을 보고자 합니다.
우리에게는 죽음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더 큰 답변을 주게 된다고 생각됩니다.
나폴레옹도 쓸쓸하게 죽었지만 덧없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남긴 유산들이 무엇인지 적어보게 됩니다.
공자도 대답할 수 없었던 죽음 너머의 세상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 모두 살아있는 동안 정말 열심히 살아서 무언가 세상에 보람 있는 업을 쌓고 싶습니다.
그 업은 세상에 알려지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요, 자신에게도 세상에도 도움이 되는 봉사이겠습니다.
영웅은 영웅의 업적이 있을 테고, 위인은 위인의 업적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에게 업적은 무엇일까요?
여러분의 삶의 목표와 비전은 무엇입니까?
이러한 질문들에 답을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질문에 나폴레옹의 사진들을 만났습니다. 그는 독서광이었습니다. 젊어서부터 그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답변들을 책을 통해서 얻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독서광으로 유명하며, 하루에 6시간 이상 독서를 할 정도로 책을 좋아했습니다. 그는 전쟁터에도 항상 책을 가지고 다니며 이동 중에도 독서를 했습니다. 그의 독서 범위는 역사, 정치, 철학, 과학, 문학 등 매우 다양했습니다.
그의 독서광 사례들입니다.
방대한 서재: 나폴레옹은 4000권 이상의 책을 보유한 방대한 서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독서 시간: 그는 하루에 6시간 이상 독서를 했으며, 심지어 전쟁터에도 책을 가지고 다니며 이동 중에도 독서를 했습니다.
다양한 분야의 독서: 그는 역사, 정치, 철학, 과학, 문학 등 매우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었습니다.
독서를 통한 학습: 그는 독서를 통해 전략, 정치, 리더십 등을 배우고 자신의 지식을 쌓았습니다.
책에 대한 애착: 그는 책을 매우 소중하게 여겼으며, 책에 직접 메모를 하거나 밑줄을 긋기도 했습니다.
나폴레옹의 독서의 열정은 그의 수사역량.. 대중설득의 역량과 정치감각으로도 이어졌습니다.
전쟁터에서도 그의 독서에 대한 열정은 기록적입니다. 나폴레옹은 이집트 원정 당시에도 300권 이상의 책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때 그가 데려간 학자들, 과학자들의 수가 무려 170명에 다다른 규모였다는 것이 특이합니다. 그곳에서 나폴레옹은 이렇게 감동적인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수 천년의 피라미드가 제군들을 바라보고 있다."
-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서
그는 확실히 독서광으로서 인문학적인 소양이 풍부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집트 원정은 점령군으로서 성공적이었다고 볼 수 없었습니다. 다만, 그의 정치적 계산은 탁월하였습니다. 프랑스로 3/1로 줄어든 원정군을 복귀시킬 때, 그는 대단한 수확을 얻은 것이 되었습니다. 이집트 학문이 시작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로제타 스톤'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된 것이 나폴레옹의 인문학적인 최대 업적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가 좋아하는 책들은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등이었기에 그는 영웅의 꿈을 키웠고 지혜로운 군주가 되기를 바랐던 겁니다. 독서를 통한 영향으로 그는 독서를 통해 얻은 지식을 활용하는데 탁월하였습니다. 그는 그렇게 뛰어난 전략과 리더십을 발휘했습니다.
그의 유산으로서 나폴레옹 법전은 세계 3대 법전으로 프랑스 시민정신을 담았습니다. 비록 그는 영웅으로 세상을 점령하려고 하였던 어리석음의 과욕을 부렸습니다. 하지만, 그가 독서를 통해서 얻는 인문학적인 인간 삶의 소중한 가치는 그의 유산이 되었습니다. 그는 책을 읽었기에 그의 유산을 남길 수 있었고 그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던 겁니다.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에서 첫 번째 우리 모두 필멸의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는 겁니다.
그러한 인식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 생각을 곰곰이 하게 됩니다.
우리의 짧은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어떻게 그 소중함을 채워가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점령자 정복 군주 나폴레옹의 유산은 그의 인문학적인 독서 역량에서 나온 것이 더 크다고 봅니다.
나폴레옹이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것은 그가 책을 읽고 있는 모습니다.
그는 책을 통해서 그의 짧은 생애를 채워가야 하는 방향을 찾았습니다.
<보너스 정보>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군이 발견한 로제타 스톤은 기원전 196년에 만들어졌습니다.
백과사전에서 로제타 스톤의 발견과 해석에 대한 이야기는 흥미롭습니다.
재질은 화강섬록암(Granodiorite)이며, 크기 측정값은 1,123 mm × 757 mm × 284 mm 으로 나온다.
로제타 석의 가장 큰 가치는 수천 년간 읽는 방법이 잊혔던 이집트 상형문자를 읽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1799년 7월 15일 지중해 해안에 위치한 이집트 도시 라쉬드에서 진지를 구축 중이던 프랑스군의 피에르 부샤르 육군 중위가 발견했다. 그는 이걸 요새 주춧돌로 쓸 생각으로 막 다루었는데, 나폴레옹의 원정군과 함께 수행한 프랑스의 고고학자들이 보고 기겁하며 받아 모셔뒀다. 학자들은 로제타 석을 프랑스로 가져가려 했다. 하지만 1802년 이집트 원정이 실패로 끝나고 나폴레옹 홀로 본국으로 탈출한 가운데, 이집트에 고립된 프랑스군을 본국으로 무사히 귀환시켜주는 조건으로 영국군이 손에 넣어서 현재까지도 진품은 대영박물관에서 전시 중이다.
이렇게 로제타 석은 영국의 손에 들어갔지만, 처음 발견한 프랑스에서 가치를 인식하고 탁본 및 복사본을 미리 만들었다. 그 덕분에 아래에 언급할 프랑스 고고학자 샹폴리옹도 로제타 석의 내용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었다.
1822년부터 1824년까지 2년에 걸쳐 끈질기게 연구한 끝에, 샹폴리옹은 놀라운 직관력을 발휘하여 이집트 신성문자에서 특정 문자들을 띠 모양으로 두른 테두리 속 문자들은 이름이리라 가정했다.
그리고 그 문자들은 뜻글자가 아니라 각각 하나하나의 분절음을 나타내는 소리글자이리라 발상의 전환을 시도했다. 상형문자는 그 특성상 (마치 초기의 한자처럼) 그림 자체에 의미가 있는 뜻글자라고 생각했음을 감안하면 꽤나 혁명적인 발상. 이 가정은 순조롭게 맞아떨어졌고, 샹폴리옹은 아래와 같은 대응표를 만들어 가며 마침내 고대 이집트 문자의 음가를 알아내어 이집트어 해독에 성공했다. 그 이전에 상형문자를 연구하던 중세 이슬람 학자들은 이런 생각은 하지 못한 채 그냥 상형문자니까 맨땅에 헤딩하듯 비슷하게 생긴 형상들을 닥치는 대로 대입하여 해석하려다가 막혀서 포기했다. 중세 이슬람 시절에는 로제타석이 발견되기 전이라서 이슬람 학자들은 그냥 맨땅에 헤딩하듯 연구하는 수밖에 없었지만...
이집트학은 그렇게 나폴레옹의 군대와 학자들에게 의해서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이집트의 인류사적, 인문학적인 가치를 몰랐다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나지 못했을 겁니다.
#책과강연백일백장 #나폴레옹1세황제 #독서광나폴레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