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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프맨작가 May 11. 2024

100-69, 부처님 오신날! 경이로운 손이 많은 이유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응원하라! 


초등학교 이전 어려서부터 불심이 깊으신 할머니의 품에서 자랐습니다.


할머니의 몸에서도 옷에서도 늘 향내가 났고요, 


그것이 할머니의 불심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습니다. 



할머니는 늘 "관세음보살"을 음송하였고요. 


그 음송의 반복 후렴에서, 부처님 말씀에서 잠에 들었습니다. 


그 꿈에 부처님, 아니 관세음보살님의 여러 개 손이 있는 것도 만났을지도 모릅니다. 


할머니에게 안기면 늘 아픈 배로 나았고, 아픈 머리도 씻은 듯 나았으니까요. 


불심이 깊으셨던 할머니의 손에 관세움보살님의 손이 환생하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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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음보살 상에는 여러 형태가 있지만, 특히 손이 많은 것이 인상 깊습니다. 


그 많은 손들은 각각, 



다양성과 힘의 상징입니다. 



 손이 여러 개인 조각상은 종종 신의 다양한 측면을 나타내며, 이는 신의 보유한 힘과 능력의 다양성을 상징합니다. 각 손은 다른 동작이나 속성을 나타낼 수 있으며, 이는 그 신의 역할과 특성에 따라 달라집니다.


다양한 능력: 여러 손은 그 신이 다양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각 손은 특정한 역할을 상징하며, 그것은 그 신의 다양한 힘과 능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도구와 무기가 됩니다


많은 손에는 종종 다양한 도구나 무기가 들려 있습니다. 이들은 각각 그 신의 특정한 능력이나 속성을 상징합니다. 예를 들어, 파르바티는 종종 꽃을 들고 있어 사랑과 아름다움을 상징하며, 쉬바는 종종 트리슈라(삼지창)를 들고 있어 파괴와 변화를 상징합니다.




제어와 지혜의 상징이 됩니다.



손이 많은 신은 종종 인생의 다양한 측면을 제어하고 지혜를 상징합니다. 이러한 신은 종종 우주적인 비전과 지혜를 갖추고 있으며, 모든 것을 통제하거나 이해하는 데 필요한 능력을 상징합니다.



세상 모두에게 닿는 자비와 보살핌이 됩니다.



일부 불교의 보살(菩薩)은 수많은 손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모든 존재에 대한 자비와 보살핌을 상징합니다. 이러한 보살은 모든 존재를 돌보고 구제하려는 의지를 나타냅니다.


보호와 축복: 여러 손은 종종 보호와 축복을 나타내는 포즈로 묘사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신은 그들의 신도들에게 보호와 축복을 주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그것은 주로 무한한 연민, 능력, 그리고 보살이나 부처가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수행할 수 있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살이나 부처가 여러 손을 가지고 있음은 그들이 세상의 모든 고통을 동시에 완화할 수 있음을 의미하며, 이것은 그들의 무한한 자비와 연민을 상징합니다. 또한, 각 손에 들고 있는 다양한 물체들은 보살이나 부처의 특정한 능력이나 가르침을 나타냅니다.



불교와 달리, 힌두교적인 특성도 있습니다.


시간의 흐름과 연속성: 힌두교에서는 일부 신이 시간의 흐름과 연속성을 나타내기 위해 여러 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은 과거, 현재 및 미래를 동시에 관찰하고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나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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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관음에서 나온 관음이라는 뜻은 천 개의 눈과 천 개의 손을 갖고 있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과연 중생들을 구하기 위해서 천 개의 눈을 갖고 세상 끝까지 우주 끝까지 그 자비가 미칠 수 있는 관음보살은 대단한 존재입니다. 물론 불교적인 상징이지만, 우주적인 존재도 따르지 못하는 그 신을 믿고 싶습니다. 저 많은 손마다 지혜의 눈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세상 모두에게 비추지 않는 자비와 연민은 없다는 의미랍니다.  










잠시 사람의 삶에 비추어 생각해 봅니다. 


사람도 멀티 플레이어의 삶을 살고 있지만, 한 가지라도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고 갈 수 있는 인생은 성공한 것이리라 생각됩니다. 그렇게 생애 주기 역할을 해내면서 자신의 역할에 만족할 수 있도록 바라고 노력하는 것이 아름다운 삶이겠지요.  




부모로서 자식을 훌륭하게 성장시키는 것도 하나의 역할이고, 


자식으로서 부모로서 성장하는 것도, 부모가 되어 보는 것도 하나의 역할일 겁니다. 




부모로서 자식에게 더 해주고 싶은 것이 당연하겠지요. 


내리사랑은 늘 그렇게 더 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입니다. 


자식들이 바라는 것을 모두 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또 스스로 바라는 것을 모두 이룰 수도 없는 것이 아쉬운 우리의 삶이겠지요. 


하지만, 현실은 끊어내지 못하면 안 되는 자신의 한계가 있습니다. 


부모로서도 자식이 독립하여 스스로 잘 살아내기를 바랄 뿐입니다. 


부모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이고, 


다만 늙은 부모가 되어서 자식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죽기 전에 사람은 자신의 삶이 어떠했는지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보통 황혼에 이르러 자신의 삶을 찾으려고 한다면 너무 늦지요. 


그렇기에 이 세상에서 태어난 이상, '나의 진정한 역할'을 미리 깨닫기를 바라게 됩니다. 


그것이 인생의 소명의식이고 자신의 진정한 삶에 대한 욕망이고 갈망입니다. 


그것을 부처님께서 지적하신 것이겠지요. 


보통 사람, 평범한 사람도 자신의 삶에 대한 선한 소명의식 한 가지씩을 이루고 가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거창한 것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부처님과 같은 성인, 아니 그 이상의 존재에게는 지구와 인류 역사를 뒤덮는 성인의 소명이 있고, 비범하지 않은 보통 사람에게도 작은 소명이 있습니다. 그러한 작은 소명을 이루기 위한 욕망은 허락되겠지요? 




그렇게 자신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 바라는 과정이 노력하는 길이겠습니다.


스스로 노력하여도 미흡하고 목표한 것에 닿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그렇기에 부족한 것을 늘 바라고 원하고 욕망하는 것이 우리네 삶이겠지요. 


과욕이 아니라 세상에 좋은 꿈을 꾸는 것은 사람으로서 태어난 이상 당연한 바람이겠지요. 




경이로운 손이 여러 개인 부처님 상을 보면서 


인간의 욕망 - 바람과 이를 들어주시는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를 생각하게 됩니다. 


부처님은 아마도 사람들이 꿈을 꾸면서 바라는 삶을 든든하게 지원해 주시려는 존재일 겁니다. 




인류에게 일생 동안 바라게 되는 꿈을 주신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합니다. 


아인슈타인은 말하였습니다. 



"불교는 미래에 가장 적합한 종교이다."



"불교는 미래의 우주 종교에서 기대되는 것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신을 초월하고 교의와 신학을 피하며,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모두 포괄하고,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의미 있는 통합으로서 모든 것의 경험으로부터 열망하는 종교적인 감각에 기초합니다."
















부처님 오신날을 맞이하여..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조금이라도 나아지는 깨달음의 존재로 성장하기 위해서 여러 갈래의 노력을 다하는 우리들의 삶에  스스로 축복하게 된답니다." 마치 여러개의 손으로 수많은 역할을 해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스스로 응원"하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기대지 말고 스스로 칭찬하고 응원하라고 가르치신 것 같습니다. 그런 작은 깨달음도 보통 사람들에게 살아갈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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