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프맨작가 Apr 24. 2024

100-53, 인류의 탄생, 두 눈에 감사합니다.

감사 시리즈 영화 <버드박스> 후기 포함 


우리 모두 저녁에 퇴근할 때는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극도로 피로하다.


하루 종일 눈을 혹사시키고, 피곤하지만 또 나만의 글을 세상에 쓴다. 책도 읽고, 뉴스도 보고, 영상도 감상한다. 눈에 그려진 축 처진 그늘에서 현실은 피곤함에 지쳐버린다. 다행히 우리에게 주어진 밤은 모든 세포를 잠을 자게 하고 눈을 쉬게 한다. 그렇게 재활의 수면이 두 눈에게 정말 고맙다. 



노안이라고 판정받은 것이 벌써 10년이 흘러간다. 눈의 피로가 서류와 컴퓨터 일을 하면서 생활하는데 참으로 힘겹게 되지만, 또 돋보기와 인공눈물 안약에 익숙해져가는 것이 사람은 적응하는 생명체인 게 분명하다. 










눈이 피로해지는 원인들을 상징적으로 몇 가지 열거해 본다. 



1) 눈을 뗄 수 없다. : 두 가지의 상반된 결과를 낳는 경우의 수가 있다. 



어떤 일이고 몰두하고 집중하면 눈을 뗄 수가 없게 된다. 그만큼 눈을 통해 온정신이 집중되는 그 순간들에 우리의 뇌는 최고조의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좋아하는 여인을 보거나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볼 때도 눈을 뗄 수 없게 된다. 예술작품에 빠져서 몰두하여 감상하거나, 마음을 울리는 책을 읽을 때도 그러하다.  그 순간은 가슴까지 뛰게 되지만, 눈의 피로는 더할나위 없다. 




2) 눈에 가시다 : 눈에 아픈 가시 같은 존재가 있다. 



그런 불편한 존재는 우리 눈을 아프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 가슴을 아프게 한다.


슬프고 애처로운 존재들을 마주하면 눈은 눈물로 화답한다.


아픈 부위를 씻겨내는 눈물이 고마울 뿐이다. 



반대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우리 자식들이 있다. 


자식들이 때때로 우리를 아프게 하지만, 자식은 우리의 기쁨이다. 




3) 눈이 똥그래졌다.



놀라거나 경악할 때도 눈이 커진다. 감동하거나 격해질 때도 눈이 똥그래진다. 그만큼 우리의 눈은 감정을 담아내고 표현하는 우리 마음의 창문이다. 하지만, 눈을 너무 크게 뜨고 오래 유지하려 하면 눈이 쉽게 피로해진다. 우리 눈에 감정이 너무 실리면 피곤이 누적되게 된다. 눈에 너무 힘을 주지 않고 편안하게 바라보면 그 피로가 쌓이는 것이 누그러지게 된다.  




4) 눈물을 흘리는 되는 경우 - 울 수 있는 인간은 인간적이다 



너무 울면 눈이 아프고 시리다. 반대로 눈물을 쏟고 나면 눈이 시원해지는 경우도 있다. 


사람의 눈이 가장 큰 감동을 주는 격한 반응은 눈물을 쏟아내는 것이다. 눈덩이가 뜨거워지고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이 뺨을 타고 얼굴 전체에 흘러내리면 우리 눈은 정화되고 정갈해진다. 그렇게 눈물은 스스로 안구 정화를 넘어서서 이를 지켜보는 주변에도 우리 눈물로 표현되는 극적인 드라마를 보여주는 순간을 남긴다. 



어른이 되면 눈물을 참아내고 가장이 되면 더욱 눈물 쏟는 것을 억지로 견디게 된다. 


나이들고 어른이 되어서 메마른 안구건조증이 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생체적으로도 안구건조증이 심해져 가는 것을 가끔씩 인공적이라도 눈물을 흘러주는 것이 도움이 되는 것이 사람의 삶인가 보다. 눈물로 울지 않으면, 눈은 메마른 가뭄에 신체적으로도 견딜 수 없게 된다. 




나의 두 눈이 가장 닮고 싶은 것은 하늘이고 가장 편안해지는 순간도 하늘을 만날 때이다. 


헤르만 헤세는 그의 작품에서 "나보다 구름을 더 사랑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봐"라고 썼고, 


가장 개인적인 작품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라는 것을 증명한 헤세의 작품들은 모두 그의 경험을 담고 있다. 


그의 눈에서 바라보는 구름은 그의 영혼의 자유로운 방랑이었을 것이다. 




5) 눈의 피로를 치료하는 법 : 하늘을 담은 눈이 될 수는 없을까? 



우리는 너무 복잡한 인공물에 집착하면서 살아간다. 자연이 치료해주는 것을 잊어버린다. 


나의 두 눈이 닮고 싶은 하늘과 구름이 있어서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사람이 딛고 있는 땅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아야 한다.


본래 사람인人자와 하늘 천天자를 보면 두 다리로 땅에 서있는 사람은 하늘을 이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늘의 천손으로 정체성을 지켜온 우리 민족이니까 더욱 하늘님의 아들, 딸 들인 우리 민족은 하늘을 닮으려고 하였다. 그래서일까? 하늘을 보면 마음이 고향에 돌아간 것 같기도 하고 고향을 느끼게도 된다. 




하늘에는 하얀 구름이 흐르고 햇살이 비칠 때도 있고, 먹구름이 커지면서 비를 내릴 때도 있다. 


맑은 하늘은 우리에게 두 눈동자를 편안하게 안식을 제공하는 따스함의 존재다. 


두 눈이 땅에서 초록의 식물들에게 편안해지는 만큼, 하늘의 푸른빛에서 위로를 받게 된다. 


우리 눈의 피로는 가셔지고 눈의 시력이 좋고 나쁜 것이 모두 공평하게 평등해진다. 


하늘을 보고 하늘을 느끼고 그 가르침을 내 두 눈에 담고 싶다. 


하늘을 바라볼 수 있어서 두 눈에 감사한다. 하늘을 담은 눈은 평화로와진다. 




아직 젊은데 벌써 노안이란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5년여 전부터 눈이 아파서 고생이다. 특히 컴퓨터, 휴대폰의 스크린과 두 눈의 사투 같은 눈싸움에 현대인의 눈은 피로하고 지친다. 하지만, 눈약을 넣고, 눈에 마사지를 하면서도 새벽부터 글을 쓰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눈에 기대어 세상을 바라본다. 눈물을 흘리면서 세상을 바라본다. 그래도 세상은 아름다우니까...




몇년 전, 눈에 대한 충격적인 영화를 감상하였다. 현존 제2의 전성기인 최고의 여배우 중 한 배우, 산드라 블록의 영화, '버드 박스'(2018년)'이었다. 어쩌면 영화를 즐기지 않거나, 이런 공포, 스릴러류의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기분 나뿐 스토리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자살을 하게 하는 지구 종말론적인 괴물 또는 악령들이 나오는 스토리 때문이다. 하지만, 필자의 관점은 눈에 대하서만 집중하기로 하였다. 왜 눈인가? 귀도, 코도, 목구멍도, 팔다리도 아닌 두 눈이 이 영화의 주인공이었다. 











"버드박스, 이 영화는 우리 눈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주는 ,


아름다운 세상을 


바라보고 싶은 눈에 대한


감동적인 가르침이다. "


호프맨 칼럼 작가 평가




인류는 두 눈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진화를 거듭해왔다. 동물들이 볼 수 없는 상상의 세계까지 우리의 눈이 마음을 비추어왔기 때문이다. 눈이 뇌에 연결되는 뇌의 한 부분이기에 사람은 물질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상상 너머의 세상까지 확장할 수 있었다.  



1. 세상을 볼 수 있다. 



세상을 볼 수 있는 것은 눈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비뚤어지게 볼 것인지, 아름답게 볼 것인지도 모두 눈에 달린 것이다. 눈은 곧 우리의 머리와 마음이 연결되어 있는 스크린이요, 창문이다. 눈과 같은 창문이 있어야 세상과 통할 수 있다. 창문이 있어야 세상이 우리 안에도 들어올 수 있다. 눈이라는 스크린이 있어야 데이터를 입력하고 출력도 해낼 수 있다. 스크린이 있어야 세상을 볼 수 있는 것이다. 




2. 사랑하는 사람을 볼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우리 가족들, 친구들을, 부모님들을 볼 수 없다면, 세상이 얼마나 적막할까? 또한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얼마나 외로울까? 두 눈이 있어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한다는 것을 전달할 수 있다. 




3. 영화를 볼 수 있다. - 스토리를 눈으로 본다.



이 시대는 스토리의 시대요, 영상물의 시대다. 좋아하는 드라마, 영화를 볼 수 있는 것은 눈이 있기 때문이다. 스토리에 빠져들 수 있고, 그 스토리의 세상과 만날 수 있는 것이 모두 두 눈 때문이다. 빼어난 지식과 감성을 자극하는 강연자가 스토리를 엮어낼 때, 우리의 눈은 번뜩 뜨이게 된다. 우리의 눈은 영상물에서 강연자의 몸짓에서 그들의 스토리에서 새롭게 재탄생하고 스스로 더 깊어진 삶의 스토리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된다. 




4. 미술품, 멋진 사진을 볼 수 있다.



2세기 전에는 시각예술품으로서 미술품, 조각품만이 우리 눈의 최고의 호강을, 복을 가져다주었다. 미술품을 바라보는 것으로 그 안에 모든 스토리와 철학과 미학을 가져올 수 있었다. 180여 년 전에 사진 이론이 세상에 탄생된 이후로 이제는 지구촌 모든 사람들이 스마트폰의 사진 세상을 통해 세상을 본다. 미술품과 같은 스토리와 생활 속 이야기들, 간직하고 싶은 순간을 쉽게 가까이서 품을 수 있게 되었다. 눈으로 즐기는 그림들, 사진들이 SNS 세상에 넘치고 클릭 하나로 예술작품 같은 사진가들의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5. 책을 읽을 수 있다. 



책을 읽을 수 있는 눈이 너무 소중하다. 눈이 침침하고 눈물이 젖어들면, 안경을 쓴다. 노안 시력과 심한 안구건조증이라서 안경도 안먹히면, 돋보기를 쓴다. 그래도 책을 놓을 수는 없다. 활자,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들은 적어도 세상을 풍부하게 바라볼 수 있다. 편협하지 않고, 좁은 시야가 되지 않는다. 눈이 보이는 한, 읽고 쓰고, 글과 책, 가까이서 살아야 한다. 




6. 눈은 마음이다.



눈은 곧 우리 마음이다. 눈에 보이는 것에 따라, 우리 마음도 행복하게, 때로는 불행하게 바뀐다. 


눈은 감성을 자극한다. 젊어서 잘 보지 않던 꽃들이 중년이 지나면서 왜 이리 예쁘게 마음을 자극하는지 꽃사랑 남자가 되어 간다. 눈이 마음이고 마음이 꽃에 꽂히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그대로 따를 수밖에, 눈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들이다.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은 그러한 눈을 갖고 다닌다고 한다. 눈이 비친 것이 아름답다면, 그 사람의 마음도 그럴 것이다. 




7. 눈은 생각이다.



눈은 지성, 이성의 논리적 사고, 인문학적인 사고, 수리적인 사고, 상상력과 창조력의 사고를 만들어낸다. 


눈을 투영하여 세상을 모든 공간과 시간을, 생각의 흐름을 통찰할 수 있다. 그 생각들이 흩어지면, 눈을 부릅뜨면 다시 잡아올 수도 있다. 일하는 사무공간에서 눈을 크게 뜨고 서류에 집중하고 업무계획을 세우고 분석하는 것 모두 눈으로부터 시작된다. 눈에 비친 생각들, 눈에 통과되는 생각들이 우리의 영혼으로 몸으로 소화되고 다시 재탄생되는 것이다. 생각들이 눈 안에 들어오는 것이고, 눈은 생각들을 만들어내는 통로다. 눈이 뇌의 한 부분으로 연결되어 모든 논리적, 이성적 생각들을 작동시키는 것이 전혀 놀라운 것이 아니다. 




8. 창조는 눈에서부터 생긴다. 



창조는 언제나 따로 분리해서 말하고 싶다. 나름 창조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과 꿈이 있는 사람들에게 똑같을 것이다. 모든 창조력이 생기는 것은 태초부터 눈이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있고 그것을 표현하고 싶은 것이 창조력이다. 상상이 펼쳐지는 모든 것을 눈으로 보고 싶어서 창조하는 것이 인간의 능력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새로운 것을 창조할 때, 그의 밑그림들은 그의 창조의 시작이었다. 밑그림들이 그의 눈을 통해 보이는 것을 기록하고 그러한 블루 프린트가 세상에 없던 것을 만들어낸다. 창조의 시작은 눈으로부터라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9. 가까이 볼 수도 있고 멀리 볼 수도 있다.



눈은 가까이 바라볼 수도, 멀리 볼 수도 있다. 원근을 조절하는 것이 눈의 능력이다. 세상을 나무만 볼 것인지, 숲을 볼 것인지, 아니면 산을 볼 것인지도 눈의 인지 능력이고 통제 능력이다. 바로 앞에 사람의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보는 것도, 며칠 뒤에 전혀 다른 모습을 찾아내는 것도 눈이다. 뉴스를 보고 국내 뉴스에 국한해서 보는 것도, 해외 국제뉴스,  화성에서 사람의 눈 대신 일을 하는 탐사 로버의 감격적인 우주쇼를 볼 수 있는 것도 눈의 능력이다. 




영화 버드 박스에서 역설적으로 소중한 눈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본다. 



이 영화에서 박스 안에 갇힌 새들이 보지도 않고 악령/괴물/에일리언을 볼 수 있다는 메시지다. 하늘을 멀리 날 수 있는 새가 박스에 갇혀 있는데도 괴물을 볼 수 있고 사람들에게 알려줄 수 있다면 이는 천상의 메시지인가 보다. 



영화 <버드박스>의 결말이 충격적이고 신선하다. 


낙원과 같은 학교에 다다르는 주인공은 그곳이 시각장애인들의 학교였던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이 낙원의 문을 열고 정상인들에게 학교를 개방하였다. 시각장애인은 세상을 볼 수 없었기에 나쁜 것들을 보고 유혹 받거나, 정신적으로 어지러워질 상황이 아니었다. 오히려 눈에 담는 나쁜 것들의 유혹으로 잘못된 상상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정상인들에게 깨우침을 주는 것이다. 




이들을 인도해 준 새들이 새장, 박스에서 해방되어 높은 천장으로 날아간다. 비로소 주인공들은 더 이상 안대를 가리지 않아도 지상의 마지막 생존지에서 눈을 뜨고 바라본다. 그곳의 사람들은 행복하다. 더 이상 안대를 가려 세상을 보지 못하는 처참한 상황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두 아이들에게 세상이 참 살만한 것이고 새들이 하늘을 날아다니면서 지저귀는 아름다운 것임을 두 눈이 증명해 준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지적인 것만 두 눈에 채워넣고 싶다. 인류의 다음 세상에 유산으로 넘겨주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100-35, 뜨거운 22대 국회의원 총선 선거철 한국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