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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산 Oct 07. 2018

때 이른 이별, 낯선 그리움

겪어봐야 알 수 있고 그제서야 느끼고 깨닫게 되는 것.

머리의 추측과 상상만으로는 

가슴에서 일어나는 해일과 몰아치는 폭풍을 헤아리기 어려운 

이별과 그리움이 그렇다.  

  

윤이의 불치병은 기정사실이었고 다가올 이별은 예정된 일이었다.

병과 간병 그 고단한 하루하루는 어쩌면 우리의 아름답고 후회 없는 

이별을 위한 전주곡이었는지 모른다.    


예고된 긴 이별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진심을 다해 사랑을 주고받는 것뿐이었다.


책임감과 현실적인 염려가 온전한 사랑을 주지 못할 피치 못할 이유라도 되는 것처럼 여태껏 나는 늘 성마른

조급함으로 윤이를 몰아세웠고 불신했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정상이 될 수 없는 허술하고 부족한 몸으로는 세상에서 사람 노릇 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훈계와 잔소리로 사랑을 대신했으며 나름 최선을 다해 이룬 성취에도 칭찬은 커녕 더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질책 같은 격려만 쏟아내곤 했다.

윤이가 가야 할 길은 멀었고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은 차고 넘쳤으니까.

내 기준의 외적이고 형식적 바로 세움에 전념하느라 그의 여린 내면과 착한 심성 그리고 존재 자체가 지닌 열정과 능력과 온전함을 송두리째 잊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같은 잘못을 되풀이 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 우리에겐 그리 긴 시간이 남아있지 않았다.

참회하는 심정으로 온 마음을 다해 윤이에게 전폭적인 지지와 사랑을 쏟아 주기로 했다.

   

엄마와의 진실한 사랑과 소통에 목말랐던 윤이는 꼼짝할 수 없는 병든 몸이 되어서야 엄마의 진심어린 사랑을 받게 된 셈이었고

그 온전한 사랑의 느낌으로 제 몸의 고통을 잊은 채 엄마와 함께하는 모든 시간을 참으로 행복해 했다.    

우리가 병상에서 함께 나눈 마지막 3년은 윤이의 25년을 통틀어 가장 의미 있고 깊이 있는 이해와 소통의 시간이었다.


운동신경세포가 사멸하여 굳어가는 몸에 맑은 정신이 갇히는 잔인한 병 루게릭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에게

끝까지 온전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시간을 허락했다.

윤이의 잠재성과 숨은 열정 그리고 미래를 향한 꿈은 가족들의 무조건적  지지와 사랑을 힘입어 병상에서

불꽃처럼 피어났고 윤이의 버킷리스트는 하나 둘씩 이루어져갔다.

힘센 사랑의 힘이야말로 기적을 이룬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던 날들이었다.    


하고 싶고 되고 싶은 것이 많아

혈기와 의욕이 넘치던 윤이의 몸은

예상보다 빠르게 하루하루 쇠하였고

이별은 홀연히 우리 앞에 그 실체를 드러냈다.  

  

주말을 거치며 가족들과 마지막 작별을 고하고 가장 편안한 모습으로 잠든 윤이와의 이별은 우리가 준비하고

대비해 둔 어떤 시나리오보다 훨씬 완벽하게 이루어졌고 윤이는 제 할 일을 다 마친 자의 안식을 위한 멀고 먼 자기만의 여행길로 모두의 귀한 배웅을 받으며 떠나갔다.  

  

넘치는 은혜 안에서 윤이가 고통 없는 안식세계에 들어갔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커지는 허전함과 수시로 밀려오는 그리움은 가눌 방법이 없어 나는 날로 무기력해졌다.
 

내 눈길이 닿는 모든 것에 윤이의 크고 작은 모습과 목소리가 겹쳐져 코 끝이 찡했고 

청한 하늘 저 끝 어디서도 만날 수 없는 이별의 거리에 울컥했다.

윤이가 즐기던 음악, 들르던 샵, 함께 걷던 거리, 좋아했던 반찬, 입고 싶어했던 옷...

언제 어디서나 윤이가 어른거려 혼자만의 촉촉한 추억에 잠기곤 했다.

4명의 가족 톡방에서 주고받던 메시지의 읽음 표시는 끝끝내 지워지지 않는 1의 기록으로

윤이의 부재를 항상 일깨웠고

예능프로를 보며 즐거워했을 윤이의 빈자리는 먹먹해진 가슴을 하릴없이 쓸어내리게도 했다.

식구가 몇이냐는 흔한 물음에 흠칫 머뭇거리다 대답보다 눈물이 먼저 쏟아지거나 

곁에서 ‘언니’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는 동생의 일상등은 

이별을 대비했던 우리가 단 한 번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준비한 이별과 경험한 이별, 

이해한 사별과 체험한 사별, 

그 둘의 간극은 

하늘과 땅 그 이상의 차이라는 걸 이별을 겪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남은 자의 사무치는 그리움, 그 절절한 회한과 안타까움은

머리의 이해나 짐작 또는 상상의 영역이 아니라

우리의 남은 삶과 늘 함께 하는 가슴 속 심연의 일부라는 것을...    

 

죄만 짓고 오래 사느니 윤이처럼 일찍 하늘 낙원에 가는 것이 축복이라는 위로 아닌 위로도,

마치 힘겨운 짐을 내려놓아 홀가분해진 사람에게 하듯 이젠 마음 편히 여행이나 다니며 여생을 즐기라는 

덕담 아닌  덕담도,

집에만 가면 현관에서 뛰어나와 반길 애완견이 당장 보고 싶어 못 견디겠다는 안달도, 

자식을 잃은 사람 앞에서는 할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사별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여전히 모르고 있었다.  

      

부모를 잃은 ‘고아’, 아내를 잃은 ‘홀아비’, 남편을 잃은 ‘과부’처럼 자식 잃은 부모를 이름 짓지 못하는 이유가 그 슬픔을 도저히 가늠할 수 없어서라는 말이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영영한 이별을 관통하고 난 후 나의 일상은  세상과 사람의 땅이 아니라 하늘과 땅 사이

가늠하기 어려운 슬픔이 고인 어디쯤에서 헤매듯 지속된다.

익숙한 듯 낯선 곳, 고향 같은 타향에서 원주민 같은 이방인처럼.

   

윤이의 빈소에서 터져 나오는 속울음을 참지 못해 누구보다 오래오래 흐느끼던 그녀의 사촌오빠는 

아가페적 사랑의 화신으로 윤이의 마음 속에 각인된 존재였다. 

꾸밈없는 미소와 정직하고 따뜻한 성품이 저와 꼭 닮아 윤이가 유독 좋아하며 따랐던 그는 바쁜 와중에도

이따금 아이들을 데리고 와 병상의 윤이에게 주말 한나절의 즐거움을 선사하곤 했다.     

믿음직한 장남, 든든한 형, 성실한 가장, 친근한 아빠 그리고 벗들을 아우르는 친밀한 사교성으로 그를 아는

모든 사람의 신뢰와 사랑을 한 몸에 받던 그가 나 역시 언제나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웠다.

얼마 후면 가족과 떠날 남미 파견근무에 대한 기대로 부푼 가운데 회사 연수가 진행되던 주말 새벽,

모두가 잠든 그 시간 그는 갑작스레 우리의 곁을 훌쩍 떠나 버렸다.    


이별은

그것을 준비했던 하지 않았던 

살아남은 자에게 무너지는 고통과 가슴 저린 슬픔의 생채기를 

아로 새겨 놓는다.

더 오래 있어야 할 자리에서 돌연 사라진 사람이 남긴 가슴 속 온기와 흔적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들...    

때 이른 이별은 나에게 여전히 낯설고 뜨겁게 아프며 그리움 또한 그렇다.

결이 같았던 두 사람을 향한 몇 겹 그리움의 무게로 마음 둘 곳을 찾기 어려운 이 가을엔...  

  

이제 곧 그의 49제가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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