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30초, 버스를 타고 가는 10분, 잠들기 전 침대 위의 몇 분.
이 짧은 틈이 생기면 우리는 거의 반사적으로 핸드폰을 꺼냅니다. 메시지를 확인하고, 쇼츠를 넘기고, 별 의미 없는 화면을 보며 시간을 채우죠. 가만히 있는 게 어색해진 시대입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왜 이렇게 아무 생각도 안 떠오르지?”
아이디어가 안 떠오르고, 인생에 대한 고민도 멈춘 것 같고, 그냥 하루하루가 자동 재생처럼 흘러갈 때 말이죠. 저는 그 원인이 의외로 따분함을 피하려고만 했던 습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에서 “따분함은 욕망을 향한 욕망이다”라는 말을 남겼는데 처음 이 문장을 들었을 땐 솔직히 잘 와닿지 않았습니다. 따분한데 무슨 욕망이 있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됐거든요. 하지만 어느 순간, 이 문장이 제 경험과 정확히 겹쳐지는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보통 따분함을 나쁜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생산적이지도 않고, 의미도 없고, 괜히 불안해지는 시간이라고 여기죠. 그래서 최대한 빨리 없애려고 합니다. 핸드폰을 켜고, 소리를 틀고, 무언가를 계속 소비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다른 감정들은 어떨까요. 배가 고프면 음식이 떠오르고, 목이 마르면 물이 떠오릅니다. 추우면 따뜻한 장소가 생각나죠. 불편한 감각은 늘 무언가를 향한 신호입니다.
따분함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문제는 우리가 그 신호를 끝까지 듣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제가 이걸 실감했던 건 어느 날 캠핑을 갔을 때였습니다. 실수로 핸드폰을 차에 두고 아무 계획 없이 숲 속에 갔었는데 처음 30분은 매우 불안했지만 그 뒤로 신기하게도 생각이 조금씩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미뤄두던 고민, 왜 요즘 일이 재미없는지에 대한 이유, 앞으로 뭘 해보고 싶은지 같은 질문들이 하나씩 떠올랐습니다. 누가 시켜서 한 생각이 아니라 따분함이 밀어 올린 생각이었습니다.
우리는 고요를 견디는 연습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조금만 조용해지면 불안해지고 뭔가 놓치고 있는 것 같아 핸드폰을 집어 듭니다. 하지만 고요 속에서 느끼는 따분함은 우리를 멈추게 하려는 게 아니라 안쪽으로 향하게 하려는 신호일지도 모릅니다.
이제 저는 따분함이 찾아오면 예전처럼 바로 도망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물론 쉽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손은 핸드폰으로 가고 지루함은 빨리 사라지고 싶어 집니다. 하지만 가끔은 일부러 그 상태를 조금 더 유지해 봅니다. 그럴 때마다 확실히 느끼는 것은 생각은 소음 속에서 자라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고요하고 따분한 상태에서야 비로소 내 안에 있던 욕망과 질문이 고개를 듭니다.
“나는 지금 뭘 원하는가?”
“이대로 계속 살아도 괜찮을까?”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은 뭘까?”
이 질문들은 화려한 영상이나 빠른 자극 속에서는 절대 떠오르지 않습니다. 따분함이라는 갈증이 있어야만 비로소 선명해집니다.
오늘 하루 일부러라도 짧은 시간을 비워보면 어떨까요. 엘리베이터 안에서, 버스 창가에서, 잠들기 전 침대 위에서 핸드폰을 내려놓고 그냥 가만히 있어보는 겁니다.
아마 처음엔 지루하고 어색할 겁니다. 하지만 그 따분함을 끝까지 지나가면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조용히 떠오를지도 모릅니다.
따분함은 없애야 할 적이 아니라 우리가 잃어버렸던 욕망으로 가는 입구일지도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