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현실 안식처 만들기

by 오동근

유토피아라고 하면 ‘현실에서는 절대 가질 수 없는 이상적인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여유로운 시간, 넉넉한 돈, 완벽한 환경이 갖춰져야만 가능한 곳이라고 믿었죠. 그래서 늘 “지금은 아직”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미셸 푸코의 ‘헤테로토피아’라는 개념을 접하면서 생각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유토피아는 상상 속에만 존재하지만 헤테로토피아는 현실 속에서도 만들어질 수 있는 또 다른 공간이라고 설명합니다. 아이들이 침대 하나로 바다와 하늘, 숲과 밤을 만들어내듯, 같은 공간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세계를 만들듯 우리의 생각을 바꾸면 실현가능한 현실이 되는 것이죠.


“그건 아이들이니까 가능한 거 아니야?” “상상력 이야기잖아.”라고 말할 수 있지만 저는 어른이 된 지금, 오히려 더 절실하게 느낍니다. 상상력이 줄어든 게 아니라 상상력을 허락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제 방에는 화분도, 연못도 없습니다. 대신 벽을 따라 책들이 쌓여 있습니다. 누군가 보기엔 어수선해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에게 이 공간은 정원입니다.

하루가 버겁게 느껴질 때, 저는 책 한 권을 펼칩니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방의 공기가 달라집니다. 같은 의자에 앉아 있지만 어떤 날은 과거로 어떤 날은 전혀 다른 나라로 이동한 기분이 듭니다.


우리는 종종 독서를 ‘공부’나 ‘자기 계발’로만 생각합니다. 책을 읽는 이유를 너무 거창하게 만들면 오히려 책에서 멀어집니다.

제 경험상 책은 성과를 내기 위한 도구라기보다, 숨 쉴 수 있는 공간에 가깝습니다.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나만의 장소. 실패해도 괜찮고 속도를 늦춰도 괜찮은 곳 말이죠.

그렇게 책과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니, 제 방은 더 이상 머무는 공간이 아니라 드나드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현실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도 언제든 다른 세계로 이동할 수 있는 통로가 생긴 셈입니다.


유토피아는 언젠가 도착할 목적지가 아닙니다. 지금 이곳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만들어지는 상태에 가깝습니다. 꼭 대단한 환경이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한 권의 책, 조용한 시간, 그리고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작은 여유면 충분합니다.


혹시 지금의 삶이 답답하게 느껴진다면 새로운 장소를 찾기 전에 공간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꿔보는 건 어떨까요?

여러분의 방 한편, 책 한 권이 놓인 그 자리가 이미 작은 헤테로토피아일지도 모릅니다.

오늘도 저는 책으로 가꾼 이 정원에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믿게 되었습니다.

유토피아는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는 이미 그 문 앞에 서 있다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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