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가 늘어나자 삶이 조금씩 또렷해졌다

by 오동근

책을 안 읽은 지 꽤 오래됐다는 걸 깨닫는 순간은 늘 비슷합니다. 서점에 들어갔을 때도 아니고, 누군가 독서 이야기를 꺼냈을 때도 아닙니다. 어떤 질문 앞에서 말이 막히거나, 내 마음을 설명하려다 끝내 “그냥 좀 그래”라는 말로 얼버무릴 때입니다. 분명 마음속에는 많은 감정과 생각이 있는데 그것을 꺼내 쓸 언어가 없다는 느낌. 그때 저는 ‘아, 내가 요즘 책을 안 읽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립니다.


예전에는 책을 읽는 이유를 너무 거창하게 생각했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필독서 목록, 연봉을 올려준다는 경제서, 인생을 바꿔준다는 자기계발서 같은 말들에 지쳐 오히려 책에서 멀어졌던 시기도 있었죠. 그래서 한동안은 책을 ‘목적을 위한 도구’로만 바라봤습니다. 뭔가 얻어야 하고, 배워야 하고, 써먹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읽은 책들은 이상하게도 오래 남지 않았습니다. 페이지는 넘겼지만 제 삶에는 별다른 흔적을 남기지 못했죠.


그러다 어느 날, 아주 느린 속도로 그냥 읽기 시작했습니다. 이해가 안 되는 문장은 여러 번 다시 읽고 그래도 모르겠으면 그냥 모른 채로 넘어갔습니다. 신기하게도 그 과정이 전혀 조급하지 않았습니다. 책을 통해 뭔가를 ‘획득’ 해야 한다는 부담이 사라지자 문장 하나하나가 제 안에서 오래 머물렀습니다.


우리는 보통 생각을 ‘마음속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이라고 여기지만 사실 대부분의 생각은 언어의 형태를 띱니다. 꿈, 희망, 두려움, 사랑, 불안 같은 단어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자신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언어가 빈약해질수록 감정은 뭉툭해지고 생각은 단순해집니다. 괜히 예민해지고, 이유 없이 우울해지는 날이 늘어나는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일지 모릅니다. 표현하지 못한 감정은 결국 우리 안에서 방향을 잃으니까요.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으면 똑똑해진다고 말하지만 제가 느낀 독서의 진짜 힘은 조금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책은 저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더 정확히 보게 해 주었습니다.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작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제 이야기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아, 나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그 순간, 막연했던 감정에 이름이 붙고 혼란스러웠던 마음이 정리됩니다.


우리는 종종 스스로를 너무 쉽게 평가절하합니다. 남들과 비교하며 부족한 점만 떠올리고 잘 해낸 것보다 못한 것을 더 오래 붙잡죠. 그런데 언어를 통해 자신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시선이 조금 달라집니다. ‘나는 왜 이 상황에서 이렇게 반응했을까?’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되고 그 질문은 곧 자기 비난이 아닌 자기 이해로 이어집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독서가 삶을 바꾼다고 느꼈습니다. 환경이 달라져서가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언어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인생이 갑자기 화려해지지는 않습니다. 독서를 하면 곧바로 성공하거나 모든 답을 알게 될 것처럼 말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책을 읽을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집니다. 하지만 그 ‘모름’을 대하는 태도는 분명 달라집니다. 예전에는 모르면 불안했는데 이제는 모르는 상태에서도 생각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 여유가 삶을 조금 단단하게 만들어 줍니다.


특히 고전이나 시를 읽을 때 그런 경험을 자주 합니다. 한 문장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해석이 하나로 정리되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그런데 그 모호함 속에서 제 삶을 떠올리게 됩니다. 정답이 없는 질문들 쉽게 결론 내릴 수 없는 선택들. 책 속의 언어는 그런 현실을 그대로 닮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책이 현실 도피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현실을 더 깊이 살아내는 연습에 가깝다고 느낍니다.


결국 책을 읽는다는 건 세상을 이해하기 전에 나 자신을 이해하려는 시도입니다. 내 언어의 범위만큼만 세상이 보이고 그 언어가 풍부해질수록 삶의 결도 섬세해집니다. 저는 이제 책을 ‘읽어야 할 것’이 아니라 ‘곁에 두고 싶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바쁜 날에는 몇 줄만 읽고 덮어도 괜찮고 어떤 날에는 같은 페이지를 여러 번 반복해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니라 그 언어들이 나에게 어떤 질문을 남기는지입니다.


혹시 요즘 마음이 자주 흐릿해진다고 느낀다면, 생각이 단순해진 것 같다면, 책 한 권을 천천히 펼쳐보는 건 어떨까요. 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설명할 언어를 만나기 위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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