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창밖을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왜 같은 장면을 보면서도 전혀 다른 말을 할까요? 누군가는 “날씨가 흐리네”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구름이 쉬어가는 날이네”라고 말합니다. 둘 다 맞는 말인데 이상하게도 두 번째 말은 하루의 온도를 바꿔 놓습니다.
한 시인의 표현 중 바닷길을 두고 “먼지도 안 나는 길”이라고 말하는 문구가 있는데 그 순간 머릿속에 있던 바다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파도, 물결, 소금 냄새가 아니라 말 그대로 ‘먼지 없는 길’을 달리는 느낌이었어요. 저는 시를 잘 쓰는 능력이 아니라 세상을 그렇게 볼 수 있는 감각이 너무 부러웠습니다.
시적인 감각은 타고난 사람만 가질 수 있다고 오해합니다. 그래서 “나는 문과도 아니고, 감성도 없고, 시랑은 안 맞아”라고 말하며 아예 멀리 둬버립니다. 그런데 그건 시를 ‘작품’으로만 보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 같아요. 시는 종이에 적힌 글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에 더 가깝습니다. 같은 하루를 조금 다르게 해석하는 힘, 같은 길을 걸으면서도 다른 이름을 붙이는 능력 말이죠.
저도 예전에는 늘 기능적으로만 세상을 봤습니다. 이건 해야 할 일, 저건 해결해야 할 문제, 이건 생산성, 저건 효율. 하루를 살아내기엔 편했지만 하루를 느끼기엔 너무 메말라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의식적으로 시집을 읽기 시작했고 이상하게도 제 생각의 말투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비 오는 날을 “귀찮은 날씨”라고 부르지 않고 “세상이 잠시 느려진 날”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피곤한 저녁을 “에너지가 떨어진 시간”이 아니라 “하루가 잘 닫히는 순간”이라고 부르게 됐습니다.
이 작은 변화는 생각보다 큰 힘을 가졌습니다. 감정이 덜 날카로워지고 하루에 대한 불평이 줄어들었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대하는 말이 부드러워졌습니다. 은유와 비유는 문장을 예쁘게 만드는 장치가 아니라 삶을 덜 거칠게 만드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성장이라는 말을 하면 더 빨라지는 것, 더 많이 아는 것, 더 강해지는 것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요즘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성장은 단단해지는 게 아니라 더 잘 느끼게 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고요. 시인의 감각을 배운다는 건 삶을 예민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섬세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래서 상처가 덜 아프고 기쁨은 더 오래 남습니다.
오늘 하루, 당신이 걷는 길은 어떤 길인가요? 그냥 출근길인가요 아니면 먼지 안 나는 길인가요? 같은 풍경에 어떤 이름을 붙이느냐에 따라 하루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시를 쓰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다만, 시인처럼 한 번만 더 바라보면 됩니다. 그 순간, 삶은 조금 말랑해지고 우리는 조금 덜 지치게 됩니다.
저는 내일도 시집을 펼칠 생각입니다. 거창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다시 보는 연습을 하고 싶어서요. 그리고 혹시 모르죠, 내일의 평범한 하루가 누군가에게는 시가 될지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