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의 시작이었다.
24살, 가장 빛나던 나이에 결혼했다.
33살, 가장 외로웠던 나이에 이혼했다.
결혼 생활은 생각보다 훨씬 고통스러웠다.
한국에서의 결혼이란 게, 원래 이런 걸까.
나는 지금도 그 답을 찾지 못했다.
나는 정말 간절히, 결혼을 꿈꿨다.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내 꿈은 '현모양처'였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도 모른 채.
현모양처가 된다는 건,
남편에게 헌신하고, 시댁에 순종하는 걸 의미하는 걸까.
아니면, 나만 그런 착각을 했던 걸까.
그때는 몰랐다.
결혼 생활에서 마주할 일들이, 내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라는 걸.
결혼하자마자, 남편이 살던 지역으로 이사를 갔다.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할 각오였다.
작은 설렘과 불안함을 품고, 나는 새로운 도시에서 삶을 다시 시작했다.
첫 면접에서 받은 질문은, 경력이나 능력이 아니었다.
"아기 가질 생각 있나요?"
"군부대에 사시네요?"
그런 것들이 전부였다.
나는 존재로 평가받지 못했다.
내 인생의 가능성보다, 내 몸의 가능성만이 중요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어렵게 얻은 일자리였다.
취직 소식을 전하기 위해 시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돌아온 건 축하가 아니었다.
"아니, 우리 아들이 전출되면 어쩔 건데?"
그 순간, 깨달았다.
나는 이제 독립된 존재가 아니었다.
결혼과 동시에, 나는 누군가의 부속품이 되어 있었다.
하루는 갑자기 집에 찾아오겠다는 연락이 왔다.
부득이하게 시간을 조정해달라 부탁했지만, 돌아온 답은 이랬다.
"왜, 내 아들 집에 가는데 허락을 받아야 하나?"
그 순간 깨달았다.
나는 이 집의 주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나를 '그 집의 며느리'로만 보았다.
결혼식 일주일 전, 한복 맞추러 갔던 날.
디자이너는 내게 조심스레 말했다.
"어머님이 벌써 오셔서, 더 고급스러운 한복으로 바꿔 가셨어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누구의 양해도 없이, 당연한 듯 자신의 선택을 밀어붙이는 사람들.
결혼식은 내 무대가 아니었다.
나는 단지, 누군가의 체면을 위한 장식품에 불과했다.
나는 나름대로 균형을 맞추고 싶었다.
적어도 내 엄마가 서운하지 않도록.
하지만 그 작은 소망조차 '욕심'이라 불렸다.
그땐 몰랐다.
진짜 시련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