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곁의 페미니즘] 돌봄 공백, 실은 사람 살리는 문제
(※이 편지는 오마이뉴스 연재기사입니다. 홈페이지에서 직접 보시면(http://omn.kr/1vjmc) 작가의 편지낭독 음성을 바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 재회의 고리가 되어준 편집자 고 이환희님께도 감사를 전합니다.)
'페미니즘을 뭐라고 번역하시나요? 우린 '성평등주의'로 읽습니다. 성별로 인한 차별을 없애자는 얘기죠(오바마도 페미니스트라네요!). 페미니즘이 오해받는 한국, 그 안에서 페미니스트로 사는 두 여성의 이야기. 2주마다 한번씩 편지를 주고받으며, 연대와 성장을 꾀해봅니다.[기자말]
성애님, 추석이 초과근무 같았다니 힘드셨겠어요. 저는 몇 년 만에야 모든 걸 다 내려놓고 푹 쉬었던 것 같아요. 성애님과 비슷하게, 저도 운 좋게 따뜻한 가족을 만난 편이에요. 부모님과의 관계도 좋고, 동생을 넘 좋아해서 제 별명 중 하나는 '동생덕후'거든요. 소위 '큰집'이나 시골에도 가지 않는 덕에 이번엔 인천 본가에 모여 소소하게 명절음식을 나눠 먹으며 보냈답니다.
돌아보니 이상하게 올해 특히 병원을 자주 들락거렸더라고요. 그간 건강을 소홀히 한 걸 한꺼번에 갚나 싶게, 치과-안과-내과를 줄기차게 갔었거든요. 저는 '뾰족한 물건' 공포가 극심해 채혈할 땐 실제로 몸이 딱딱하게 굳는데(이걸 '주사공포증'이라고 하더라고요. 볼펜 촉으로 찌르는 장난을 치던 친구와 대판 싸운 적도 있어요), 이번엔 울며 겨자 먹기로 코로나 백신을 맞았답니다. 두 번이나 자발적으로요.
접종 뒤 저는 앓아누웠습니다. 1차 때도 그랬는데 혼자 사니 어디 말할 곳도 없고, 해열진통제만 연달아 눌러 삼키며 참았어요. 근데 2차 뒤엔 심지어 '월경 장애'도 오더라고요. 예정에도 없던 생리가 갑자기 찾아오는 그거요. 머리는 아프고 쓰러질 것 같고, 출근도 어려울 정도여서 결국 미리 잡아둔 집수리 활동도 친구 약속도 모두 취소했습니다. 오늘이 2차 접종 뒤 4일째인데, 여전히 주사를 맞은 팔뚝은 끊길 듯 아프고 머리도 띵해요.
백신을 못 믿겠다는 건 아니지만 백신 자체에 대해 논해보고 싶어요. 백신의 기준이 어디에 있는지를요. 저를 비롯해 다수 여성이 경험한 '월경 장애'는 사실 처음엔 정부가 인정하지 않던 부작용이었거든요. 질병관리청은 애초 이게 '접종과의 인과관계가 없다'고 했지만, 지난 8월 "여성들의 부정출혈(하혈)을 백신 부작용으로 신고하게 해달라"는 국민청원에 4만7000명 가까이 동의한 뒤에야 부작용 중 하나로 인정했다고 해요(관련 기사: 백신 접종 여성들 '부정출혈' 호소..."임상시험서 고려되지 않아").
한편으론 이것도 '젠더 데이터 공백' 사례가 아닌가 싶어요. 앞서 추천한 책 <보이지 않는 여자들>에 나왔던, 스마트폰 크기와 여름철 사무실의 적정온도, 심장마비 같은 의료적 진단조차 40~50대 성인 남성을 기준으로 맞춰져 있어 생기는 문제들 말이에요(여성의 심장마비 증상은 남성과는 좀 다르다고 해요). 이번에도 여성이 겪는 부작용은 아예 무시될 뻔했으니까요.
최근 정부와 여당 정치인들은 K-방역 성공만을 강조하지만, 그 이면엔 보건의료 노동자와 소방공무원 등 다른 누군가의 초과 노동이 깔려 있겠죠. '국민 70% 접종' 표어 뒤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도 많다는 걸 아시나요. 승강기 없는 2층 병원에 접종 예약이 돼 결국 접종을 포기했다는 장애인 당사자, 거동이 어려운데도 이동지원을 받지 못한 이들 사례요(<비마이너> 8월 26일자 기사 참조).
정부는 '누구도 제외되지 않는' 방역과 접종을 지향해야 하지 않을까요.
성애님이 추천한 책 <외롭지 않을 권리>는 저도 무척 좋아하는 책이에요. 제가 사회복지사로 일하며 복지운동을 하다 보니 부양의무자기준 폐지나 가족구성권 이슈에 관심이 많거든요. 이번에도 아플 때 곁에 아무도 없다는 게 좀 외롭더라고요. 소셜미디어에 '나 아파요' 외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무력하기도 했고요.
가끔은 다른 누군가와 연결돼 있다는 그 감각이 미치도록 그리울 때가 있잖아요. 코로나 중 더 짙어진 그 감각, 그걸 우리는 '돌봄' 또는 '동반'이라고 부르는 것 같아요. 제가 활동하는 녹색당에서는 이걸 법과 제도로 만들려는 꾸준한 시도를 했었어요. 선거 때마다 생활동반자법 제정이나 '동반자 관계 증명 조례' 등을 공약으로 내걸었고요.
그럴 때마다 한쪽에선 늘 가족해체의 위험을 이유로 들며 반대하더라고요. 이전에 '호주제 폐지되면 나라 망한다'는 사람들이 있던 것처럼, 그분들 걱정도 이해는 가요. 하지만 한 번만 더 생각해 보면, 혈연으로 묶인 '가족'이 내 곁에 없더라도 누군가가 나를 계속 챙겨주고 돌봐준다면 좋지 않을까요? 제 상상 속에선 그런 나라가 지금보다 더 살기 좋을 것 같아요.
우리는 크게 '돌봄 공백'이라고 말하지만 더 구체적으론 '제도의 공백'이겠죠. 제도의 사각지대와 부조리함을 다뤘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떠올라요. 허술한 제도가 얼마나 사람을 수치스럽게 하고 소외시키는지, 그걸 실업자 남성과 미혼모 여성의 사례로 보여주는 영화거든요.
영화엔 이사 온 곳이 낯설어서 헤매다 약간 늦었다는 이유로 정부 지원대상에서 탈락한 싱글맘 케이티가 나옵니다. 제가 가장 인상 깊게 봤던 장면은, 케이티가 식료품 배급소에서 통조림캔을 보자마자 선 채로 따서 이성을 잃고 먹다가 우는 대목이었어요. 며칠을 굶었다며 '너무 배가 고파서 그랬다'고, 그녀가 울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사과하는 모습이요. 그걸 보는데 아, 안타깝고 답답해서 한숨이 나오더라고요.
'성과와 성장만을 좇다 괴물이 돼버린 사람들', 영화는 그런 영국의 풍경을 비추지만 한국은 그와 뭐가 다른가요. 지난 10월 10일은 세계 정신 건강의 날이었는데, 얘길 듣고서는 혼자 아파하다 너무 빨리 떠난 동료·친구 몇몇의 얼굴이 떠올랐어요.
성애님, 한국의 우울증 환자들은 점점 그 나이가 어려지고 숫자도 늘고 있단 사실을 아시나요. 그래서 통상 얘기하는 '돌봄이 중요하다'는 말이, 제게는 정말 절실하게 '사람을 살리자'는 말처럼 들리기도 해요. 친구를 구할 그물망 같은 거요.
3일 넘게 좁은 방안에만 갇혀 있었더니 숨이 막히는 기분이에요. 날은 쌀쌀해졌지만 아무래도 오늘 저녁엔 동네 한 바퀴 산책을 해야겠어요. 참, 다음번 편지 전에는 꼭 '인사이드 패스'를 배워보고 싶어요. 조만간 근처 잔디구장에서 만나요!
▲ 당신에게 추천합니다: 영화 <나, 다니엘 브레이크>. 안 봤다면 강추, 봤어도 복습! 우리가 대체 어떤 '사회'에서 살고 있는지 직면하게 만듭니다. 보는데 눈에서 자꾸 땀이 났어요.
2021년 10월 11일
콧바람이 절실한 혜미 드림.
첫번째 편지☞ 같이 걷게 될 당신, 멀고도 가까운 당신
두번째 편지☞ 이런 시대... 여자로 태어난 건 축복일까요
세번째 편지☞ 청년 부르짖는 정치인은 모르는 청년의 심각한 현실
네번째 편지☞ 길바닥 나앉은 목사, 청년 예수가 봤다면
다섯번째 편지☞ 노동자 과로사하는데... 윤석열 말에 한숨부터 나왔다
여섯번째 편지☞ '숏컷 괴롭힘' 사회... 아이를 낳고 싶다, 낳고 싶지 않다
일곱번째 편지☞ 늘어나는 비혼·비출산, 윤석열만 못 보는 현실
여덟번째 편지☞ 아프간 '난민'을 왜 내가 신경 써야 하냐고요?
아홉번째 편지☞ 여성 안 보이는 선거, 2022년에도 봐야 한다니
열번째 편지☞ 가족, 짐일까 힘일까... '정상' 너머 대안이 필요하다
열한번째 편지☞ 아파보니 알겠어요, 한국에 '돌봄'이 있나요?
* 혜미와 성애가 2주에 한 번씩 주고받으며, 격주 금요일 게재될 예정입니다. 이 편지는 문학동네 이슬아x남궁인의 연재에서 영감을 받아 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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