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곁의 페미니즘] 가족 말고 생활동반자, 모두의 '외롭지 않을 권리'
(※이 편지는 오마이뉴스 연재기사입니다. 홈페이지에서 직접 보시면(http://omn.kr/1vcve) 작가의 편지낭독 음성을 바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 재회의 고리가 되어준 편집자 고 이환희님께도 감사를 전합니다.)
'페미니즘을 뭐라고 번역하시나요? 우린 '성평등주의'로 읽습니다. 성별로 인한 차별을 없애자는 얘기죠(오바마도 페미니스트라네요!). 페미니즘이 오해받는 한국, 그 안에서 페미니스트로 사는 두 여성의 이야기. 2주마다 한번씩 편지를 주고받으며, 연대와 성장을 꾀해봅니다.[기자말]
혜미씨, 추석은 잘 보내셨나요? 저는 결혼 뒤 첫 추석이었는데, 시댁과 친정집을 오가느라 분주했네요. 설거지를 하고 사과와 배를 깎고, 어른들 말에 고개 끄덕이며 웃는 것에도 최선을 다했죠. 매일 늦잠을 자고 친구들을 몰아 만나던, 작년과는 영 딴판인 제 모습에 저조차도 웃음이 나왔습니다. 결혼 전엔 추석이 유급휴가 개념이었다면, 지금은 약간 초과근무(!) 같다고 할까요.
좋고도 싫은 명절. 누군가는 추석을 '가부장제 축일'이라고도 비꼬던데, 그래서인지 혜미씨가 말했던 '무급-가족-종사자' 여성들 얘기가 자주 생각났어요. 전 부치기부터 송편 빚기, 차례상 차리고 치우기까지 여성들의 무급노동이 가장 많이 동원되는 때가 명절이잖아요. 각자 다르게 살아온 가족들이 오랜만에 만나 언쟁을 벌이고, 그게 폭력으로 이어지는 일도 부지기수고요.
추석 직후인 23일 경찰청에 따르면, 시부모 간병 문제로 다투다 아내를 폭행한 남편이 검거되는 등 가정폭력 사건은 여전했다고 합니다. 특히 전년도 추석 대비 아동학대 신고가 60% 가량 늘어났대요. 코로나로 모두가 단절된 요즘, 어딘가엔 어른들 학대 속에 방치된 아이들이 있겠구나 싶어 걱정이 돼요.
어떨 때는 참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성별이나 국가가 그런 것처럼, 우리는 어떤 부모에게서 태어날지 선택할 수 없는데도 평생을 그 영향 안에서 살아가야 하잖아요. 혜미씨에게 가족은 '힘'인가요, '짐'인가요?
저는 운이 좋은 편이었어요. 제게 가족은 언제나 힘이 되는 쪽이었거든요. 아버지의 빚보증이 잘못 돼 힘든 시간도 있었지만, 부모님은 제게 늘 날개가 돼주려는 분들이셨어요. 그러나 어떤 이에게 가족은 평생 짊어질 짐이기도 하다는 걸, 어떤 부모는 자녀를 소유물로 여기며 성인이 돼도 신체·언어적 폭력을 저지른다는 걸 뒤늦게야 알았습니다.
혼인이 대등한 두 성인의 결합이라기보다는, 가족과 가족 간의 만남이라는 것도 결혼 뒤에야 확실히 알게 됐어요(과거의 저는 순진했네요...^^). 세계관과 가치관이 다른 두 집안이 만나 빚어내는 차이가 상상 그 이상이라는 것도요. 먼저 결혼한 선배들이 '시월드'라는 말을 빚어낸 데엔 다 이유가 있었구나 싶어요. 시-월드(world), 완전히 다른 세계라는 의미였나 봐요.
저는 사실 결혼을 한 계기 중 하나가 법적인 보호자가 되기 위해서였는데요. 몇 년 전 남자친구가 갑작스러운 맹장염이 와서 수술동의서에 혼자 사인하고 수술을 혼자 겪어내고, 회복실에 누워 있다가 뒤늦게 온 저를 본 뒤 엉엉 운 일이 있었거든요. 그와 만나는 동안 제 질문은 '꼭 결혼이어야 해?'였는데, 그 뒤엔 '결혼이 아니어야 해?'로 바뀌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서로 아끼는 두 성인의 결합이 꼭 번거롭고 복잡한 결혼 제도를 통해야만 하는 걸까요. 2014년 발의 직전까지 갔다가 무산된 '생활동반자법'이 유력한 대안이리라 생각합니다. 해당 법이 생길 경우, 두 성인이 국가에 신고하면 둘을 법적 관계로 간주한다고 해요. 결혼과 비슷하지만 훨씬 가벼운 거죠.
생활동반자법을 다룬 책 <외롭지 않을 권리>를 읽으며 "이 법이 생긴 뒤의 결혼은, 여러 선택지 중 적극적으로 내가 선택한 행복의 방식이 된다"는 문장이 특히 와닿았어요. 선택지가 있었다면!
혜미씨는 사회복지사니까 알고 계셨을까요? 저는 이 법의 적용 대상이 '젊은 성인들'이라고 이해했었는데, 알고 보니 더 폭넓은 개념이더라고요. 사별 혹은 이혼 뒤 마음 맞는 친구와 살고 싶은 중노년층, 결혼 말고 다른 방식으로 타인과 함께 하고픈 청년층도 가능합니다. 기존 '정상가족'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그래서 법의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을 포용할 수 있는 거지요.
늘어만가는 1인 가구의 돌봄공백, 고독사 문제도 해결이 수월해질 테고요. (9월 29일자 따끈따끈한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4년 뒤엔 전 국민의 20%가 65세 이상 노인인 '초고령사회'가 된다네요!)
"생활동반자법은 두 사람이 왜 같이 살고 싶은지를 굳이 묻지 않는다. (...) 생활동반자법이 생긴다면 사회적으로 서로 돌보며 함께 사는 관계를 더 장려할 수 있다. 정부와 지자체에서도 노인 1인 가구가 함께 살며 서로 돌보도록 하는 게 도움이 된다." (책 110, 142쪽 중)
지난 8월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서 발간한 '고령 여성의 목소리로 들어본 노년의 비혼동거, 정책적 함의' 보고서(링크)도 같은 맥락이었습니다. 가족형태가 빠르게 변하는 요즘, 제도 밖에서 노년을 함께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본 거죠. 이들은 돌봄과 정서적 지지 등 파트너로 인한 긍정적 영향을 이야기했지만, 한편으론 법적·제도적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하는 데 대한 불안도 토로했습니다.
'반드시 결혼'이 아닌 두 성인의 결속과 돌봄은 정부에도 이득일 겁니다. 시민연대계약(팍스‧PACS)과 삼보(Sambo) 등 프랑스와 스웨덴 정부가 2000년 초 동반자 등록법을 서둘러 도입한 이유가 그렇죠.
한국 내 인식도 변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6월 가족 다양성에 대한 국민 인식조사에 따르면(자세히 보기), 국민 10명 중 7명은 '혼인·혈연 여부와 상관없이 생계와 주거를 공유한다면 가족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답했어요.
그런데도 왜 한국 정부는 뒷짐만 지고 있는 걸까요. 지난 4월 여성가족부는 '4차 건강가정기본계획(2021~25년)'을 통해 현행 혼인·혈연 중심 가족 개념을 확장해야 한다고 발표했지만, 이를 위해 필요한 법 개정은 현재 국회에서 꽉 막혀 있는 상태입니다.
생활동반자법 제정안은 과거 국회에선 동성혼을 조장할 거란 반대에 부딪혔고, 현 국회에선 논의조차 되지 않고 있는 상황입니다. 다만 8월에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이 관련 토론회를 열며 물꼬를 텄고, 심상정·이정미 등 일부 대선 후보들이 이를 공약으로 내걸었어요.
자녀가 부모의 성 중 아무 거나 따라도 이상하지 않고, 방송인 사유리씨 같이 결혼 없이도 아이를 키우는 다양한 가족도 인정받는 나라. 꽉 막힌 제도와 관행에 이런 새로운 상상력이 깃든다면, 세상은 좀더 살만해지지 않을까요. 그런 새 미래를 보여줄 정치인들이 절실한 요즘입니다.
참 혜미씨, 저는 요즘 주말마다 풋살을 하러 가고 있어요. 여자 축구 예능이 화제라던데 꼭 그래서만은 아니고요(TV를 거의 안 봐서요!). 길고 긴 코로나 속 집에만 있는 게 답답해서 친구들과 뛰어놀 방법을 고민하다 선택했습니다. 조만간 만나서 공 차러 가요! 지난주에 배운 기본기 '인사이드 패스'를 알려드릴게요.
▲ 당신에게 추천합니다: 생활동반자법은 동성혼을 조장한다? 나라의 근간과 전통이 통째로 흔들릴 것이다? 친절한 설명서 <외롭지 않을 권리>에 답이 나와 있습니다. 성인 여자 둘+고양이 넷이 함께 살며 좌충우돌 빵빵 터지는 이야기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도 재밌으니 강추합니다!
2021년 9월 30일
경기 시작도 전에 근육통이 생기고 만 성애 드림
첫번째 편지☞ 같이 걷게 될 당신, 멀고도 가까운 당신
두번째 편지☞ 이런 시대... 여자로 태어난 건 축복일까요
세번째 편지☞ 청년 부르짖는 정치인은 모르는 청년의 심각한 현실
네번째 편지☞ 길바닥 나앉은 목사, 청년 예수가 봤다면
다섯번째 편지☞ 노동자 과로사하는데... 윤석열 말에 한숨부터 나왔다
여섯번째 편지☞ '숏컷 괴롭힘' 사회... 아이를 낳고 싶다, 낳고 싶지 않다
일곱번째 편지☞ 늘어나는 비혼·비출산, 윤석열만 못 보는 현실
여덟번째 편지☞ 아프간 '난민'을 왜 내가 신경 써야 하냐고요?
아홉번째 편지☞ 여성 안 보이는 선거, 2022년에도 봐야 한다니
열번째 편지☞ 가족, 짐일까 힘일까... '정상' 너머 대안이 필요하다
* 혜미와 성애가 2주에 한 번씩 주고받으며, 격주 금요일 게재될 예정입니다. 이 편지는 문학동네 이슬아x남궁인의 연재에서 영감을 받아 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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