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편지: 심각해진 우울감, 홀로 견디는 당신에게
(※이 편지는 오마이뉴스 연재기사입니다. 홈페이지에서 직접 보시면 편지낭독 음성을 바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 재회의 고리가 되어준, 편집자 고 이환희님께도 감사를 전합니다.)
페미니즘을 뭐라고 번역하시나요? 우린 '성평등주의'로 읽습니다. 성별로 인한 차별을 없애자는 얘기죠(오바마도 페미니스트라네요!). 페미니즘이 오해받는 한국, 그 안에서 페미니스트로 사는 두 여성의 이야기. 2주마다 한번씩 편지를 주고받으며, 연대와 성장을 꾀해봅니다.[기자말]
당신 곁의 페미니즘·혜미의 세번째 편지: 홀로 견디고 있는 당신께
날씨가 요사스러운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비가 왔다가, 쨍쨍했다가, 더웠다가, 쌀쌀했다가 하고, 오뉴월 내내 비도 많이 와요.
기상청에 따르면 서울 강수량은 지난해 같은 시기보다 세 배나 높았다고 하고, 특히 5월 비 내린 날은 1973년 이후 역대 최다였답니다(14.5일). 찾아보니 기후위기로 인한 '제트기류(대기권의 좁고 빠른 공기흐름)' 때문이래요. 북극 기온이 상승하면서 제트기류가 느슨해졌고, 건조하고 찬 공기가 내려오면서 우리 사는 한국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거라네요.
참, 며칠 전엔 이를 닦는데 오른쪽 어금니가 부러져서 나온 거 있죠. 놀라서 치과에 가보니 의사 왈 '진작 아팠어야 했는데, 신경이 죽어있어서 안 아팠던 것'이라고 하더라고요. 치료를 받으면서 생각해봤어요. 바쁘단 핑계로 건강을 미루는 저를 보며, 한편 '늘 건강해야 하는 청년의 몸'에 대해서요. 청년 이미지라는 게 보통 그렇잖아요. 매번 정력적이고 쾌활하고, 늘 '도전'하는 강인한 상태라고들 하잖아요.
최근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정치인들이 따라 하는 청년의 모습도 딱 그래 보여요. '롤(게임)'하는 이낙연, 벙거지를 쓰고 '힙합'하는 정세균과 '가수 부캐(부캐릭터)' 최문순…. 게임 좋아하고, 약간 건들거리고, 그들이 상상하는 청년은 아마 딱 그 정도 이미지겠죠? 청년 세대를 일컫는 알파벳은 계속 변하는데, 왜 정치권이 상상하는 '청년'의 이미지는 멈춰있는 걸까요.
현실에 발붙인 청년들 상황은 심각해요. 보건복지부가 5월 발표한 '코로나19 국민 정신건강 실태조사'에서 보면 청년 우울감이 심하게 높아졌대요. 우울 지표는 2018년도에 비해 전 국민 모두 두 배 높아졌는데, 그중 2030 청년의 우울 위험이 가장 커졌다고 하고요. 구체적으론 20대 여성의 우울점수가 7.1점(평균 5.7점), 우울 위험 비율에선 30대 여성이 31.6%(평균 22.8%)로 최고 높게 나타났다네요.
OECD 국가 중 매번 한국이 1위인 자살률 통계나 잊을 만하면 발생하는 산재 사고를 봐도 마찬가지예요. 살 자리와 설 자리를 잃는 청년들은, 그 존재마저도 손쉽게 지워지고 마는 듯합니다. '겨울이 이렇게 추운데 무슨 지구온난화냐'라고 말하던 트럼프 대통령처럼, 청년들 삶은 겉보기에 젊고 생생하니 아무 문제가 없는 걸까요.
젊음과 새로움이란 이미지만 소비하면서, 대선주자들은 정작 왜 청년에 대한 '책임정치'는 말하지 않는지 궁금해져요. 저는 그들에게 '청년다운 정치'를 바라진 않거든요. 모두 알면서도 해결을 미뤄온 일들이 더 급하다고 생각해요. 지난 편지에서 언급된 성폭력 피해 여성들의 죽음, 어제도 오늘도 일하다가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삶 말이에요. 그런 문제에 직면하는 정치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청년이란 이름으로 오히려 청년을 지우는, 이런 '청년 워싱' 현상에 대해 저는 자꾸 고민하게 됩니다.
대선주자들이 청년들이 고군분투하는 현장에 직접 가보면 어떨까 싶어요. 현실을 마주할 수 있도록요. 병원에서도 몸의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진단부터 하잖아요. 청년 삶에 대한 정확한 판단 없이 지금 정치인들처럼 겉모습만 따라한다면, 치료는 아마 불가능할 거예요.
저는 요즘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돌봄위기는 독박으로부터 온다"는 구절이 참 와닿더라고요. 저학력 여성노동자가 자주 짊어지는 간병의 책임, 늘 여성 몫인 양 생각되는 돌봄 노동도 떠올랐고요. 결국 우리 모두는 늙어갈 텐데... 질병과 돌봄에 대한 책임을, 지금처럼 각각의 개인이 지는 게 아니라 사회구성원들이 함께 나눠지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 사회적 논의가 더 풍성해진다면요.
책에 따르면 새벽 세 시는 '몸의 변화들이 가장 날카롭게 지각되는 시간'이라고 해요. 통증과 아픈 몸, 나이 탓에 전과 같지 않은 몸이 나뉘어 예민해지는 시간이라는 뜻이겠죠. 어쩌면 그 모습이, 편 가르고 나누는 요즘의 정치현실과 비슷하단 생각도 들어요.
사람들은 지금이 분열과 갈등의 시대라고 자주 말하죠. 하지만 반대로, 시계가 새벽 세 시를 가리키는 현실이 어쩌면 '변화'를 향해 가는 시간이라고도 기대해봅니다. 그래야 서로를 돌보면서 건강하게 늙어갈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게 편지든 무엇이든, 홀로 견디고 있는 청년들이 서로 연결되는 사회를 꿈꿔봅니다. 마주하는 현실은 여전히 숨이 턱턱 막히곤 하지만요.
요사스러운 날씨는 계속되지만, 비 오는 날 미리 챙겨 둔 우산처럼 반가운 이런 편지를 계속 쌓아가보고 싶어요. 그러면 언젠간 무지개도 같이 볼 수 있겠죠?
▲ 당신에게 추천합니다: 책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 질병, 돌봄, 노년에 대한 다른 이야기>. "통증의 들쑤심에 속절없이 지새우는 밤의 새벽 세 시, 지친 몸으로 아픈 이의 머리맡을 지키는 새벽 세 시를 떠올려 보라. …아픈 사람들에게, 시간은 과거와는 다른 것이 된다." 아픈 시간을 홀로 견뎌본 당신께 추천합니다.
2021년 6월 21일
당신의 편안한 새벽 세 시를 기원하며, 김혜미 드림.
당신곁의 페미니즘♬
첫번째 편지☞ 같이 걷게 될 당신, 멀고도 가까운 당신
두번째 편지☞ 이런 시대... 여자로 태어난 건 축복일까요
* 혜미와 성애가 2주에 한 번씩 주고받으며, 격주 금요일 게재될 예정입니다. 이 편지는 문학동네 이슬아x남궁인의 연재에서 영감을 받아 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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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혜미> 연재는 처음이라. 마포에 살고, 녹색 정치를 하며, 사회 정책에 관심있게 움직이는 사람. 셰어하우스에 살며 분리수거를 잘 하고싶은 페미니스트. 삶과 이상을 잇고-짓고 싶은 사람. 날기싫은 비행기와 춤추고 싶은 멋쟁이 토마토를 간신히 연주할 수 있는 우쿨렐레 초보. 토마토 음식으로 해장하는 사람.
<유성애> 아픈 몸을 사는 사람, 편집노동자. 스스로 장애인-비장애인 경계에 있다고 생각한다. 20대 초반 한 팔 두 다리가 부러졌던 경험이, 의도치 않게 여자로 태어나 살며 겪었던 일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 같다. 소외된 사람들 목소리에 마음이 더 기운다. 성평등한 국회, 성평등한 오늘을 꿈꾸는 페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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