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쌓여있다

by 최서연


좋아했던 사람이 새벽에 아무 소리도 나지 않고 이따금씩 지나가는 차 소리만 나는 그 시간에,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게 너무 좋다고 얘기했다. 그 한마디 때문에 나도 그 조용한 시간이 너무 좋아졌다.


유리잔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받으면 빨대로 꼭 휘저어서 얼음이 유리잔에 청명하게 부딪히는 소리를 듣는 게 좋다. 지하철에서 지나가다가 사람들이 내 어깨를 치고 간 것보다, 이 소리를 더 잘 기억하고 싶다고 얘기했다. 누군가는 그게 참 멋있는 생각이라며 그다음부터는 자기도 커피를 받으면 꼭 빨대로 휘젓는다고 했다.


선크림을 콕 찍어서 얼굴에 올려놓은 것이 너무 귀엽다는 말을 듣고 나서, 거울에 비친 그 모습이 진짜 귀엽고 사랑스러워졌다.



그냥 우리는 우리가 믿고 싶은 말을, 그 한 문장을 찾아 헤매고, 그 문장을 찾았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를 던져버리는 게 아닐까. 그것처럼 사랑도. 우리는 살면서 저런 문장들 보다도 훨씬 강렬한 사랑에 관한 노래와 영화와 드라마와 소설을 얼마나 많이 보면서 자랐는지 인지하지도 못할 정도니까. 단 한마디도 나의 평생의 모든 밤이 지나갈 때마다 영향을 미칠 텐데. 그렇게 우리 뇌에 스며들어버린 사랑이, 그 형태는 사람마다 다를지라도, 그게 마치 내가 찾고 싶었던 문장들처럼, 내가 믿어버리고 싶었던 문장이 되어서 우리를 찾아와 주길. 어디선가 만날 수 있기를 기다리고, 그것이 나의 의미라고 생각하고 싶은 게 아닐까.


나는 항상 불안하고, 그 불안한 내가 살아가면서 겨우 찾아놓은 몇몇의 의미는 의미가 있는 것 같다가도 또 없어져 버리니까. 그렇게 없어져버리는 것 말고 계속 믿을 수 있는 건 내 눈앞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어디엔가는 있다고 믿는 가상의 것뿐이잖아. 내가 기다리던 그 문장이든, 사랑이든.


근데 만약 그게 나한테 정말 찾아오더라도, 우리는 또 금방 잊어버릴걸. 내가 며칠 전에 너무 가지고 싶어 했던 향수처럼. 가지고 나면 익숙해지고 당연해져 버리는 것처럼. 테이블 위에 올려진 그 향수를 보면 또 좋겠지. 아침에 뿌리고 나가면서 냄새가 참 좋다고 행복해하는 시간들이, 또 금방 일상의 순간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어느 때는 늦은 아침에 바쁘게 나가면서 잊어버리기도 하고, 어느 때는 익숙해져 버려서 누군가 이야기해줘야 그 냄새가 나랑 함께 있었다는 걸 깨달아버리는 것처럼.


잊지 않는 수밖에는 없어.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 나에게 쌓여있는 사랑의 순간들. 선크림을 콕 찍어서 얼굴에 올려놓은 모습이 거울에 비칠 때마다 귀여움이 생각나서 웃고, 하루에도 몇 번씩 마시는 아이스 아메라카노를 받으면 꼭 그냥 지나치지 않고 빨대로 휘저으면서 짤그랑 소리를 들으며 좋아하고, 자기 전에 열어놓은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밤소리에 살며시 미소 지으며 잠들고.


또 어떤 사랑의 순간을 만나게 될지, 어떤 순간들이 내 인생에 쌓이게 될지, 설레고 기대하면서 내일을 또 맞이하는 수 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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