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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연 Jul 11. 2022

몸도 마음도 중용의 자세로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아니한 몸과 마음을 지키려면


인체는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살 수밖에 없어요. 중력에 의해서도 그렇고, 움직임에 의해서도 그렇고요. 내가 팔다리를 흔들면서 걷거나 뛰고 흔들리는 전철 안에서 손잡이를 잡고 버틸 때는 흔들림을 잡아주어야 내가 다치지 않죠. 하루 종일 앉아서 공부를 하거나 일을 해야 하면 그 자세를 유지하며 느껴지는 부하를 감당하기도 해야 하고요.


이렇게 인체에 가해지는 스트레스를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배출할 수 있는 자세가 바로 ‘중립’ 자세입니다. 척추를 예를 들어 보면 갈비뼈 뒤에는 ‘약간의’ 뒷굽음이 있어야 하고, 허리는 ‘약간의’ 앞굽음이 있어야 하죠. 이 허리의 커브는 과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커브가 사라지지도 않는 딱 그 중간에 있어야 가장 바람직합니다. 갈비뼈의 후만(뒷굽음)도 마찬가지로요, 바짝 펴져서 커브가 사라져서도 안되지만 그렇다고 너무 굽어있으면 굽은 등이 되어 잘못된 자세가 되어버리죠.


이렇게 척추의 커브만 해도,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은 중용의 법칙을 잘 지켜야 건강한 상태로 있을 수 있어요. 그렇다고 이 중립 자세로 가만히 있으면 되는 거냐? 또 그렇지도 않습니다. 어떤 자세든 고정된 자세를 계속하고 있는 것은 우리 몸에 또 스트레스를 가하고, 중간중간 일어나서 조금씩이라도 움직여 주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아휴 어려워라. 내 몸 중에 한 부분인 척추의 올바른 자세만 해도 얼마나 챙길 것이 많은가요.




몸과 마찬가지로 내 마음도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죠. 인간관계에서도 그렇고,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그렇고요. 그렇다면 마음의 스트레스를 가장 효율적으로 배출하고, 활동할 수 있는 중립의 상태가 있을까요? 그렇다면 마음의 중립은 어떤 형태일까요? 사전에 따르면 중용이란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아니하고 한쪽으로 치우치지도 아니한, 떳떳하며 변함이 없는 상태나 정도’라고 합니다.


관계에서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은 선택을, 변화해가는 상황과 사람에 따라 매번 적절하게 해낸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요. 저는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이라 그냥 냅다 좋아하고 다가가고 싶어 하는 성격이었습니다. 학창 시절에 책을 읽으면서 사람 간에는 적절한 거리가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어린 마음이 얼마나 서운하고 야속하게 느껴졌는지 몰라요. 저는 꽤 크고 나서도 그 말을 여전히 서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거리 조절을 하지 못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가득 좋아해 버리고 싶어 했죠. 좋아하다 보니 어느 순간 상대방을 온전히 이해해버린 것만 같아 내 마음보다 그 사람의 마음이 더 중요했을 때도 있었고, 그렇게 누군가를 순수하게 좋아하고 한없이 주는 내 모습이 이뻐서 좋았던 순간도 있었습니다. 어느 쪽이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두 순간과 마음들이 실타래처럼 엮여서 매번 한없이 좋아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좋아하면서도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 외롭고 어려운 일로 느껴졌어요. 한없이 좋아하면 안 된다니. 매번 최소한의 거리를 두고, 어느 정도의 계산을 하고 사람을 대해야 한다니. 순수한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는 관계는 환상인 걸까? 저는 관계에서의 ‘밀고 당기고’를 적절한 타이밍에 적당한 정도로 해낼 수 있는 역량을 선천적으로 타고나지도 않았고, 후천적으로 잘 해낼 만큼 영리하지도 못한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한없이 좋아하다 보면 상처를 받을 일이 많이 생기죠. 그렇게 관계로 인해 아주 힘든 시기를 보내고, 어느 정도 괜찮아지고 나서는 사람들과 엄청난 거리를 두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와 사적으로 연락을 자주 주고받지도 않고, 한 달에 한번 사람을 만나는 것이 저의 최대였습니다. 누구도 내 삶에 끼어들지 못하게 울타리를 치고, 아주 가끔 만나서 적당한 거리의 대화를 나누는 것이 그때의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어요. 그 이상으로 사람과 엮이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사람이랑 깊게 엮이면 안 돼. 사람을 너무 좋아하면 안 돼. 가까워지려고 하면 안 돼. 기대하면 안 돼. 내 삶에 너무 많이 들어오게 해서도 안돼. 나는 다시 무너지고 싶지 않아.”


누구와 있어도 적당히 적절한 말들을 주고받는 관계만 있다 보니 내가 어느 순간 연극을 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나도 그 상대방도. 그 역할이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들만 주고받았습니다. 나의 고유한 말도, 당신의 고유한 말도 듣지 못한 채로요.


남이 보는 나는 일도 잘하고, 건강도 잘 챙기고, 혼자 있는 시간도 즐겁게 보내고, 글도 꾸준히 쓰는 사람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건 내가 그만큼만 보여줘서 그렇다고 생각했어요. 누군가를 좋아하면 거리 조절을 못하는 것처럼, 내가 잘하지 못하는 것들에는 한없이 바보 같은 내 모습을 사람들이 알게 되면 사람들이 나를 싫어할 거라고, 혹은 얕잡아보고 나를 또 갉아먹거나 힘들게 할 거라고 지레 겁먹고 다가오지 못하게 울타리를 더 단단히 쳐냈습니다.


나는 정말 노력해서 겨우 이만큼 잘하고 있는 건데, 그렇지 못하는 순간 다 나를 싫어할 거라고. 나는 모두에게 거리를 둔 채로 잘하지 못하는 내 모습이, 잘하는 내 모습이 될 때까지 노력하고, 연습하고, 잘하는 모습이 되어서야 비로소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고 그럴 때만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남들이 볼 때는 사람들이 다 나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나는 속으로 진짜 내 모습을 알면 다 실망하고 떠날 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는 건 너무 힘들고 외로운 일이었어요. 일은 물론이고 그냥 취미로 배우러 간 것도 잘하지 못하면 스트레스받고 수치스러워했고, 기어코 노력해서 웬만큼 잘 해내는 내 모습을 보면서 자랑스럽기보다는 피곤하고 힘들었습니다. 나는 무엇이든 잘하지 못하면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일까. 제발 세상 어딘가에서는 내가 무언가를 제일 못하는 모질이 이더라도, 그럼에도 친구가 있는 내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근데 신기한 건, 사람들이 나의 진짜 모습을 보고 싫어할까 봐 두려워한 것과 똑같이 나도 다른 사람들의 진짜 모습을 보고 실망할까 봐 두렵기도 했습니다. 내가 나를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도, 아무리 오래되고 믿어왔던 친구도, 어느 순간 실망할 일들이 생기고, 좋아하기 힘든 부분들이 생기는데 그런 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습니다.


어떤 드라마에서 아무리 좋은 사람도, 좋은 부분만 있지는 않았다고, 생각해보면 다 조금씩은 싫은 부분이 있었다는 대사를 보고 깊이 공감했었거든요. 사실 그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는데 저는 그냥 한없이 좋아하고 싶은 마음과, 그렇다고 그 모든 부분을 한없이 받아들일 수는 없는 내 작은 그릇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어쩔 줄을 몰라했습니다. 싫어하는 면이, 실망스러운 면이 눈에 보이고 알아채게 되는 그 순간들이 너무 힘들었어요. 그마저도 사랑해주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될 때가 많았습니다. 아무리 그 사람이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겨우 이해를 해낸 순간이 있더라도, 그 작은 긁힘으로 인한 상처들은 모르는 척을 하려고 해도, 그 사람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이해했다고 자부해봐도, 내 마음에 차곡차곡 쌓여가더라고요.


사람 간의 거리는 대체 어떻게 조절해야 하는 것일까요. 저는 한없이 다가가는 것도 해보고, 한없이 거리를 두는 것도 경험해보았습니다. 내가 삶의 어느 시점에 어떤 자세에 계속 익숙하게 있다가,  자세가  이상 나에게 건강한 자세가 아닌 것을 깨달았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굴곡도 충분히 해보고, 신전도 충분히 해보았다면요. 중립에서 너무 멀어진 나의 자세에서 중립을 찾아가는 방법은요, 지금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도전을 계속해보는  밖에는 없습니다. 저는 너무 거리를 두는 것도  이상 나에게 건강한 방법이 아닌 것을 깨달았고 지금 익숙해져 있는 자세에서, 익숙하지 않은 도전으로 가야 했습니다. 그래야  마음의 중립을 찾을  있을 테니까요. 두려운 마음을 딛고, 나의 솔직한 모습을, 숨기지 않은 모습을, 조금은 모질이 같고 뚝딱거리는  모습을, 창피하고 수치스럽지만 조금씩 드러내는 방법밖에는 없었습니다.


그게 좋은 경험이 되면 참 좋을 텐데요, 그러다가 더 큰 상처를 받는 경우도 있죠. 하지만 생각보다 좋은 경험도 많았습니다. 제 인생의 얼룩이라고 생각했던 부분들을 어렵게 이야기했을 때, 마음을 기울여 들어주고 그건 제 탓이 아니라고 진심으로 이야기해 준 사람도 있었고요. 차라리 하늘에 대고 욕이라도 한번 시원하게 하라고 했었는데 저는 그 말이 왜 그렇게 웃기고 좋았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못하는 모습을 보이더라도 수치스럽게 만들지 않는 사람도 있었고요. 내가 잘하고 완벽해서가 아니라 내가 하는 노력이 예쁘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덕분에 저는 나의 솔직한 모습도 어느 정도는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렇게 다시 다가가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안 하다가 갑자기 하면 정도가 과해질 수도 있고, 혹은 너무 방어적일 수도 있어요. 그 적정한 정도를 찾아가는 것도 제가 해야 할 경험이겠죠.



그럼 내가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도 가지고 있는, 좋아할 수 없는 부분은 어떻게 받아들이는 게 좋을까요? 내가 유독 싫어하고 불편한 부분이 어떤 사람에게 있다면 제 마음에 어떤 부분이 그걸 불편하게 생각하는지를 먼저 들여다보았어요. 소설 <데미안>에 나온 제가 엄청 좋아하는 문장인데요.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한다면, 우린 그 누군가의 모습에서 바로 우리 내면에 들어앉아 있는 무엇인가를 미워하는 거야. 우리 자신 속에 있지 않은 것은 우리를 흥분시키지 못하거든.’


예를 들어 내 의견을 얘기하지 않고 많이 억누르고 있었던 성격이었다면, 누군가 묻지도 않은 자기 의견을 거침없이 얘기하는 게 부러우면서도 한편으론 짜증 나고 꼴 보기가 싫을 수 있잖아요. 유독 나에게만 그런 것들이 있다면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내 안에 어떤 형태로 들어 있는 것인지를 살펴봤어요. 저는 강박적으로 제가 싫어하는 모습들을 닮지 않으려고 하지 않았던 것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아프고 힘들다는 표현, 도움을 청하는 것, 자기 합리화, 묻지도 않은 자기 얘기하기 등등. 이것도 다 중립을 지켜야 하는 것들이었어요. 세상을 살면서 나를 지키기 위해 아프고 힘들다는 표현도 어느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하고요, 도움을 청하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그리고 오은영 선생님께서도 사람은 어느 정도 자기 합리화와 자기 인정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그러셨는걸요. 이렇게 내가 그동안 너무 억눌러 왔거나, 강박적으로 안 하려고 했던 것들에 대해서 조금 자유로워지기로 했습니다. 그러려면 안 하든 시도들을, 내가 하지 않았던 것들을 일부러, 억지로라도 조금씩 해보면서 실행착오를 겪어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모두 조금씩 독이 있다고 해요. 저에게도 있을 거고요. 그래서 너무 오래 같이 있거나, 지나치게 가까이 있으면 나의 독도 다른 사람에게 묻을 수 있고, 다른 사람의 독도 나한테 묻을 수 있는 거죠. 그게 나쁜 게 아니라 서로 그 독을 적절히 잘 피하고 넣어두면서 만나서 서로에게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적정한 거리를 두는 것이 그렇게 외롭고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이 문장이 여러분에게도 저만큼 와닿을지는 모르겠지만요.




아무튼 몸도 마음도, 중립을 찾으려면 지금 내가 어떤 자세에 있는지를 잘 아는 것이 중요해요. 그걸 잘해서 거기 있는 것인지, 그게 익숙해서 거기 있는 것인지도 알아야 하고요. 그 반대되는 자세도 충분히 할 수 있는데 여기 있는 것인지, 그 반대가 무섭고 불편하고 피하고 싶어서 여기 있는 것인지도 들여다봐야 하죠. 그 과정 자체가 쉽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들여다보고 제대로 아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을 돌보는 것의 시작이겠죠.  


그리고 내가 왜 그 자세를 유독 불편하게 느끼는 걸까. 사실 그 이유는 다 내 마음 안에 있습니다. 인정하기가 쉽지는 않지만요. 자신을 탓하라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었던 내 마음을 인정하고 알아주고 그 반대되는 도전들을 조금씩 해가 봅니다. 실행착오를 겪어가면서 나에게 적정한 중립을 찾는 거죠.


익숙한 자세에서, 익숙하지 않은 움직임과 자세로 조금씩 가봅시다. 그렇게 몸도 마음도 중립을 찾아갑시다.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받는 스트레스와 충격을 효율적으로 잘 배출하면서, 나에게 적정한 자세를 찾고, 또 최선의 전략으로 삶을 마주할 수 있도록이요. 다른 것을 할 수 없기에, 피하고 싶어서, 그저 익숙해서 이 자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움직임을 경험해보고 능동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내 몸이, 내 마음이 될 수 있다면 나는 어디에 있든 자유로운 내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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