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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 나폴리 일기 01

by 돌멩

23년 여름 지독한 허리통증에 시달리며 베를린에서의 인턴쉽기간을 마칠 즈음 2년 동안 머물렀던 베를린의 집 계약이 끝났고. 얼마 되지 않는 짐들을 베를린 krumme lanke의 한적한 동네의 한 오래된 아파트 3층의 작은 방으로 옮겼다. 그리고 다음날 이른 아침, 나는 친구 아리아나가 있는 나폴리행 비행기를 탔다.


2023년 9월 1일 여름휴가를 가장한 베를린 탈출, 나폴리로의 도망의 날. 새벽부터 이어진 허리통증을 잊으려 먹은 진통제에 느껴지지 않는 통증은 오히려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고 이른 시간 공항의 차가운 공기에 역겨운 기분까지 들었다. 찌뿌둥한 몸을 안고 비행기에 올랐다. 이제 더 이상 여행도 즐겁지 않아 버린 걸까. 여행이 아니라 베를린으로 부터의 도망이니까.. 알 수 없는 불안, 지독한 외로움으로부터의 도망.


2년 만에 본 반가운 얼굴들, 똑같은 티셔츠와 순박하고 따뜻한 미소로 반겨주는 아리아나의 가족들. 아리아나 가족은 나폴리의 작은 마을 st. agnello에서 작은 펜션을 운영한다. 아리아나와는 5년 전 영국 브라이튼에서 만나 지금까지도 연락하고 지낸다. 아리아나는 내가 아는 친구 중 가장 순박한 친구인데 이탈리아 밖으로는 영어를 배우러 6개월 영국이 처음이자 마지막. 자기가 사는 곳이 충분히 좋아 여행의 필요성을 모르겠다하고 비혼주의는 아니지만 연애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는 친구 그리고 토마토 파스타를 가장 싫어하는 토종 이탈리아 사람이다. 이 친구에게 내가 가장 많이 듣는 말은 ‘you are crazy’. 나와는 정반대인 이 친구와 나는 그렇게 친구가 되었다 서로의 다른 점이 신기해서 그게 또 좋아서.


가족들과 반가운 인사를 하고 방으로 올라가 짐을 풀고 누워 아픈 허리를 풀었다. 2주간 친구 방에서 신세를 지기로 했다. 2년 만에 온 아리아나네 집에는 주노라는 귀여운 아기 병아리 가족이 생겼다. 주노는 이곳저곳 똥을 싸면서 해맑게 뛰어다닌다. 이 조그만 사랑스러운 아기 병아리를 똥을 싸서 싫다며 밀어내는 한결같은 내 친구 아리아나도 변함없는 미소로 2년만에 보는 나를 안아주는 아리아나 가족들도 건강한 오렌지 나무들과 초록 잎들도 새파란 하늘도 모두 그대로였다. 안도감이 들었다. 여기선 괜찮겠다. 안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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