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리에는 편한 옷 두세 벌, 수영복, 운동복 그리고 나의 작업용 맥북과 논문 연구를 위한 두꺼운 호미바바의 서적 한 권을 가져갔다. 베를린에서의 학사과정의 마지막 학기였고 졸업논문을 써야 했기에 쉬러 간다고 했던 나폴리에서도 나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던( 나 스스로 만든) 부담은 함께였다. 해결하고자 했던 숙제들이 참 많았다.
머릿속의 생각은 도무지 쉬지 않고 쌓여 나갔고 졸업논문과 디자인 프로젝트, 24시간 내내 사라지지 않는 허리 통증, 알 수 없는 불안감( 몇 개월 후 결국 돌아온 한국에서 나는 높은 수준의 불안과 우울증을 진단받았다)이 있었고 그 사이사이 살고 싶어 애써 찾아본 희미한 희망과 다짐이 머릿속을 안개처럼 뿌옇게 뒤덮었다
이탈리아에 오고도 일주일이 지나도록 그 어떤 것도 해결되지 않자 나는 진짜 무너졌다. 허리 통증은 오히려 더 심해졌고 불안은 그대로였다. 한국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엄마아빠한테 전화를 걸었다. 허리가 아프다고 했다. 허리 때문에 정신이 나간다고. 휴학을 하고 한국에 돌아가겠다고 했다.
힘들면 들어오라는 엄마, 정신 똑바로 차리고 버티라는 아빠 그리고 옆에서 힘들어하는 나를 보는 아리아나도 나약해지지 말라며 너는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야 포기하 지마를 외친다.
응 나도 알아 머리로는 알겠는데 정신적으로 나약해진 내 이성은 어디 가고 이미 없었다 나는 그냥 너무 힘들어 무섭고 못할 거 같고 그냥 너무 무서워 나 못해.. 나 못하겠어. 나약한 나를 탓하며 채찍질하며 하루하루 더 아파졌다.
그날 저녁 동네를 이리저리 걷다가 우연히 작은 성당을 발견했다. 조용한 성당 안 맨 뒷줄에 혼자 앉아 십자가를 바라보고 앉아있었다. 제발 도와달라고 했다.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그냥 좀 도와달라고 했다. 하나님이라고 했는지 예수님인지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한테 외쳤는지 모르겠다 그냥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그렇게 외치고 성당을 조용히 나왔다. 속이 조금 시원해진 기분이 들었지만 달라진 건 없었고 집에 돌아가 잠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신기했다. 짓누르던 불안과 머릿속을 떠다니던 안개들이 조금 잔잔해졌음을 느꼈다.
어제저녁 성당에서 나는 진정으로 그냥 포기를 외쳤던 것 같다. 나약하지 않다고 버틸 수 있다고 참아내던 나 자신을 비로소 내려놓았던 것이다. 그로부터 벗어났다 자유로워졌다. 거짓말처럼.. 몇 개월 동안 괴로웠던 마음이 한순간에 편안해짐을 느꼈던 순간이다 (잠깐이었고 모든 게 해결되진 않았지만 치유의 시작이었던). 나는 살려달라고.. 밖으로 외쳤다. 그 외침도 결국 용기였다. 도움을 요청하는 용기. 나 자신에게 속으로 대뇌이지 않았고 나약한 항복이 아니었으며 도움을 요청하는 용기였다. 나에게 필요했던 것은 참아내는 노력이 아니라 내려놓는 용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