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하게도 싫었다.
겁쟁이, 울보, 소심이
‘어머 우리 겁쟁이가 혼자 어떻게 했데?’
‘에라이 너같은 울보가 그걸 어떻게 하니’
어른들의 장난아닌 장난 앞에서
얼굴이 빨개지고 터져 나올것 같은 울음을
속으로 겨우 삼켰던것을 그때 그 어른들은 알았을까?
태어나보니 자신은 겁쟁이었다.
겁쟁이가 정말 무엇인지도 모른채 그저 어딘지 부끄러운 것이라는 것만 느낀채 두번째 이름을 갖게 된다.
빠른 년생이라 초등학교를 일찍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울보여서 학교를 일년 늦게 들어갔다는 꼬리표는
성인이 되어서도 떨어지지 않았다.
어린 겁쟁이는 약한것은 창피한 것이고
숨겨야 하는 것 이라고 배운다.
아니 자연스럽게 그것이 세상의 이치임을 눈치로 배운다.
그리고 그 세상의 이치는 그대로 자기 자신을 향한다.
겁쟁이는 이 세상이 더욱 두려워 숨고 싶다. 그렇게 진짜 겁쟁이가 되었다.
태권도 품띠를 따는 겨루기 심사가 있던 날, 아이는 심사 하루 전 날 태권도를 그만 두었다. 그 아이는 태권도라는 스포츠 정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그저 그 심사 날은 누구와 싸워 패배시키고 내가 이겨야하는 무언가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피아노 콩쿨대회 하루 전날 다니던 학원을 그만 둔 그 아이는 대회에 나가는 것이 두려워 도망간 겁쟁이가 아니었다. 모두가 자기만 주목하는 그 공기와 평가받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편하지 않았다.
그저 잘 몰랐다. 왜 나가서 피아노를 연주해야하는지.
아이는 그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느리게 가는 것일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진지하고 차분하게 자기의 마음의 소리를 듣느라 시간이 조금 더 걸렸을 뿐이다.
울고 싶을때 마음껏 울었고 좋은건 좋다고 싫은건 싫다고 표현했다. 무엇을 더 했어야 아니면 하지 않았어야 그들은 나를 겁쟁이라 부르지 않았을까. 아니 겁쟁이어도 괜찮다는 말을 해줄 수 있었던 어른은 왜 없었을까
겁쟁이라는 아이는 묵묵히 자기 자신의 마음의 소리를 따라 걸어가고 달리고 넘어지고 또 일어나 나아갔다.
그렇게 겁쟁이는 30살 어른 겁쟁이가 된다.
달라진건 없다 여전히 자신의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마음이 시키는 일을 따른다. 자신에게 언제나 진실하려고 노력한다. 여전히 남들보다 느리지만 넘어지지만 또 일어나 걸어간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이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겁쟁이라는 이름에
울음을 삼키지 않는다. 두려워 하지 않는다.
그때 그 겁쟁이라는 말이 너무나 무서웠던 그 겁쟁이는 이제는 안다.
말이라는 것이, 언어가 단어가 얼마나 가벼운 껍데기일 뿐일 수 있는지
또 그 가벼운 껍데기가 가져올 수도 있는 지독히 끔찍한 폭력의 모순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