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듣기 좋은 목소리와 그렇지 않은 대화들

캐럴을 뚫고 들어오는 괴로운 중저음에 귀를 막다

크리스마스트리와 반짝이는 설치물로 가득한 인테리어. 기분 좋은 현란함으로 가득한 지금은 12월 초, 크리스마스 캐럴이 카페 전체에 울려 퍼지고 있다. 한산한 카페의 소파에 앉아 노트북에 손가락을 올리고 있다. 주변에 노트북 작업하는 사람들만 다섯 테이블이 더 있는 이곳은 머무르기 좋은 투썸플레이스다. (사장님 입장에서는 객단가가 낮은 사람 다섯 명이겠지만, 이런 분위기만큼 좋은 곳이 어디 있겠나 싶어서 눌러앉았다)


공간을 가득 채우는 캐럴 배경음악 사이에서 나는 유선 이어폰을 끼고 앉았다. 흘러나오는 음악은 R&B 장르다. 두 음악을 서로 섞을 순 없지만, 어떤 소음을 막아내는 데는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그렇다. 두 명의 중년 아저씨가 듣기에 나쁘지 않은 중 저음으로 월드컵 이야기에 빠져 있다.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16강에 진출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포르투갈 경기를 6시간 앞두고 있는 시점이다. 게다가 오늘 아침에 불명예스러운 뉴스를 접했다. 2022년은 월드컵에서 패배를 가장 많이 한 나라라고 보도했다.


아저씨들은 가나전에서 유난히 유효슈팅을 골로 연결하지 못한 특정 선수를 비롯해 전반전에 4골을 넣을 수 있었는데 넣지 못한 것을 꼬집으며 볼멘소리를 늘어놓았다. 48시간도 더 지난 이야기를 선수와 분석관이 아닌 이상 굳이 되짚을 필요도 없을 것 같은데, 그 아저씨는 감정이 격해진 상태로 답답함을 호소했다. 또 우리보다 먼저 일본이 16강에 오른 것, 코스타리카, 벨기에, 브라질 등 주요 나라들의 전술을 하나하나씩 짚어가며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눴다.


크게 울려 퍼지는 해설가의 소리가 크든 작든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영상을 되돌려 보기도 했다. 이 지점에서 누가 잘했고, 누가 잘못했는지 하나씩 짚어가면서 인터넷 강의 듣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복습을 거듭하는 아저씨는 마치 축구 경기 분석가일까 싶을 정도로 매우 진지했다. 언뜻 보기에 젠틀한 신사의 얼굴을 한 아저씨는 축구를 보면서 느꼈던 답답함을 지금 이 카페에서 풀고 있고 굉장히 시끄러웠다. 그렇다고 자유롭게 카페를 이용하는 데 그를 탓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저씨 둘의 축구 이야기에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첫째는 적절하지 않은 전체 분위기. 지금 이 카페는 낮은 캐럴 음악을 배경으로 노트북 작업하는 사람들의 비중이 크다. 아저씨들이 조금만 목소리를 낮추면 될 것 같은데, 공개적으로 요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헛기침을 하면서 나름 표현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둘째는 월드컵에 대한 미련의 감정이다. 가나전에서 우리나라는 패했다. 졌지만 정말 열심히 해준 우리 선수들을 욕할 수 없다. 정말 잘 싸워줬는 데 골 결정력에서 자꾸만 한숨이 새어 나온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전반전에 전 국민이 답답함을 느꼈던 그 부분을 다시 한번 중저음의 아저씨가 복습해서 그때 그 감정을 불쑥 올라오게 만들었다. 가나전 때는 나도, 옆 자리 노트북 작업자도, 이 카페에 종업원도 잘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모두가 한 마음으로 축구를 봤을 것이다. 그 아깝고 아쉬운 날의 기억을 이제는 놔줬으면 좋겠는데, 뉴스를 통해 한번, 아저씨들을 통해 두 번 되짚는 행위가 나를 불편하게 했다. 이 와중에 목소리는 또 너무 좋아서 이어폰 속으로 뚫고 들어오는 것이 괴롭다. 나도 너무 아쉬웠는데 다시 돌이켜 보기엔 정신적으로 피곤한 일이 되는 것이었다.


셋째는 해설가 자격도 아닌 그들의 분석 능력 때문이었다. 이미 뉴스가 알려준 내용을 더 듣고 싶지 않았다. 아저씨들은 전직 축구 해설가들이었을까? 목소리가 굉장히 좋고 축구 영상을 되돌려 보면서, 선수들의 폼과 시나리오, 대진표, 16강 진출의 가능성까지 세세하게 분석하는 데 과연 정도로의 지식이라기엔 시간 낭비 수준으로 아는 것이 많으신 중저음 아저씨 두 분. 여기서 제발 그 대화를 끝내면 안 될까요 아저씨


넷째는 일본의 16강 진출을 질투하면서 계속 강조하는 것이다. 일본이 16강 진출한 게 질투 나면서도 부럽다. 아저씨는 일본 사람들의 반응과 태도, 일본이 축구 경기한 소식까지 듣고 싶지 않은 데 아주 젠틀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부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결과만 듣고 싶은 뉴스도 있는 법이다. 우리나라도 패기 있게 경기에 임하고, 불패 행진을 이어나갔다가 16강 진출하고 싶은 데, 아저씨 여기서 그만하면 안 될까요?


다섯째는, 누구도 잘못한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카페는 자유롭게 누구나 대화할 수 있고, 노트북 작업을 할 수 있도록 와이파이 비밀번호까지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인데, 나는 중저음의 아저씨 둘을 욕할 수 있는가? 그건 아니다. 아저씨도 아저씨가 원하는 주제로 떠들 수 있는 자유가 있고, 나도 한숨을 푹푹 쉬면서 노트북을 들고 조금 더 조용한 환경이 되길 원할 자유가 있다. 불편하지만 누구나 감수해야 하는 우리는 한 공간에 있다.


크리스마스 캐럴로 ‘Baby it’s cold outside’를 들으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데 동시에 이어폰 속으로 들어온 R&B 음악의 불규칙적인 애드리브 속에서도 중저음 아저씨의 젠틀한 목소리가 자꾸 들어온다. 코스타리카, 일본, 브라질, 벨기에.. 퀴즈를 만들 수도 있겠다. 다음 중 아저씨가 언급하지 않은 나라는?


아저씨, 사실은 저도 한 마음인데요. 축구 이야기를 묻고 싶은 이유는 아쉽고 미련이 많이 남아서 그래요. 제발 그 축구 소리 좀 그만해 주시면 안 까요?

작가의 이전글 김치냉장고 X엄마손 1년 김장 사이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