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고 성공을 안 하고 싶겠어?
매일 글을 쓰는 게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12월 31일까지 30개의 글을 쓰겠다고 스스로 약속했다. 아직까지 3분의 1만 채웠다. 아직 시간은 있지만 밀린 글을 채우는 것마저 쉬운 것이 아니었다. 처음 시작한 이유는 나의 생각을 글로 옮기고, 글을 읽기 쉬운 형태로 만들어내는 단계별 연습을 하기 위해 서였다. 나의 연습을 꾸준히 기록해 가는 것이기도 하고, 내가 생각한 것을 글로 뽑아내면서 생각 정리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양다솔 작가님이 그랬다.
쓸모없다고 생각되는 것이라도 계속 적으세요.
글을 쌓아가세요.
글을 쓰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 더 많이 써두세요.
요즘 나의 근황은 단순하게 살고 있는 것이다. (22년 12월 기준) 지난달 18일에 퇴사를 했고, 약 7일 동안 알바를 했으니까 실제로 프리랜서처럼 일상을 보낸 지는 약 2주 정도 된 것 같다. 아직은 평온하고, 세팅 단계에 있다. 지금처럼 하면 될까? 싶지만 지금은 열심히 사람들 만나서 나의 신상에 대한 변화를 알리고 내가 왜 이 방식을 결정했는지 거듭 이야기를 꺼냄으로써 스스로 그 약속을 견고하게 만들어 나가게 된다. 타인에게는 언젠가 나를 떠올릴 만한 여지를 두는 차원이니까 잠재적으로 소득이 아예 없는 것만은 아니다.
현실적으로 당장의 성과는 없다. 나는 ESG 분야에 발을 담그며 기업은 재무적 성과보다 비재무적 성과에 가치를 두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작 스스로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결과만 당장 좇으려 했던 것 같기도 하다. 5일 동안 다른 짓을 꾸미고 있다. 하고 싶은 일을 찾고, 발견하면 바로 수익으로 이어질 수 있는 방법을 서치 하고, 휴식을 취하고 꾸준하게 글을 써나가는 점에서 열심히 정도는 아니어도 성실하게 살고 있다.
겨울이 시작되고 처음으로 힘든 바람과 힘든 눈이 내리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 나의 속이 어지러운 이유는 내가 가려던 길에 제동이 걸려서 그렇다. 피곤과 심난이 몰린 엄마는 내가 당장 출근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불안감을 느껴서 내가 프리랜서로 사는 것 없었던 일로 하면 안 되냐는 말을 꺼내셨다. 그럴 때 어떤 이유로 그랬는지 묻기도 전에 단박에 “싫다”라고 대답해 버렸다. 엄마는 더 화를 냈다. 내가 엄마가 가진 불안의 감정을 해소해 줄 수는 없었다. 내가 조금 매정한 태도로 대답한 게 문제였음을 반성한다.
내가 서운했던 건, 내 결정에 대해 내가 실패하지도 성공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덜컥 없던 일로 하면 안 되냐면서 물어본 것이다. 엄마의 말대로 풀타임 직장인 이직할 준비를 다시 시작한다거나, 다시 직장인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부모님의 말을 또 듣는 것이 된다. 나는 아직 세팅 단계에 있어서 시간을 들여서 내가 결정한 일을 추진하기만 하면 된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느냐? 그것은 또 아니지 않나? 나는 지금 생각을 멈추지 않고 24시간 풀 체제로 가동하고 있다. 그 증거는 습관적으로 앙 다문 입과 관자놀이의 압력이 잘 때도 느껴진다. 그렇다고 스트레스받거나 감정적으로 피곤한 상황은 아니다.
내가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플랫폼을 찾아 프로필을 등록한다. 내가 사회에서 제대로 쓰일 수 있도록 여러 곳에다가 나를 표현한다. 엄마는 디지털 세계에서 이렇게 내가 적극적으로 활동하는지 알지 못한다. 당연하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내가 집에서 태평하게 누워있다고 해서 결심한 백수처럼 아무것도 안 하고 사는 것이 아닌데, 소파에 앉은 나를 마주치자마자 걱정과 함께 나를 그렇게 대한다. 엄마는 당신이 복이 없어서 내가 이렇게 사는 거라고 했다. 엄마의 피곤함은 결국, 엄마의 인생 전체를 비관하는 발언으로 빚어져 날이 선 발언을 내 앞까지 던졌다. 그런 얘기를 꺼내는 건 아닌 것 같다. 앞서가도 한참을 앞서갔다. 누가 보면 내가 2억 정도 빚을 지고도 속 편하게 앉아있는 사람인 줄 알겠다.
내가 회사에 다시 돌아가지 않는 이유와 내가 결혼을 아직 이 나이에 하지 않은 것+ 오빠가 시험에 실패하고 취업을 하고, 멀쩡한 회사에 들어가 고군분투하면서 사는 것, 하지만 오빠가 결혼할 여자를 찾지 못한 것이 우리 엄마의 복에 어떤 연관이 있을까? 오히려 대기만성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 애들이 늦는 가보다 하고 여유를 갖거나 자포자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못나서 그렇다. 내가 애들을 잘못 키워서 그런다’는 둥 자책을 하고 있으니 내가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뭐라고 할 수가 없고, 뭐라고 해봤자 불똥에 더 큰 불을 지피는 꼴이 된다. 엄마와 한판 붙기도 싫고 귀찮은데, 속에서 튀어나오는 말들이 결국 나를 감정에 휩싸이게 하지만 그럼에도 이 갈등은 의미가 없고 또 피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집에 있다고 해서 백수가 아니라, 나는 지금 애매한 상태이지만 어디에서나 가능성이 열려 있기 때문에 애매하다는 표현에 더 가까울 것이다. 애매할 때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는 편인데, 지금 엄마는 나를 실패자로 간주하고 있는 게 열이 받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내가 더 조급해했을 것이다. 나는 할 만큼 하고 살기 때문에 지금 당당하다. 내가 주체적으로 선택한 길이고 내가 결정한 길에 당당하게 걸어 다니기만 하면 되는데 엄마의 불안이 나까지 덮쳐오려고 할 때 나는 그 알람에 기민하게 알아차리고 알아서 대처해야 한다.
30-40대는 부모님께 입신양명으로 효도하기에 가장 적합하 나이인 것은 맞으나, 시기에 따라 모두가 조금씩 타이밍이 다르게 찾아올 수 있다. 확실한 것은 우리 집은 그 속도가 매우 늦나 보다. 남들과 비교했을 때 아무것도(부모님의 기준: 취업 다음 단계로의 의무) 가지고 부모님은 답답해하고, 욕심을 부릴 것이 아니라 조금 마음을 비우고 우리 애들은 뭐가 없다고 마음을 버렸으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다.
나라고 성공을 안 하고 싶겠어? 그러나 나도 나만의 때가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꾸준히 내 갈 길을 가는 것뿐이다. 흔들려도 금세 다시 활력을 되찾자. 내가 캥거루라서 우리 엄마 아빠의 기분과 감정에 맞춰 적절하게 대응하면서 살았더니, 정작 부정적인 감정에 휘말렸을 때 잘 휩쓸리는 것 같다. 빨리 인식하고 빠르게 벗어나자.
엄마 아빠의 조급함은 부모님이 느낀 감정이다. 두 분이 불안해하고 걱정하는 것일 뿐 내가 지금 불안한 상태도 아니고 내가 조급함에 안달 난 게 아니다. 나는 때를 기다리면서 준비된 자로서 살고 있는데, 잠시 흔들리는 요소일 뿐이다.
이러한 상황도 다 지나갈 것이다. 왜냐면 이것은 오빠가 수능을 마친 뒤, 내 수능이 돌아올 때 그 부담감이 나에게 전해진 상황과 같아 기시감이 들기도 한다. 이번에도 오빠가 집을 나감으로써 오빠가 받던 부담감이 고스란히 나에게 전해지는 조금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나도 굳이 흔들리거나, 꼭 증명해 내거나, 설득할 필요는 없다.
결국에는 다 잘 될 것이다. 나는 희망을 갖고 계속해서 만족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것이지 망치려고 사는 것은 아니니까. 부모님이 느낀 부정적인 감정을 내가 고스란히 받지는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