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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하기에는 창피한 공주 워크샵

2년 만에 호캉스 즉흥파티

나의 취향과 화려한 파티+고급 와인에 핑거푸드+도심지 호텔에서 호캉스는 무척 거리감이 드는 단어이다.

화려한 파티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간단하게 펼쳐 놓고 우리끼리 음악 깔고 수다떠는 것을 파티라고 한다면 나는 파티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요즘 미디어가 말하는 호캉스를 좋아하는 파티 피플의 정의를 한수위 무난한 단계로 내려준다면 내가 거기 포함되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고급와인에 핑거푸드를 즐기지 않지만, 특별한 날 와인샵에 들러 캐주얼한 와인을 사거나 논알콜을 사는 것, 가벼운 육포나 배달음식을 손으로 가볍게 들고 먹는 마른 안주는 좋아하는 편이다.

고급 호텔은 예약할 생각도 없지만, 이유없이 날짜를 정해놓고 무난한 호텔을 예약해 우리끼리 방을 잡고 시간을 보내는 거라면 나는 호캉스를 즐기는 편이다.


나는 그냥 편한 친구들과 노는 걸 좋아할 뿐이다. 적당하게 안줏거리를 펼쳐 놓고 묵혀 뒀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 의미 없는 이야기들, 결론도 없는 이야기들을 친구와 세세하게 펼쳐 놓는 자리라면 너무 좋다. 우리들의 이야기에는 결론이 없고, 생산적이어야 할 이유도 없으며 교훈이 전혀 필요 없다.


무난한 파티피플인 나와 코드가 맞는 B언니와 2020년 연말에 서울 서대문에서 다시 만났다. 언니와는 시드니 인턴 시절, 파크아파트에서 룸메이트로 지냈던 인연이다. 지금까지 쭉 연락하고 지내는 사이가 된 데는 미술을 좋아해서 시드니 아트 갤러리와 연결 고리가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 그 곳 인턴을 했던 나는 한국으로 돌아올 시점에 갤러리 관장님이 열어준 송별회에 B언니를 초대했다. 그후로 언니와 룸메이트 이상으로 더 가까워진 것 같다.


대학교 3학년, 인턴의 경험을 이력서에 한 줄 담고, 자기소개서에 남다른 경험과 갈등을 극복한 스토리를 담아도 모자를 판에 나는 미술 전공도 아니면서 NGO에서 운영하는 갤러리에서 무급으로 일을 했다. 취업을 위해 글로벌 기업, 국내 대기업의 호주 지사에서 유급으로 일했던 친구들과 달리 나는 별난 결정이기도 했다. 오후 12시 출근해 오후 6시에 퇴근했다. 5시 반부터 샴페인을 무료로 즐길 수 있고, 자발적 야근으로 남아 전시 오프닝 나잇에서 아티스트와의 대화를 즐겼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국내에서 접할 수 없던 이색 경험을 호주에서 한 것이다. 내가 이 경험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 지 알아주는 건 아마 B언니 밖에 없을 것이다.


그 후로 나는 한국에서 취업. 언니가 싱가폴에서 일할 때 나는 겨울 휴가로 싱가포르에 갔고, 내가 부산으로 출장 갈 때 언니를 불러 같이 휴가를 보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그림도 그리는 B언니. 우리 둘은 평범한 사람이면서도 호주 갤러리에서 배워온 아티스트를 흉내내는 감성 허세 같은 면이 좀 있다. 우리만 조금 통하는 면이 있다. 그 다음은 서울에서. 이번에는 광주에서 만났다.


우리의 즉흥파티는 2020년부터 시작됐다. 파티 피플 처럼 놀자는 이야기에 편의점에서 찾아낸 아이템들을 호텔룸을 꾸며 우리끼리 즐겼다. 예를 들면 스타킹을 사서 머리 밴드로 쓰고, 철 수세미를 풀어헤쳐 가랜드로 만든 다음, 주방 장갑과 양말을 널어 놓아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냈다. 그런가 하면 각종 젤리를 사서 통유리에 붙였는데, 이게 어떤 효과가 있냐면 시티팝 BGM이 잘 어울리는 도심 속 야경에 상어 젤리가 헤엄치고, 과일 젤리가 헤엄치는 것 처럼 연출되는 것이다. 모두 우리 둘이 편의점을 돌면서 펼쳐낸 상상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편의점에서 10바퀴 정도를 뱅글뱅글 돌고 끝내 계산대로 가져갔을 때, 편의점 사장님은 한 마디하셨다.


“두 분 진짜 인생 재밌게 사신다.”

하하하. 우리도 알아요. 우리가 재미있게 사는 거! 우리의 본 모습에는 틀에 박힌 것을 싫어하고 즉흥적이고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면이 있다. 게다가 화이트 와인을 한잔 들고 살짝 취기가 오르면 딱이다.

얼마전 배우 한소희가 유행을 이끌었던 다이소 공주놀이 세트를 B언니가 선물로 챙겨왔다. 올해는 파티를 공주 컨셉으로 잡았다. 다이소에서 바구니를 들었다. 방을 어떻게 꾸밀지 각자 상상해본뒤, 필요한 도구들을 샀다. 화려한 포토존, 꽃모양 풍선, 공주 캐릭터 컵, 크리스마스 컨셉의 눈사람과 리스. 게다가 우리의 밤은 기니까 프로그램 요소를 가미했다. 7세 유아용 종이접기, 점토 클레이 등등. 평소에는 접하지 않는 것들을 공주라는 이름으로 건드려보는 것이었다.


1교시: 공주는 복잡한 것이 싫어요

피카추 종이접기 시간. 7세부터 따라할 수 있다고 했는데 문해력이 필요했다. 말로 된 설명은 좀처럼 따라가기 쉽지 않았다. 우리는 설명서를 따라하면서 꼬부기, 파이리는 곧잘 만들었지만 정작 주인공인 피카츄의 귀는 완성해내지 못해 포기하고 말았다.


2교시: 공주는 고상하게만 살고 싶어요

브런치로 나온 메뉴를 종이접기로 만들어 보는 시간. 가위가 없으면 안 되는 활동이었다. (다이소 종이접기 코너를 방문한다면, 꼭 가위가 필요한 재료인지 아닌 지를 따져보기 바란다.) 조금 황당하게도 내가 아는 브런치는 소시지 베이건과 스크램블드 에그 정도였는데, 종이접기가 차려준 브런치는 쌀밥과 돈까스, 단무지와 베이컨이였다. 베이컨과 단무지는 가위가 필요해 공주들의 연약한 손톱으로 종이를 잘라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주 메뉴인 쌀밥과 돈까스는 따라하기 쉽지 않은 고난이도 종이접기 스킬이 필요했다. 고상한 공주들은 과감하게 브런치를 포기했다.


3교시. 공주는 끈기가 없어요

클레이 점토로 디저트 만들기 시간. 그림을 그리고 디테일한 감각을 다룰 줄 아는 B언니는 클레이 점토를 할 때 가장 집중력이 좋았다. 반면에 나는 종이접기를 조금 더 잘했는데, 사실 제3자가 본다면 둘 다 고만 고만일 것이다. 종이접기는 설명서를 그대로 따라해야 결과물을 완성할 수 있는 반면, 디저트 클레이 역시 어렵고 맘에 들지 않아서 아무거나 만들기로 했다. B언니는 산타클로스를 만들었고 나는 생크림 짜는 기계를 이용해 트리를 만들었다.


4교시. 공주는 아날로그 감성을 좋아해요

순서대로 샤워를 하러 들어간 사이 크리스마스 카드를 썼다. 오글거리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24시간 전에는 절대로 편지 봉투를 열지 않기로 했다. 우리는 또 통해버렸다.

서로의 편지에 ‘우리 1년에 한번씩은 꼭 만나서 이런 짓 같이하자’


우리만 아는 크레이지 행복 파티. 참고로 우리만 아는 공주 워크샵은 영어로 진행됐다는 것이 더 쇼킹. 영어를 매우 유창하게 언니에게 곧 Opic AL에 도전할거라고 말하면서. 언제 이런 짓을 하면서 살겠냐 깔깔대면서 우리는 내년의 즉흥파티를 기약했다. 나이가 들어도 이 짓을 계속 하고 싶다. 하지만 절대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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