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로 사랑했네 해처럼 맑게>를 다 읽고
괴테의 책을 찾아보게 된 계기는 N잡러 강의에서였다. 백세시대에 한 개의 직업만으로 사는 것 보다 최대한 많은 직업을 가져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는 나에게, 강연자 님께서 솔깃한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괴테의 직업은 시인, 비평가, 언론인, 화가, 무대연출가, 정치가, 교육가, 과학자. 세계 문학사의 거장이며, 다재다능한 사람이라고.
고전에 대하여 알 듯 말듯한 내게 괴테는 그저 옛날 사람 정도에 불과했었다. 그런데 나와 같은 가치관을 추구하는 위인이 있다고 하니 찾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괴테의 자서전은 도전하다 포기할 만큼 너무 두꺼워서 읽을 자신이 없었다. 괴테 자서전 근처에 서 발견한 이 책은 전영애 번역가 님이 쓴 에세이. 그녀의 책은 독일의 대문호 괴테에 대한 애정이 기반에 깔려 있지만 나는 괴테를 모르는 사람이라서 더욱 유심히 찬찬히 세심하게 읽어볼 수밖에 없었다.
금수저라서 독일 유학을 갔던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기회를 잡기 위해 치열하게 살았고, 독일에 가서도 힘든 생활을 하며 학업을 이어나갔던 전영애님의 사연을 알게 됐다. 그러면서 나는 대단한 외국 문학 책 이면에도 대단한 지식인들이 있다는 게 새삼 놀라웠고, 비하인드 같은 그녀의 이야기를 읽어나가는 게 기분이 너무 좋았다. 요즘 들어, 책을 통해 새로운 인사이트를 얻고 새로운 시각을 얻는 것 자체가 너무 즐거운 경험이기도 하다.
52p. 경황없이 살아왔을 뿐더러 번듯해 보이는 학벌과는 달리 어려운 여건에서 공부를 하다보니 거의 독학이라 어렵사리 구한 책들이 너무도 귀해서 일일이 번역을 해가며 읽었고, 다 읽고는 그것에 대해서 글을 썼고, 쓴 글이 또 모이면 연구서로 묶기도 하며 살아서 -어쩌다 우연히 기회가 있으면 그 원고들이 책이 되기도 했으나-책이 된다는 보장으로 책을 쓴 일은 거의 없고, 그렇듯 허겁지겁 읽고 쓷고 살다보니 쓴 책들 마저 손에 없는 사태가 벌어졌던 것 입니다.
58p. 뒤처진 새-라이너 쿤체
철새 떼가, 남쪽에서 날아오며/ 도나우강을 가로지를 때면, 나는 기다린다/ 뒤처진 새를/ 그게 어떤 건지 내가 안다/ 남들과 발맞출 수 없다는 것
어릴적부터 내가 안다/ 뒤처진 새가 머리 위로 날아 떠나면/ 나는 그에게 내 힘을 보낸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넓디넓으니, 조금 뒤처지더라도 괜찮을것이라는 큰 위안을 주는데, 뭐든지 느린 나에게 진짜 진짜 힘이 되어주는 말이다.
71p. 조개가 연한 살을 내미는 곳은 짠 바닷물입니다. 우리의 세상과의 만남은 연한 살이 소금물에 닿을 때처럼 아플 수 있습니다. 언제나 하고 있는 일에 충실하면서, 상황에 따라, 그 상황이 어떻든 자신의 사고를 유연하게 열고 옮길 수 있는 힘, 그런 힘이 진정 큰 힘인 것 같습니다.
78p. 세상은 험하고, 때로 잔인합니다. 그러나 시인에게는 그에 대한 바른 인식이 있습니다. 그 어떤 호도도 없습니다. 적확한데, 때로 혹독하도록 적나라합니다. 나 자신이 어디서 어떻게 앉고 설지, 들고 날지, 걸어갈지 멈출지는 내가 정할 수 없겠지만, 세상에 대해서는 대책이 없습니다. 정확한 인식만이 유일한 대안입니다. 바른 인식은 상황을 견딜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험함, 어려움에 대해서야 굳이 길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까요. 살다 보면 다 알게 됩니다. 알 수밖에 없습니다.
정확한 인식이라는 것.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묵묵하게 내가 걸어가야겠다고 다짐하면 되는 것 같다. 여기서 좋다, 나쁘다, 내가 모자라다, 내가 별로다라는 판단 같은 것은 내리지 않는 것이 좋은 것 같다. 비교라는 키워드가 반영되는 순간 사회의 줄타기에서 나의 순서가 매겨지기 때문에. 조금 늦어지더라도 꼭 이루면 된다. 어떤 길이든 도착만 하면 되듯이. 나의 방법 대로 가면 나온다고. 잔인한 세상에서 올바르게 인식하고 꿋꿋하게 걸어나가면 그것으로 되는 것 같다.
79p. 감사할 줄 모르면, 그대가 옳지 않은 것이고/ 감사할 줄 안다면 그대 형편이 좋지 않은 것: 감사할 줄 몰면 네가 사람이 나쁜 것이고/ 감사할 줄 알면 네가 어려움을 많이 겪고 있는 것이다.
97p. 아직도 농부 노릇이 서툴지만 그럼에도 농부가 농사를 짓지 않을 수 없고, 밭일 좀 한다고 책을 안볼수야 더더욱 없으니 주경야독이 두루 극에 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때로는 몸이 정말로 부서지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고맙게도 일 좀 줄이라고 걱정을 해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줄일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고 있는 일들 중 어느 것 하나 허투루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108p. 사랑이란, 그 어떤 지침을 받아서가 아니라 저절로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때로는 거역할 수 없게, 그냥 그 마음이 일어나기를 바랄 뿐입니다.
162p. 어쩌면 분노와 자기의 일을 해나가는 게 그리 어긋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요. 요즘 우리는 불합리하게 자기 삶을 옥죄는 세상에 대해 무감하고 무심하기를 배워가는 것 같은데 사람들이 분노를 느끼고 표출하는 경험을 통해서 자기 삶의, 그리고 내면의 뜻과 감정을 자기의 주인으로서 느껴가고 있다는 생각이요, 어쩌면 그런 거 배울 기회는 별로 없는 채로, 무감, 무력을 배우고는 치열한 생존의 장에 내몰렸던 사람들이 이 기회를 통해 배우고 있다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