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수잔 보일

자신의 벽을 넘어서

by 이루리
사진출처: Wikipedia


2009년 영국 오디션 프로그램 ‘브리튼스 갓 탤런트’ 대기실. 긴장을 달래려 애쓰는 출연자들 사이로 한 늙수그레한 여인이 눈에 들어온다. 살짝 비어 보이는 머리, 두툼한 턱선, 낡아 보이는 누런 드레스. 카메라 앞에 서기에 어딘가 정돈되지 않은 피부와 표정이 방송이란 매체와 이질감을 만들었다.


그녀가 무대에 오르자마자 심사위원 세 명의 미간에 비웃음과 연민이 교차했다. ‘나오지 말아야 할 사람이 나온 것 아니냐’는 표정. “나이가 얼마냐”라는 남성 심사위원 질문에는 이미 공격 의도가 배어 있었다. ‘47세’라는 대답이 식기도 전에 그녀가 던진 말은 단호했다.


“그건 하나의 측면일 뿐이죠.”


외모나 나이로 판단하지 말라는 자존감. 그녀의 당당한 표정과 냉랭한 심사위원들의 얼굴은 놀랍도록 대조적이었다. ‘프로 가수가 되고 싶다’며 롤모델로 ‘엘레인 페이지’를 꼽는 순간 관객들의 표정도 일그러졌다. 말려 올라간 윗입술, 구겨진 미간, 잦아들지 않는 웅성거림. ‘수잔 보일’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세상과 정면으로 마주한 순간이었다.


영국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수잔 보일은 어린 시절 학습 능력이 유난히 더뎠다. 수업을 따라가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선생님의 질문에도 자주 얼어붙었다. 미숙한 모습을 붙잡아 놀리던 아이들 속에서 그녀는 외톨이였다.


그런 그녀에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세상과 연결된 유일한 통로였다. 고달픈 현실에서 잠시 꺼내주는 안식처와 같았다.


성인이 된 수잔은 노래를 삶에 녹이고 싶었다. 보컬 코치 프레드 오닐에게 배우고 에든버러 연기 학교에 진학한 이유다. 가수가 되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데모 테이프를 만들어 돌리고, 지역 경연대회에 나가 여러 차례 우승했다. 가창력만큼은 이미 인정받았던 것.


딱 하나 벽이 있었다. 바로 오디션 프로그램. 그녀는 ‘나이’와 ‘외모’ 앞에서 자주 위축되었고, 기회를 스스로 차단했다. 어머니는 늘 안타까워했다. 딸이 가진 잠재력이 세상에 잠긴 채 사라지지 않기를 바랐다.


큰 무대에 서 보라던 어머니의 격려가 이어졌다. 용기를 내지 못한 수잔은 번번이 거절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어머니는 결국 바람을 가슴에 품은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어머니가 떠난 뒤 2년 후. <브리튼스 갓 탤런트> 시즌3 참가신청 기간이 다가왔다. 보컬 코치 프레드 오닐은 그녀를 찾았다. 어머니의 마지막 바람을 잇기 위한 일이었다.


이미 수잔은 47세가 되어 있었다. 나이가 또 하나의 망설임을 불러냈다. 그 순간 어머니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세상에서 가장 큰 지지자이자 팬이었던 어머니. 하늘에서 지켜볼 어머니를 위해 나가야겠다는 마음이 그녀를 무대로 이끌었다.


다시 첫 장면으로 돌아가, 무대 위. 도도한 심사위원들과 찌그러진 관객 앞에서 수잔은 기죽지 않았다. 간주가 흐르고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입을 타고 ‘I Dreamed a Dream’의 첫 소절이 울렸다. 어머니를 잃은 직후 처음 세상 앞에 부르는 노래였다.


장내는 정지한 듯했다. 찡그렸던 얼굴이 하나씩 경악으로 물들었다.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는 관객들. 무대를 뒤덮은 환호성은 그녀가 오를 새로운 궤도를 의미했다.


삶이 변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브리튼스 갓 탤런트>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뒤 발매한 첫 앨범은 전 세계에서 1,000만 장이 팔렸다. 이어서 낸 앨범들도 40여 개국에서 정상을 휩쓸었다.


불행은 행복과 함께 찾아오는 것일까. 화려한 조명 아래 그녀는 조금씩 시들었다. 대중과 언론의 관심은 때로 불안과 우울을 불러왔다. 무대 공포증도 싹텄다. 준비되지 않은 마음에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가 당혹스럽기만 했다.


그럼에도 수잔은 끝까지 해보겠다는 태도를 놓지 않았다. 복잡한 감정이 밀려올 땐 바쁘게 움직였다. 피아노를 다시 배우고, 앨범을 내고, 자선 공연에 나섰다. 어린 시절 그러했듯 외롭고 두려운 시간은 노래를 이어가는 동력 중 하나였다.

데뷔 후에야 진단받은 ‘아스퍼거 증후군’ 역시 삶의 새로운 면모를 만들었다. 어릴 적 ‘지적 장애’로 잘못 진단됐던 병명이 바로잡히며, 평생 이유 없이 어려웠던 모습과 마주했다. 그녀에게 또 하나의 전기가 펼쳐졌다.

그녀의 날개는 세상의 기준을 의식하지 않는 당당함에서 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당신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화려한 사람은 아니지만, 해낼 수 있다 (I’m not your typical glamorous person, but I get there)”라면서도 "내가 되고자 했던 사람이 되었기에 더 편안함을 느낀다(feel more relaxed about myself)."는 말에서 확신과 자존이 묻어난다.


수잔 보일의 삶을 단순히 ‘기적’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긴 시간 쌓아 올린 평범한 인내, 언젠가 내 목소리로 세상과 마주하리라는 꿈, 우연 아닌 요소가 모여 폭발하던 순간. 그녀의 이름은 필연을 감추며 달려 나갔다.


삶의 단면이 비틀려 보일 때, 수잔 보일의 노래는 위로를 준다. 비틀린 공간 사이에 신념을 담으면 변화할 수 있다는 것. 순식간에 관객의 미간을 펼쳤던 수잔 보일의 목소리가 남긴 여운이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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