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대동법의 아버지
때로 이름보다 업적을 역사에 남기는 사람이 있다. 김육(金堉)이 그렇다. 역사학자나 떠올릴 법한 그의 존재는 ‘대동법’이란 개혁으로 기억된다.
조선 후기, 세금은 백성의 피와 눈물에서 나왔다. 특히 ‘공납’이란 세금이 흉악했다. 각 지역의 특산물을 바쳐야 하는 일. ‘지역 특산물’이니 부담이 없었으리라 추측하지만, 그렇지 않다. 당시 조정은 해당 지역에 나지도 않는 특산물을 강요하곤 했다. 예컨대 산간 지역의 백성에게 물고기를 진상하라는 식의 요구였다.
벼슬아치들의 횡포도 백성의 피로감을 더했다. 공납은 ‘기간’과 ‘품질’ 문제가 중요했다. 국가에서 정한 기간 내에 정해진 품질의 물건을 납부해야 했던 것. 여기서 ‘품질’을 벼슬아치가 자의적으로 판단한다는 점이 문제였다. 그들은 백성이 가져온 물건을 퇴짜 놓기 일쑤였고, 물건을 잘 구했음에도 기한을 넘긴 백성들은 곤장을 맞곤 했다.
‘방납업자(防納業者)’가 생겨난 이유다. 그들은 백성들에게 비용을 받고, 대신 특산물을 구해 납부했다. ‘중간책’이란 단어에서 비리의 냄새가 나지 않는가? 그들은 향리 등의 벼슬아치와 합을 맞췄다. 백성에게 폭리를 취하고 벼슬아치와 이익을 공유하며 사리사욕을 채웠던 것.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악순환이 반복됐다. 백성들은 말라가고, 벼슬아치와 방납업자의 배는 불러갔다. 16세기 조정의 상소문에 ‘공납의 폐단 개혁’이란 주제가 자주 거론됐던 까닭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란 이후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전쟁 후 피폐해진 나라에 특산물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려운 일. 방납업자는 더욱 날개를 달았고, 백성들의 고통은 가중됐다.
그러나 세상의 피폐함이 극에 달하면 의로운 자가 나타나는 법. 결국 이 지독한 구조를 바꾸겠다며 평생을 버티던 사람이 나타났다. 바로 잠곡 김육(金堉, 1580-1658)이다.
그가 처음부터 개혁가의 자질을 보였던 건 아니었다. 선조 연간에 태어난 그는, 오히려 비운의 양반에 가까웠다. 부유하지 않은 집안, 임진왜란 중의 피란생활, 일찍 여읜 부모님은 그가 겪었을 어려움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김육은 양반으로서 세상에 열린 코스를 차근히 밟아나갔다. 25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26세에는 초시를 치르고 성균관에 입학했다. ‘양반’이란 신분의 관성에 맞춰 삶이 흘러갔던 것.
순방향으로 흐르던 삶에 역류가 생긴 건 광해군 정권이 들어선 후였다. 영창대군 사사와 인목대비 폐위 등 유교 사회의 근간이 흔들렸다. 정인홍이 퇴계 이황을 문묘에서 빼내며 학문적 기강도 무너졌다.
김육은 은둔자로서의 삶을 택했다. 문과 급제와 탄탄대로가 보였음에도 스스로 도성 밖으로 물러났다. 벼슬자리 없는 양반은 서민과 다름이 없다. 그는 경기도 가평 잠곡에 가 농사를 시작했다. 빈곤하고 곤궁한 삶의 서막. 집이 없어 움막을 짓고 살았고, 농사와 숯 만드는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나갔다. 숯을 메고 100리가 넘는 동대문에 와 숯을 팔기도 했다. 낮에 일하고 밤에 책 읽는 주경야독의 곤궁함이 이어졌다.
양반으로서 겪기 힘든 고난이었음에도, 세상을 향한 그의 애정은 식지 않았다. 오히려 백성의 삶을 이해하는 근간으로 삼았다. 삶의 현장에서 농사를 지으며 고혈을 짜내는 국가의 횡포를 경험했고, 국정 참여자로서 행해야 할 개혁을 구상했다.
1623년, 은둔하던 그의 삶에 빛이 들기 시작했으니, 인조반정이다.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란 기대감이 떠올랐다. 그의 나이 44세였다.
사실 인조반정이 그의 앞날을 보장하진 않았다. 유일(遺逸, 인재 추천)로 벼슬길에 올랐지만 지나치게 강직한 성격이 문제였다. 특히 이조정랑(인사 실무자)으로 일하던 시기에 위기가 찾아왔다. 당시 실세였던 김류가, 김류와 친분이 있던 김세렴의 벼슬자리를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김육을 모함했다. 그에게 내려진 처분은 관작 삭탈과 ‘문외출송’이었다.
두 번째 찾아온 삶의 고비.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나라 살림과 백성의 삶을 다시 돌아보는 계기로 생각했다. 김육은 농민과 지방 관리의 관계, 세금의 구조를 현실 속에서 관찰하고 되새겼다. 세금 개혁에 대한 의지가 확고해졌다.
시간이 흘러 1638년, 인조 16년에 그는 충청도 관찰사로 임명받는다. 김육이 본격적으로 대동법을 상소문으로 올리기 시작한 시기다. 골자는 특산물 납부제를 폐지하고 쌀 납부제로 바꾸자는 것.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수요를 역산한 그의 계산은 경제적으로 타당해 보였다.
하지만 제도 개혁은 경제적 타당성으로 담보할 수 없다. 기득권층으로부터의 승복이 제일 중요한 요소인지 모른다. 당시 백성과 중앙정부 사이에서 폭리를 취하던 방납업자와 지방 벼슬아치들은 갖가지 이유를 대며 반발했다.
파급 효과가 워낙 크니 조정도 쉽사리 결정하지 못했다. 이론적으로 타당한 제도가 현실적 욕망에 가로막힌 셈이었다.
시간이 더 흘러 1649년,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했다. 김육의 나이 70세. 장년을 넘어 고령의 나이로 진입하는 시간이 됐다. 하지만 나이가 그의 열정을 잠재우지 못했다. 효종 즉위년 11월, 실록에는 우의정 김육이 호서와 호남 지방에 대동법을 시행하자고 건의하는 상소가 기록되어 있다.
새로운 왕이 즉위했지만 여전히 제도 개혁은 막막했다. 영의정 이경석을 비롯한 대부분의 중신들이 대동법의 확대에 미온적이었다. 특히 학자였던 김집의 강경한 반대론이 매서웠다. 심지어 김육이 대동법으로 사사로운 목적을 꾀한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갈수록 태산이었다.
반대가 거셀수록 김육은 더욱 중심을 다잡았다. 구체적인 근거를 거론하며 자신의 주장에 힘을 실었던 것. 1657년 그가 올린 상소에는 전라도 53개 고을의 약 64%가 제도 시행에 찬성한다는 수치가 실려 있다. 제도란 애매하게 옳고 그름의 도덕 가치로 따질 것이 아니라, 현장의 의견과 현실적 필요가 반영되어야 한다는 신념의 표출이었다.
결국 그의 노력이 현실에 반영되기 시작했다. 1651년 충청도에서 출발한 대동법은 1658년 전라도 해안 13개 고을로 이어졌다. 1658년. 그가 마지막까지 대동법을 외치다 세상과 작별하는 시기였다.
김육이 던진 대동법이란 돌의 파장은 널리 퍼져 나갔다. 그의 사후에도 대동법 확대 논쟁은 지속됐고, 숙종 대에는 전국적으로 시행되기에 이른다. 하늘에서 바라보던 그의 얼굴은 활짝 웃고 있었을까.
타의적인 기다림과 인내가 고난의 시간만을 표상할까. 김육의 삶을 보면 필연적인 고난이라고 볼 수 없다. 가평 잠곡에서의 10년, 문외출송으로 인한 2년, 그리고 백성의 안위를 위해 오해받으며 싸워야 했던 수많은 시간들. 김육은 끝없이 주어진 기다림의 순간을 준비와 사유, 논증의 시간으로 치환했다. 멈춘 순간 더 달렸고 인내하는 동안 주위를 살폈다. 그런 시간이 있었기에 그는 사회 문제를 포착하고 제도 개혁을 모색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열정과 추진력이란 나이를 장애삼아 줄어들지 않음을 깨닫는다. 김육은 60대부터 본격적으로 대동법 논쟁에 나섰고 70대에 비로소 제도 개혁을 성취하며 달렸다. 불타는 가슴이 있다면 세월은 시간적 지표에 불과한 것일까.
김육에 대해 알아보던 시간, 부지불식간에 가슴 위로 손을 올렸다. 나의 가슴은 어느 곳을 향해 뛰고 있는가. 지나간 세월 뒤에 숨어 자책과 회한으로 시간을 축내지는 않는가. 답하지 않는 가슴 위로 반성과 열망이 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