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에 무너지지 않은 삶의 증언
학교에 가면 중국인 유학생이 자주 언급하는 음식이 있다. 바로 ‘라오깐마 볶음밥.’ ‘라오깐마’라는 시판 양념장을 활용한 볶음밥인데, 중국인에게는 일종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모양이다. 시판 양념장이란 말에 코웃음을 칠 수 있지만, 흔히 생각하는 대기업의 양산형 양념이 아니다. 그 탄생 배경을 따라가면 가볍지 않은 삶의 궤적이 드러난다.
라오깐마의 창시자는 ‘타오화비(陶華碧).’ 1947년 구이저우성에서 태어난 그녀에게 붙여진 ‘춘매(春梅, 봄의 매화)’라는 아명은 현실과 달리 지나치게 화사했다. 집안의 여덟 번째 딸로 태어난 그녀의 삶은 늘 굶주림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글자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어린 시절, 그녀의 감각은 늘 배고픔으로 점철돼 있었다.
타오화비는 산에서 구한 야생 식물 뿌리를 씹으며 위장을 채우려 했다. 요행히 배는 채웠는데, 입안에 남는 쓴맛이 고역이었다. 어느 날 그녀는 산에서 구한 약초와 뿌리에 집에서 기른 고추를 짓이겨 넣는다. 생존을 위한 즉흥적 선택이었지만 우연한 조합이 뜻밖의 맛을 자아냈다. 혀를 마비시키는 알싸한 매운맛. 은근히 매력있던 그 맛은 훗날 그녀가 만들 세계의 씨앗이었다. 어린 그녀가 알지 못했을 뿐.
스무 살이 된 타오화비는 지질탐사대 대원과 결혼하며 잠시나마 ‘평범한 삶’의 궤도에 올라서는 듯 보였다. 두 아들을 낳고 생계가 유지되며 안정된 일상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남편의 폐기종 진단은 불행의 시작이었다. 타오화비는 병원비를 벌기 위해 광저우 공사장까지 찾아가 일했지만, 남편은 끝내 버티지 못했다. 그가 떠난 건 1984년. 남겨진 두 아들과 자신의 삶은 점차 생존의 압박으로 다가왔다. 어린 시절 느꼈던 암담함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울지 않았다. 울음이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은 어린 시절부터 알고 있었다. 이듬해 고향 구이저우성으로 돌아온 그녀는 50kg에 가까운 미두부(米豆腐) 광주리를 어깨에 메고 삶의 현장에 뛰어들었다. 새벽마다 쌀을 갈아 두부를 만들고 노점으로 나서는 일상이 이어졌다.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50kg은 단순한 짐이 아닌 삶의 무게에 가까웠다. 함께 들어줄 이도 없었다. 버스조차 무게를 이유로 승차를 거부하는 마당에 누가 손을 내밀었으랴. 밤에도 쉴 시간이 없었다. 두부 판매로 지친 몸을 이끌며 집에 돌아오면 촛불 아래서 고추를 썰어야 했다. 매운 기운에 손끝이 아리고 눈이 벌겋게 충혈돼도 그녀의 손은 멈출 줄 몰랐다.
멈출 줄 모르는 손은 그녀의 여정에도 관성을 붙인다. 이듬해 테이블 두 개를 놓은 <실혜소흘(实惠小吃)>이란 작은 식당을 열었다는 사실이 증명한다. 메뉴는 청포묵과 냉면이 전부. 화려한 인테리어는 없었지만 노점보다 안정된 공간이었다. 배고픈 사람들이 와서 조용히 끼니를 해결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실제로 손님 대부분은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노동자들과 인근 학교 가난한 학생들이었다. 그녀는 집 떠나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각별히 마음을 썼다. 돈이 없어 머뭇거리는 학생이 보이면 말없이 고명과 달걀을 얹은 국수를 내밀었다. 늘 한 끼로 하루를 버틸 수 있을 만큼 푸짐한 양이었다. 학생들은 그런 그녀를 ‘라오깐마(老干妈, 대모님)’라 불렀다. 그들이 붙인 호칭이 훗날 전 세계로 퍼질 브랜드가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한 채.
그녀의 식당은 고추 양념으로 더 유명해졌다. 어린 시절 쓴 뿌리 맛을 없애려 만들었던 고추 양념은, 기름에 볶고 콩을 발효시키는 과정을 거치며 독특한 풍미를 갖추게 됐다. 손님들이 국수보다 양념을 찾았던 까닭이다.
1993년, 본격적인 전환점이 도래했다. 때는 30평 규모의 <실혜식당(实惠饭店)>으로 사업을 확장하던 시기. 식당 인근 룽동바오 일대에서 도로 공사가 진행되며 트럭 운전기사들의 발길이 잦아졌다. 타오화비는 그들에게 고추 양념과 반찬을 무료로 나눠주곤 했다. 대가를 기대한 행동이 아니었다. 학생들에게 베풀었듯, 그저 길 위에서 하루를 보내는 이들을 위한 따뜻한 마음이었다.
인심은 곧 입소문이 됐다. 고추 양념의 명성이 빠르게 퍼졌고, 양념이 떨어진 날이면 손님들이 발길을 돌릴 정도였다. 손님의 반응을 본 그녀는 비로소 깨달았다. 앞으로 집중해야 할 것은 국수가 아니라, 고된 삶을 잠시 잊게 만드는 매운맛이라는 사실을. 양념장 공장을 세우기로 결심한 이유였다.
주변의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글자도 모르는 늙은 과부가 무슨 공장이냐는 비아냥이 쏟아졌다. 그러나 마흔둘의 타오화비는 이미 여러 번 삶의 벼랑을 건너온 사람이었다. 포기하기에 그녀의 마음이 지나치게 단단해져 있었다.
1996년 9월, 그녀는 마을 회관 두 칸을 빌려 식품회사를 설립했다. 기계 하나 없는 수작업 공정을 위한 공간이었다. 그녀는 직원과 함께 앞치마를 두르고 직접 고추를 썰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양념에는 ‘라오깐마’라는 이름을 붙였다. 식품회사 경영의 출발점이었다.
그녀의 경영은 과단성이란 토양 위에서 자랐다. 어려움이 닥쳐도 주저하지 않고 직접 마주했다. 양념 병을 구하던 일화가 이를 잘 보여준다. 양념 생산은 끝났는데, 고추장을 담을 유리병을 구하지 못했을 때였다. 그녀는 귀양 제2유리공장을 직접 찾아가 병을 줄 때까지 나가지 않겠다며 버텼다. 결국 광주리에 병을 직접 주워가는 조건으로 사용을 허락받는다.
모조품에 대한 대응 역시 단호했다. 양념장이 인기를 끄니 시장에는 가짜 제품이 50여 종이나 쏟아졌다. 타오화비가 분노한 이유는 모조품의 존재 자체가 아니었다. 자신을 믿고 제품을 사는 서민들을 기만했다는 사실이 그녀를 움직였다. 타오화비는 사설탐정을 고용해 가짜 공장을 찾아내고, 수년에 걸친 법정 공방 끝에 지적재산권을 인정받았다. 그의 집요함 앞에서 모조품은 자취를 감췄다.
이러한 과단성은 ‘3불(三不) 원칙’이라는 경영 신념으로 이어졌다. 상장하지 않고, 대출하지 않으며, 빚지지 않겠다는 원칙이다. 레버리지를 미덕으로 삼는 시대에 무차입 현금 경영은 고집처럼 보였다. 그러나 모든 거래를 현금으로 처리하고, 직원 월급을 하루도 미루지 않은 이 원칙은 회사를 단단한 구조로 만들었다.
2014년, 그녀는 두 아들에게 지분을 넘기고 경영에서 물러난다. 그리고 2019년, 일흔이 넘은 나이로 다시 경영 일선에 복귀했다. 원가 절감을 이유로 고추 품종을 바꾸고 부동산 사업에 손댄 두 아들의 판단이 매출 하락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맛을 속이면 망한다”라는 한 마디와 함께 돌아왔고, 회사는 다시 성장 궤도에 올랐다.
붉은 병에 인쇄된 타오화비의 무표정한 얼굴은 훈장처럼 보인다. 가난과 문맹, 나이 든 과부라는 조건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은 삶의 증언이다. 학력과 자본, 인맥이라는 변수를 배제하고 고집과 신뢰라는 상수만으로 브랜드를 세운 인물의 초상이 아닌가.
정보와 공식이 넘쳐나는 시대에 타오화비의 삶은 단순한 성공담을 넘어선다. 늦은 나이에도 기죽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갔던 비결은 무엇일까. 어쩌면 요령 없이 남의 시간에 눈 돌리지 않으며 묵묵히 자신의 발끝만 쳐다보던 태도였는지 모른다. 세상의 기준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하던 그녀의 방법. 어쩌면 가장 오래된 방식이자, 가장 혁신적인 비즈니스의 원형일지도 모른다. 지나친 정보와 공식에 물든 우리가 망각했던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