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가스통 바슐레르

우체국 직원에서 철학 교수까지

by 이루리


1884년, 프랑스 샹파뉴 지방의 작은 마을 바르쉬르오브. 구두를 수선하며 하루를 살아가는 가난한 노동자의 집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 아이의 이름은 가스통 바슐라르. 아이는 영특했다. 늘 책을 손에 쥐고 살았다. 문장들이 들려주는 세계에 매료되었고, 그 너머의 진리에 손을 뻗고 싶어 했다.


다만, 역사 속 사실이 늘 그렇듯 대부분의 인간이 희망과 다르게 살아간다. 현실의 중력이 꿈의 무게보다 무겁기 때문이다. 바슐라르의 삶도 그랬다.


고등학교를 마친 그는 대학 진학 대신 인근 중학교의 복습 교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곧 우체국으로 자리를 옮겼다. 누군가의 사연이 담긴 편지봉투를 분류하고, 무게를 달고, 직인을 찍는 반복적인 일상.


지적 허기에 목마른 청년에게 창구는 일련의 감옥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다만 바슐라르는 강했다. 현실의 감옥에 갇혔을지언정 마음의 죄수가 되지 않았다. 그는 좌절하는 대신 다른 길로 발을 돌렸다. 우편물을 분류하면서도 조용히 자신만의 우주를 설계하기 시작했던 것!


말 그대로, 주경야독(晝耕夜讀).


낮에 철저히 노동자로 살던 바슐라르는 해가 진 뒤 탐구자로 변모했다. 나지막한 불빛이 지배한 좁은 방에서 그는 수학과 물리학 서적을 펼쳤다. 고단한 육체, 피로한 눈꺼풀, 어둑한 저녁. 그 무엇도 공부와 연결했을 때 가슴 답답한 단상들이다.


하지만 지적 허기가 고단함을 눌렀던 모양이다. 그는 자그마치 10년이나 이 생활을 이어갔다. 현실에 매몰되지 않으려는 처절한 사투, 그리고 단단한 버팀. 우체국 창구에 앉은 청년은 저녁마다 수의 언어로 우주의 법칙을 읽어 내려갔다.


노력은 결실로 나타났다. 1912년, 그는 독학으로 대학교 수학 학사 자격을 취득한다.


이 정도 되면 운명의 여신이 그의 등을 쓸어줄 법도 하건만. 예측할 수 없는 소용돌이가 바슐라르의 삶을 덮쳤다. 세계대전이었다.


1914년 바슐라르는 전장으로 향해야 했다. 38개월의 시련. 그는 3년이 넘는 시간을 진흙탕과 포연, 죽음으로 가득한 참호 속에서 버텨냈다.


종전 후 간신히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중학교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며 생계를 이어갔다. 또 하나 삶의 고난이 닥쳐오리라고 상상하지 못한 채. 바로 사랑하는 아내 잔느의 죽음이었다. 몸이 약했던 그녀는 딸 쉬잔을 낳은 지 일 년도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에게 남은 건 갓난 채 남겨진 딸 뿐이었다.


참으로 절망스러운 상황이 아닌가?


하지만 바슐라르의 정신은 꺼지지 않았다. 현실이 끝없이 그의 존재를 짓눌러도, 그가 가진 지적 호기심과 의문까지 밟을 수 없었던 까닭이다.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과학적 사실을 전달하는 순간마다 그의 내면은 물음으로 가득 차올랐다.


“우리가 진리라고 믿는 이 지식은 대체 어떤 기초 위에 서 있는가?”


과학적 진리의 뿌리를 캐내고 싶다는 열망이 상처 입은 그를 다시 책상 앞으로 불러 세웠다. 철학 분야로 관심을 돌리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바슐라르가 본격적으로 철학 공부를 시작한 건 1920년, 서른여섯 살 때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한 아이의 아버지이자 현직 교사인 서른여섯 남성의 새로운 도전은 파격적이었다. 학계 측에서도 상당한 모험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퇴근하고 딸을 재운 후 남는 시간에 칸트와 데카르트를 읽었다. 그해 독학으로 철학 학사 자격을 취득한 바슐라르는 다음 단계로 발걸음을 옮겼다. 결국 38세에 철학 교수 자격시험을 통과하고, 1927년 마흔세 살의 나이로 소르본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그 즉시 디종 대학의 철학과 교수로 임용되었다.


우체국에서 우편을 분류하고 전보를 보내던 청년이 대학 강단에 서기까지, 실로 긴 우회로가 아니었는가? 누군가는 지나치게 돌아왔다고 한숨 쉬겠지만, 사실 헛된 시간은 아니었다. 우체국의 인내, 전쟁터의 고뇌, 교실의 탐구가 없었다면 철학자로서의 시각도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디종 대학에서 13년간 교편을 잡은 그는 1940년 쉰여섯의 나이에 파리 소르본 대학 교수로 초빙된다. 그리고 현대 과학철학의 이정표가 된 개념 하나를 세상에 내놓았다. 바로 ‘인식론적 장애 (obstacle épistémologique)’. 과학적 진보는 과거 지식을 축적하는 과정이 아니라, 상식과 선입견을 걷어찰 때 일어난다는 통찰이었다. 일상의 익숙함이 오히려 사고를 가로막는다는 주장은 당시 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차가운 이성의 칼날로 과학의 오류를 베던 바슐라르는 새로운 분야로도 눈을 돌렸다. 시학이었다. 사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문학에 관심이 많았다. 과학과 철학에 더 큰 흥미를 두었을 뿐. 바슐라르는 인간 내면에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 있음에 집중했다. 꿈꾸는 몽상의 힘이 인간 정신의 가장 원초적 능력임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그는 불, 물, 공기, 흙이라는 네 원소를 중심으로 상상력의 작동 구조를 탐구했다. 『불의 정신분석』, 『물과 꿈』, 『공기와 꿈』 같은 저작들이 탄생한 배경이었다. 과학철학자가 시인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니 딱딱한 물질이 풍부한 은유와 상징으로 되살아났다.


“촛불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세계와 화해할 수 있다”


이성이 말려버린 인간의 감성을 복원하려던 시도는 ‘과학’과 ‘시’라는 양립 불가한 두 세계를 하나로 잇는 작업이었다. 어쩌면 가스통 바슐라르와 닮아 있었다. 우체국 창구와 철학 강단, 전쟁의 포화와 시의 언어.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한 사람 안에 단단하게 엮여 있지 않던가.


가스통 바슐라르의 삶을 조망하며, 문득 갈망의 힘을 생각했다. 그는 영특했지만, 흔한 천재의 길을 걸을 수 없었다. 생업의 무게에 눌려 꿈을 뒤로 미뤘고, 평범하게 살아가며 잠을 시간에 미뤘다. 우리 주변 어딘가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사람이었으나, 다른 건 갈망의 무게였다.


만일 그가 우체국의 시간을 불행으로 치부하고 불평만 했더라면. 혹은 가정적 불행으로 그저 주저앉아 버렸다면. 서른여섯의 나이를 핑계로 포기했더라면. 우리는 소르본의 거장을 만나볼 수 없었을 것이다.

척박한 현실은 사유를 단단하게 만드는 숫돌이 되었고, 늦은 철학은 통찰을 담아낸 그릇으로 기능했다. 늦은 출발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더 멀리 나아가기 위한 준비기간이었을 뿐이다. 천천히 자신의 우주를 쌓아 올린 그는 결국 철학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러니 나의 현실이 우체국 창구처럼 좁고 답답하더라도 자신의 우주를 끝없이 물어보면 어떨까. 이성의 눈으로 현실을 직시하고 상상력의 날개로 내일을 꿈꾼다면 삶은 언제든 다시 시작되지 않을까. 가스통 바슐라르가 현실에서 거칠어진 손으로 써 내려간 위대한 철학적 문장들을 보라. 가능성의 증명이다.

우리도, 어쩌면 삶의 증명이 될지 모른다. 멈추지 않는다면.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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