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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리바 Aug 06. 2019

경험하고 싶지 않은 것

R.I.P


할아버지가 많이 아프시다.  '엄마 어디야?' 하면 '전주 내려왔어'라는 답변에 묻지도 않고 '알겠어'했던 시간이었다. 몇 번의 고비가 있었고 엄마는 그런 연락이 올 때마다 전주로 가서 할머니의 곁에서 할아버지를 지켜봤다. 의사는 몇 번의 고비를 알렸다. 할아버지는 몇 번의 위기가 있었지만 쉽사리 생을 끝내지 않으셨다. 다시 기적처럼 호흡을 유지하시며 생을 지키려 하셨다.


중환자실의 할아버지를 만나러 가기 전날 밤. 할아버지를 미리 마주한 엄마는 고통스러워하던 할아버지의 얼굴과 모습이 생각나서 인지 새벽 내내 일어나서 성경을 읽고, 기도를 했다. 엄마가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기도하기 힘들 때 함께 기도 하기도 했다. 군말 없이 엄마와 함께 할아버지를 위해 기도를 했다.

몇 번의 고비가 있다고 연락을 받았을 때 엄마는 밤에 잠을 못 이루었다. 엄마가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밤에 잠 못 이룰 때 크게 상황 파악이 되지 않던 나도 무슨 이유 때문인지 새벽에 잠을 자꾸 깼다. 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불빛에 불을 끄러 나가보면 엄마가 앉아있는 모습을 보곤 했다.


사실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엄마가 할아버지가 아프시다. 위독하시다.라는 이야기를 하는 데에도 할아버지가 몇 번이나 고비가 있어서 갑작스레 집을 비울 때에도 나는 크게 와 닿진 않았다. 죽음이라는 걸 가깝게 겪어보지 못한 나는 생소했고, 멀게만 느껴졌다. 게다가 할아버지를 내 눈으로 직접적으로 뵙지 못해서였을까.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인지하지 못했다. 나이가 드셨으니깐, 아프셨으니깐 이라며 단순하게 생각했다. 연명치료라는 것도, 중환자실이라는 것도 나에게는 모두 낯선 단어들이었다. 그저 TV로만 보고 뉴스로만 접했던 것들이었다.




엄마를 따라 전주로 내려갔다. 처음 할아버지를 마주한 건 중환자실이었다. 중환자실에서 본 할아버지는 황달끼가 강했다. 볼 수 없을 정도로 살이 많이 빠져서 왜소해지셨다. 기계에 의존하고 우리를 인지하시는 건지 아닌 건지 눈만 깜빡거리셨다. 표현하자면 시체 같았다. 왜 의사가 몇 번이나 고비라는 연락을 보냈는지 그 날 알게 되었다. 삼촌은 할아버지의 귀에 대고 복음을 전했다. 삼촌이 '아버지 제 말 아시겠으면 손을 꼭 잡아주세요'했는데 할아버지가 잡고 있던 삼촌의 손을 꼬옥 잡았다. 우리 눈에는 분명하게 할아버지가 살아계시다!라고 여겼는데 의사는 냉소적인 반응이었다. 눈을 깜박이듯 하는 자동적인 반응이라고, 당장 호흡기를 떼면 돌아가신다고 했다.

의사가 뭐래든 할아버지가 의식적으로 살아계신 거 같아 울고 싶지 않았는데, 우리는 머리와는 다르게 모두 엉엉 울어버렸다. 몸이 아픈 작은 외숙모도 함께 했다. 모두 다 엉엉 울었다.


'할아버지는 우리가 울어서 슬펐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모두가 운다는걸, 우리가 목놓아 울음에도'그만 울어.'라고 말하지 못하는 할아버지에게 우리의 울음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고통일 것만 같았다.


면회가 끝나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어떻게 해야 할지 가족들끼리 상의하는 시간도 가졌다. 어른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자니, 죽은 뒤 뼈가루를 땅에 묻든 양지바른 곳을 찾아 묻든, 뭘 하든 그게 무슨 정성일까.라는 회의감이 들었다.

할아버지를 마주한 그 날은 마음이 이상하리만큼 괴리감이 있었던 날이었다. 할아버지를 면회하고 잠깐의 상의를 하고 오랜만에 모인 가족들끼리 다 한자리에 모여서 저녁을 먹는데 마치 슬펐던 면회는 언제 있었냐는 듯 우리는 화기애애했다.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감정의 격차가 컸던 날이었다. 그래서인지, 할아버지가 간절하게 붙잡는 오늘을 산다는 것에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가족들이 모였다가 자기의 생활로 돌아갔다. 산 사람은 살아갔다. 그 와중에 엄마는 혼자서 힘들어할 할머니를 위해 전주에 종종 가 있곤 했다. 할아버지는 중환자실에서 계시다가 호흡기질환센터로 병동을 옮겼다. 호흡기질환센터는 두 번의 면회시간이 허용되었고, 합쳐서 1시간이었다.

죽음이 이렇게 가까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연명치료는 할아버지를 더 고통스럽게 하고 있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연명치료에 대해서 검색해봤지만, 고통을 알려주는 이는 없었다.

호흡기질환센터에 내려와서 할아버지의 황달은 많이 가라앉았다. 의사는 여전하게 의식은 없다고 말했다.

할아버지는 우리의 목소리에 반응은 하셨지만 그것에 희망을 두지 말라는 듯, 간호사는 '호전된 건 아니에요'라고 말했다. 몸속 기능은 다 떨어져서 회복이 불가능할 것이라고만 말했다.

보이는 할아버지의 반응에 우리는 조금씩 괜찮아지고 있는 게 아닐까! 라는 스스로에게 희망고문을 했다.  우리는 약간의 희망을 보였지만 할아버지의 상태는 희망적이지 않았다. 그 센터에 있던 다른 어떤 환자들보다.

의학적으로는 할아버지는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라고 결론지었다. 의사의 말에 더 이상 치료를 통해 할아버지가 호전되는 게 아니기에 연명치료는 가족들의 동의 하에 중단을 결정했다.


우리는 요양병원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어른들은 요양병원과 할아버지의 장지를 알아보러 다녔고, 나는 남아서 병원에서 대기했다. 지루한 시간들이었다. 할아버지가 고군분투하는 데에도 나는 앞으로 가야 할 '베트남'과 '아프리카' 스케줄에 지장이 되진 않을까 걱정을 했다. 할아버지의 상황이 이렇게 될 줄 모르고 예매한 베트남 여행이었고, 아프리카였다. 그 기간에 돌아가시면 난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오만가지 잡생각도 들었다.




할아버지는 매 순간 고비셨지만 매 순간 쉽사리 삶을 놓지 않으려 애쓰시는 것 같았다.

추석이 되었다. 우리는 일찍 시골 할머니 댁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추석 당일날 예외적으로 외갓집으로 향했다. 명절이 되면 늘 친가에서만 시간을 보내던 우리는 외할아버지가 위급한 상황에서 명절 당일에 처음으로 외갓집으로 향했다. 매년 시댁에서만 명절을 보내는 서운함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전쟁이었는데(여러 복합적인 감정들이 존재했다.) 할아버지의 위급한 상황에 외갓집을 간다는 건 무척이나 아이러니였다. 예전엔 몰랐던 이기적임이 새삼 느껴지기도 했고, 엄마가 왜 그렇게 화를 냈는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은 간간히 마주하게 된다.


추석이 지나고, 할아버지의 거처가 정리가 된 다음날 면회시간에 할아버지를 만나고 가족들끼리 시간을 보냈다. 가족들이 모두 모여서 인사를 했고, 날씨가 무척이나 화창했다. 할아버지의 컨디션은 그 어느 때보다 좋았다. 최고조였다. 할아버지의 반응으로 우리 가족들은 들떴지만, 여전히 간호사는 자동반응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우리가 본 대로 믿고 싶을 뿐이었다.


아침 면회를 마치고 할머니 집에 다 같이 둘러앉았다. 어린 사촌동생들과 이모가 할아버지 일기장을 읽었다는 내용에 우리 가족들은 다들 궁금해했다. 할아버지의 일기장에는 할아버지가 하루하루를 어떻게 사셨는지 요목조목 쓰여 있었다. 내가 최근의 기록들부터 시작해서(그래 봤자 2015년도였다) 읽었는데 할아버지의 일기장은 단조로웠다.

어디를 다녀오셨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할머니와 싸운 이야기(싸워서 참았다가 대부분이었다), 나의 졸업식에 와서 학사모를 쓴 이야기 등 손주 이름은 유일하게 내가 나왔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다툰 이야기들이 자주 등장했는데, 일기장에는 할머니를 지칭하는 말이 '누구 엄마'(우리 엄마 이름이었다)라고 작성되어 있다가 할아버지가 그날은 화가 많이 났는지 할머니 이름을 대놓고 적으면서 화를 내는 대목에서 우리는 크게 웃었다.

내가 그 부분을 읽으면서 다들 웃었지만 나는 이유를 모른 채 눈물이 눈에 고였다.


내가 일기를 읽다가 눈물이 뚝뚝 흘린 내용이 있었다. 그 눈물이 났던 건 나의 졸업식에 참석해서 축하를 하며 기뻐했던 나의 학사모를 쓴 할아버지의 모습이 아니었다.

할아버지가 이모네 가족과 63 빌딩을 다녀오셨는데 일기장 통틀어서 그 내용 안에 '조았다'라는 세음절이 적혀 있었다. 일기장에는 대부분의 내용이 어디 갔다 왔다, 뭘 했다, 누구를 만났다가 전부였는데 맞춤법은 틀렸지만 일기 통틀어서 기분 좋음을 표현한 '조았다'라고 마무리 한 그 구절이 나를 왈칵 눈물 나게 만들었다.

할아버지의 수 십장의 일기들이 적혀져 있었지만 어디에도 할아버지의 긍정적인 감정을 표현한 장면은 없었기에 그 세 음절이 콕 박히면서 내 눈물을 후두둑 흘리게 만들었다. 난 더 이상 일기를 읽을 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한 번도 화를 내거나 언성을 높이신 적이 없다. 우리를 사랑하는 마음을 많이 표현해 주신 분이셨다. 그런 할아버지에게 나는 기쁨이 되었던 첫 손녀였다. 언제나 나를 보며 환하게 웃어주신 할아버지였다. 그런 할아버지는 전혀 죽음과 가깝다고 여기지 않았다. 언젠가 죽는다고 하지만 당장은 아니었다. 할아버지에게 조금 더 '조았던'날들을 알려주지 못한 게 무척이나 죄송스러웠다.


그렇게 씁쓸한 일기장을 읽고 우리는 날씨도 좋고 할아버지 저녁 면회시간까지 시간이 한참 남아 드라이브를 하기로 결정했다. 할아버지가 아프신 뒤 서로의 시간이 바빠 가족모임을 하는 게 부담스럽던 우리가 이렇게 모인다는 게 여전히 이상했다. 소중한 것은 잃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안다는 말이 당시에 크게 와 닿았다.

우리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우리가 겉으로는 많이 내색하지 않았지만 할아버지와 함께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루가 길었다. 그렇게 전주의 이곳저곳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할아버지 면회시간이 다가와 병원으로 향했다. 막내 삼촌이 연휴 마지막 날 아침에 올 예정이었고 삼촌만 사인한다면 연명치료가 중단되고 알아본 요양병원으로 옮겨가도 좋다고 병원은 말했다. 아침에 그렇게 최고조였던 컨디션에 비해 저녁엔 반응이 없으셨다.




다음날 막내 삼촌이 아침 일찍 왔다. 엄마는 호흡기를 제거하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수도 있으니 미리 밥을 먹자고 하셨고 우리는 일찍 밥을 먹고 병원으로 출발했다. 가족들이 다 보는 앞에서 호흡기는 제거되었고 할아버지의 호흡은 가빠졌다. 우리는 그 모습을 제대로 직시할 수 없었다. 호흡기에 의존했던 할아버지는 호흡기를 떼고 적응하려 애쓰셨다. 그리고 삼촌의 사인이 완료되자마자 우리는 면회시간을 꽉 채우고도 바깥에서 대기했다. 호흡기를 뺐고 당장 돌아가실 수도 있다고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났다. 간호사와 의사는 할아버지가 당장은 돌아가시진 않을 거 같고 지금은 본인의 호흡을 찾은 거 같다고 이야길 했다. 가족들은 할아버지를 요양병원으로 이동을 결정했다. 오후에 병원에서 차가 왔고 할아버지를 이송했다.

대학병원을 빠져나가는데 빠져나가는 사이로 할아버지의 얼굴에 오랜만에 햇살이 드리워졌다. 그 햇살 덕분인지 할아버지의 기분은 조금 나아지신 듯 보였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병원생활은 끝이 났다. 25일간이었다. 우리의 손에 쥐어진 건 현실적인 병원비용이었다. 그 비용을 마주하고 나는 친구에게 말했다. '진짜 모든 게 돈이야. 조용하게 죽는 게 복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다시 알게 되었어.' 죽음이 남겨진 사람에게 어떤 의미로 다양하게 다가오는지 가깝게 느낄 수 있는 시간을 경험했다.


요양병원은 활기가 넘쳤다. 나는 약간의 편견이 있었는데 직원들도 씩씩하고 밝고 병원 전체가 에너지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요양병원에서 제일 중환자였다. 환자를 받은 사람들도 처음인 듯했다. 그래서 집중치료실로 향했다.

사실 할아버지는 요양병원으로 갈 환자가 아니었다. 의식만 있는 할아버지는 최첨단 기계에 의존했던 몸을 부족한 시설에 적응시켜야만 했다. 나름대로 시설을 갖춘 요양병원이지만 대학병원보다는 턱없이 부족했다.

어른들은 병실 밖에서 상의하고 나는 할아버지 곁에 있는데 병원에서 할아버지에게 영양음료를 주려고 호스에 넣었다. 음식을 섭취해야 하는 호스와 호흡을 하는 호스의 통로가 같아서인지 (호스는 2개지만 투입되는 구멍은 1개인 거 같다) 할아버지가 숨을 가쁘게 내쉬셨다. 가쁜 숨은 곧이어 살려달라는 몸의 반응으로 보였다. 아무래도 호흡과 음식물 섭취하는 호스가 같아서 인 듯했다.

당시에 나는 할아버지가 너무 고통스러워하는 게 한눈에 보여서 손으로 할아버지를 잡아드렸는데 내 손을 잡으면서 안간힘을 쓰듯 엄지손톱으로 내 손을 막 찌르셨다. 너무 무섭고 당황스러웠다. 간호사들이 음식물을 제거하니 할아버지는 그나마 나아지신 듯 보였다.

나는 엄마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줬지만, 엄마나 삼촌은 그것이 최선이라고 말했다. 그 말들이 나에게 너무 슬프게 들려졌다. 속이 상하기도 했고.

어떤 게 할아버지에게 지금 좋은지 할아버지가 말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는데 할아버지는 아무런 답을 하지 못한다. 답이 없이 여전히 온기가 서린 그 손이 내 손을 잡으며 눈만 깜박이는 할아버지를 보자니 눈물이 나왔다.




요양병원으로 옮기고 난 뒤 병원에서 위급하다고 연락이 와서 엄마는 다시 전주로 내려갔다. 회사에 출근해서 엄마에게 연락을 하니 새벽에 위급했던 상황은 괜찮아졌다고 했다.


그리고 정말 위급한 상황이라는 말에 아빠와 함께 새벽에 향했다. 그리고 늘 그랬든 위급한 상황 다음에 괜찮아 지셨다 라는 답변대신, 전주로 향하는 그 시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마음이 휑하면서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삶도 죽음도 선택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평안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나는 바래보았다. 쩌면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게 훨씬 할아버지를 평안의 길로 이끌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도 죽음을 생각해 본 적 없던 내 인생에 죽음이 너무 가깝게 다가와서 슬펐던 한 달이었다. 죽음이 가까워진 그 시간 동안 그럼에도 산 사람은 살아가야 하는 것이 잔인하게 여겨졌다.

할아버지는 오랫동안 애쓰셨다. 살려고. 의사가 오늘, 내일을 말했지만 모레까지 사셨다. 한 시간 두 시간을 버티지 못할 거라 말했지만 한주를 더 사셨고, 위급했지만 괜찮아졌던 시간들이 많았다. 할아버지를 통해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소중한 것인지 느꼈다.


시간이 지나서 엄마의 얼굴을 들여다보면 할아버지와 참 많이 닮았다. 할아버지의 얼굴이 엄마의 얼굴에 많이 남아 있었다. 엄마는 그런 할아버지의 첫째 딸이었다. 할아버지는 엄마가 태어났을 때 동네방네 엄마가 태어났다는 기쁨을 표현하셨다고 했다. 그 이야기는 5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우리 가족 사이에서 회자되었다. 여전히 그 이야기를 할머니가 들떠서 이야기하면 할아버지 얼굴엔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 났던지 웃음을 지으셨다. 할아버지는 벅찬 기쁨을 엄마의 이름으로 표현하셨다. 그렇기에 엄마는 약간의 촌스러운 이름을 갖게 되었다. 엄마는 할아버지의 보물이었고, 할아버지의 '금덩이'같은 딸이었다. 마찬가지로 우린 모두 할아버지의 '보물','금덩이'들이었다.


할아버지의 금덩이들이 할아버지의 돌아가심을 슬퍼하며 전국에서 모였다. 자식들, 손주들, 가족들이 다 모인 장례식. 할아버지의 금덩이들이 다 모여 할아버지의 마지막을 함께했다.

난 생각했다. 오늘 할아버지의 일기엔,

할아버지의 금덩이인, 보물들인 우리를 보고 '조았다'라고 적히지 않았을까.

언제나 나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던 할아버지의 웃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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