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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리바 Sep 10. 2019

휴가신청서의 당당함

직장인의 연차 사용계획서

2018년도 4월. 전체 공지 메일이 띄워졌다. 공지의 내용은 직원당 20일의 연차가 주어졌다 (휴가 포함)는 것.


연차가 없을 때엔 한 달에 법정공휴일을 제외하고는 한 번을 쉴까 말까 했다. 다행히도 연차가 없었어도 우리 회사는 장점이 참 많은 회사기도 했다. 회사가 엄청 야박해서 야근을 시킨다던지 업무량이 엄청 많다든지 꼰대들이 넘쳐나든지 그렇진 않다. 최근에 급부상하고 있는 워라밸과 우리 회사는 잘 맞아떨어지는 회사였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나는 회사에 대한 만족도가 높다.


4월에 연차 공지 메일을 받고 내가 먼저 든 생각은'회사가 점점 배려해 주고 있구나'였다. 어차피 나는 9월 말까지 내가 맡은 일을 마무리해야 했기에 여름휴가는 가을과 겨울로 계획했었는데 '잘됐다!'라는 게 두 번째 생각이었다. 그렇게 9월 말까지의 연차를 계산해보니 샌드위치 날에 연차 1회를 깠고, 여름에 2일 정도를 교회 캠프를 가는 데 사용했고 그러다 보니 17일이 남았다.

연차가 많이 남으니 자연스레 나는 어디로 휴가를 갈까. 연차 사용 계획은 어떻게 할까라는 생각들이 겹쳐져 올라왔다. 그러다가 아이슬란드를 생각하게 되었다가. 유럽을 생각하게 되었다가. 미국을 생각하게 되었다가. 무모하게 혼자 가는 건 이제 지치는구나. 라며 되돌리기를 반복했다.

올해 가야 할 곳이 많았다. 위에 언급했던 나라들 뿐만이 아니라 어디든 가고 싶었다. 연차가 있으니깐 여행지에 대해 자유롭게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중 아프리카가 떠올랐다.

2011년도에 나이지리아와 케냐를 다녀왔고 그 이후에 여러 나라들을 다녀왔지만 아프리카를 다시 갈 수 있을까?라는 마음은 직장을 다니면서 사뿐히 접게 되었다.

물리적으로 너무 먼 거리 그리고 없는 시간. 그렇기 때문에 일찍이 아프리카를 경험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라고 생각을 했는데 연차가 20일 정도 주어지니 모든 여행지가 날개를 단 듯 내 손안에 있었다

그렇다고 한꺼번에 다 쓴다는 생각은 없지만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다.


어쨌든 18년도의 일정으로는 9월 28일까지 나의 일은 마무리되는 듯싶었다. 일이 마무리는 되어가지만 일은 일을 부른다는 말이 맞는 듯싶었다. 그래도 큼직한 일이 마무리가 되어 가니깐 마음의 여유도 생겼고 9월 말에서 10월 초로 예정되어있던 아프리카 일정이 10월 말로 연기가 되면서 연예인처럼 2018년도 하반기에는 해외순방을 의도하지 않게 다닐 계획이 되어버렸다.


-베트남 10월 중순 (4일)

-아프리카 10월 말 ~ 11월 초 (10일)


다들 휴가 가는 더운 여름에 사무실에서 대면하는 상사는 연차를 돈으로 주는 것도 아닌데 얼른 다 써라.라고 이야길 했고 큼직한 일들이 마무리되면 눈치는 보이겠지만 다녀오면 되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계획을 하고 있던 어느 날 사무실에 사장님을 만나러 온 다른 상사에게 이런 일정을 말씀드렸더니 책임감을 운운하며 아닌 거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여기서부터 나의 스트레스는 시작이 되었다.

그래도 회사인데~ 대기업도 안 그런다~ 미리 말을 해놔라~ 사장님 딸도 안 그런다~ 

그 모든 말들이 '아 내가 지금 회사에 엄청 민폐를 끼치며 내 원하는 일들을 하려고 하는구나'라는 마음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처음에 상사와 이야기할 때는 그 모든 말들이 맞는 말이었다. 그렇게 오래 쉬면 안 되지. 내가 회사의 입장을 생각하지 못했구나. 라며 나를 자책하고 아끼면 똥 되는구나 라는 나의 마음이 컸다.

상사가 그런 말들을 하자 내가 사무실을 비우면 그 자체가 책임감이 없는 행동이 되어버린 거 같았다. 하지만 그럴 탓을 하기에는 연차 사용 시간이 너무나 없기도 하고.

집에 와서 그날 잠을 제대로 못 잔 거 같았다.

언젠가 연차는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사용하려니 갑자기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고 포기가 오기 시작했다. 뒤숭숭한 마음에 계속 뒤척이면서 억울하기까지 했고 이런 게 직장 생활인 건가 라는 막막함이 몰려왔다. 지금껏 잘해 왔었도 한번 뒤틀리거나 눈밖에 나면 끝나는 건가 싶기도 했다.


근데 속상한 마음을 곱씹을수록 회사에 대해서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연차를 몰아서 사용한다고 나의 책임감까지 다 왜곡시키는 것이 말이 될까? 어쨌든 나의 업무 선상의 과정은 내가 알고 나에 맞게 계획이 있는데 자리를 비움에 있어서 책임이 없다고 단정 짓는 일이 될까? 지금까지 내가 일했던 시간들에 대해서 책임감이 없는 건가? 억울한 목소리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회사를 생각하는 마음도 한편에선 올라오고.


주변에 나 연차 10일 사용할 거야!라고 이야길 하면 '니 책상 조용히 정리되어 있을 거야.' '민폐 아니냐?' '네가 사장이냐?'라는 친구들의 목소리도 겹쳐져서 들려온다.

이럴 때 보면 뉴스에서 나오는 워라밸, 주 52시간은 딴 세상 이야기 같다. 우리 같은 중소기업은.


그러다가 회사 내에서 올곧게 마이웨이를 하는 상사분이 나와 비슷한 기간으로 남미를 가신다는 걸 들었다. 상사가 가는 날에는 법정 공휴일이라고는 토일뿐이었다. 그러니깐 연차를 몰빵을 하시는 거다. 거기서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그 사무실에서 일하는 언니 또한 나의 고민이 안쓰러웠는지 왜 당당하게 가질 못하느냐고 하며 용기를 얹어주셨다.

회사가 연차를 왜 주겠냐고. 사용할 때 사용하는 거라고. 하면서! 너무 착하게 네네 거리다가 내 시간 다 빼앗기고 나는 그럴 애로 생각하게 된다고. 


눈치는 보게 되지만 그래서 나도 당당하게 연차 계획서를 올렸다.

그리고 나는 무탈하게 결재받고 2018년에 베트남과 아프리카로 연차를 사용했다. 웃기게 그렇게 사용하고도 연차는 남았다. 


2019년이 되었다.

역시나 8월까지 엄청 바빴다. 그래서 휴가를 또 미뤘다. 올해 3월에 회사에서 워크숍으로 사이판을 다녀왔고, 휴가에 대한 미련이 크게 남지 않았다. 해외여행을 간다는 것이 되게 애매해졌고. 해외를 가는 것에 대한 마음이 식었다 (너무나 과분한 소리인가) 그래도 받은 휴가인데 해외를 가야 하지 않겠어?라는 생각이 들어서 열심히 물색하다가 갈 만한 곳들은 많았지만 크게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1. 이집트(이스라엘)

2. 이탈리아(남부)

3. 미국(동부)

4. 키르기스탄


이집트는 내년에 친구가 같이 가자고 말해왔고,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나 팔레르모는 겨울은 변덕스러운 날씨에 해수욕을 할 수 없다고. 사이판을 다녀온 나는 휴양지에 대한 휴가는 치렀기에 그렇다면 자연경관을 보러 가고 싶었는데 몽골과도 같은 세상과 단절되어 자연에 흠뻑 젖어 올 수 있는 곳을 찾다가 발견한 키르기스탄.

그러나 10월쯤 예상했었는데 적기가 아니라서 패스. 그래서 결론 난 게 미국이었는데. 10년 전에 가본 미국을 다시 한번 제대로 보고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쩐지 미국도 갈팡질팡 한 마당이었다.


어쨌든 해외여행을 계획하며 추석 지나서 5일을 휴가를 신청했다. 그 이야길 듣고 또 상사들이 '너 또?'라며 나에게 말해왔다. 

작년 같으면 웃으면서 그러려니 했지만, 올해는 휴가를 어딘가로 가는 게 별로 마음에 크게 와 닿지 않고 내키지 않았다. 근데 막상 휴가를 사용하지 않으려니 손해 보는 일인 거 같고. 그래서 일단 휴가를 결재 올렸다.

당시 나는 미국을 갈 생각으로 빼놨지만, 추 후에 그냥 한국에 있기로 했다. 긴 시간을 휴가 낸 다는 것이 정말 아깝긴 하지만 어떤 것이 정답은 없는 것이기에, 나의 휴가신청서는 당당하게 결재되었다.

불과 1년 사이에 휴가를 사용한다는 것이 예전처럼 설레는 일이 아니라 의무적으로 변해버린 것 같았다. 다들 가는 휴가 나도 가야지 하는 의무감으로 휴가를 신청해버렸다.

그 의무감 덕분에 긴가민가한 나는 쓸려가듯 휴가를 신청했지만, 나의 휴가는 어떻게 진행될지 아직 잘 모르겠다. 


결론적으로 나는 올해도 눈치 없이 추석에 이어 휴가를 올렸다. 헿

언제까지 당당하게 이 휴가 계획을 올릴 수 있을런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회사 생활을 하면서 책임을 질 부분은 책임을 지고, 누릴 수 있는 부분은 누리며 눈치 보지 않고 싶다.

이 마음이 퇴색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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