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리바 Oct 22. 2019

말 하나에 상처 열개

최근에 수많은 '나'중에 가장 두드러진 '나'의 모습은 소심이다.

최근에 이런 나의 모습이 없을 줄 알았는데 숨어져 있던 소심이가 튀어져 나온다.

시작은 단톡.

2주간 여행지에 있었던 나는 한국과는 시차도 다르고 환경도 달랐기에 먼 거리만큼 동떨어진 생활을 했다.

그래서 단톡 방에 올라오는 사소한 말에 한마디 그리고 두 마디를 다른 날에 던졌다.

와이파이나 통신상태가 낙후한 여행지여서 그렇게 귀하게 카톡을 올리고 끊기고 또 올리고 끊기기 반복.

카톡을 확인할 때 보니 난 말 그대로 읽씹 혹은 내 말은 스킵이 된 채로 지나쳐 버렸다.



쿨 해질 수 없는 이 상황

보통날의 나라면 모든 사람이 아는 나라면 단순하게 '넘겨버렸네?'하고 넘어가버리거나 서운함을 토로하는 게 다인데, 왜일까.

그렇게 넘겨져 버린 내 소중하게 보낸 두 마디가 그렇게 지나쳐버렸다는 것에 속상함이 먼저 훅 올라왔다. 뭐. 이거는 사람을 앞에 마주해야지 결국 풀릴 거 같다.

마주한다는 의미는 그냥 단톡 방의 사람들과 마주 앉아 야식을 먹으며 왁자지껄하게 웃고 떠들며 내가 이 소속에서 적어도 아싸 나 따나 은따는 아니구나 라는 확신이 들면 비로소 풀릴 뒤끝 있는 쿨함의 결말일 거 같다.

괜스레 아무것도 아닌 일에 소심한 마음만 앞서서 전부를 생각하게 하는 이런 마음과 성격은 정말이지 버리고 싶다.



그리고 또 하나 (정말 내가 그랬다고?)

내 말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생각나진 않지만 단정 지어 말했던 과거의 나를 반성한다.
소심해진 나는 내가 지금 받고 있는 이 상황의 상처를 혹여나 내가 누군가에게 아무 생각 없이 화살로 돌려졌던 과거가 있는지 곰곰이 생각하여 본다. 일종의 수비. 

누군가의 양면성을 생각하지 않고 한 면만 보고 '걔 는 원래 그래'라고 단정 짓지 않으려 정말로 정말로 노력한다. 뒷담의 대상에 대해서도 그 대상을 맹목적으로 생각하기보다 '걔의 다른 이면도 있잖아'하며 중립을 지키려고 나름의 노력을 한다. 누구의 편도 되지 않은 나를 보며 '너 누구 편이야 대체?' 하며 핀잔을 줄 수 있겠지만, 내가 겪어보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 한쪽 말만 듣고 사람을 판단하고 단정 짓는 나이는 지날 대로 지나버렸으니깐.

그래서 친구의 핀잔에도 나는 어색하게 웃는다.

뭔가 누군가를 누군가의 생각으로 나누고 싶지 않으니깐. 관계는 어떤 상황에 따라 또 어떻게 변하고 어떻게 마주치게 될지 모르니깐. 


사실 이 글은 2018년과 2019년의 이야기로 혼재되어 있다.

나에게는 SY의 이니셜을 가진 두 친구가 있다. SY1은 나와 연락을 자주 하는 친구이고 SY2는 연락을 자주 하는 편은 아니지만 만나면 어색하지 않은 친구다.

SY1의 친구는 SY2와 연락을 자주 하는데 나에게 의외의 말을 해주었다.

'나는 SY2가 걱정이야. 너무너무너무 착해. 착해서 지 밥도 못 찾아 먹어.'

그 말을 듣고 나는 굉장히 의외라고 생각했다. 내가 알던 SY2의 모습과는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 애가 그렇게 배려심 깊게 변했다고오오오? 약간의 의문을 품었지만 몇 번의 여행으로 '아.. 고등학교 때의 독기가 빠졌구나'라는 생각이 들긴 했었다. 별 다른 생각을 갖진 않고 그냥 '사람이 서서히 변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최근 1은 2에 대해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 채 짜증을 냈고 2 또한 뭘 그렇게 예민해하냐며 신경질을 냈다고. 그러면서 1은 '너는 어떻게 생각해? 내가 잘못된 거냐? 말해봐'하며 나에게 사건의 내용을 이야기했다. 

전체적인 입장을 들여다보면 2의 배려심 없는 행동에 마음이 상할 만 한데, 전체적인 입장 차이 말고 2의 입장을 생각해보면 그 애의 입장이 맞다. 결론은 '둘 다 맞는데 전체적으로 배려심이 없는 행동이긴 해'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너 분명 나한테 SY2는 너무 착하고 남을 너무 배려해서 너무 걱정이라고 말했던 애 맞냐?'라고 물었는데 친구는 어이없단 듯 웃어버렸다.

말 하나에 상처가 열개가 되는 순간은 금방이다. 그 사람이 착한 사람이었어도 어느 순간 마주한 내가 생각지 못한 그 사람의 모습을 마주하면 그 사람에 대한 방향성을 잃곤 한다.

(사실 착한 사람이란 건 없다. 사람은 모두 이기적이고 자기의 이익에 맞춰서 살아간다.)


또 다른 아주 짧은 이야기다. 순식간에 일어나서 당황스럽고 이게 뭔가 싶을 정도로 낯뜨거웠다.

나를 부르는 상사의 목소리에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를 시작하려고 많은 참석자들이 있었다. 그 와중에 나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며 의자와 책상밑면이 닿는 의자의 가죽 팔걸이가 다 헤졌다는 것이다.

당연히 내가 세게 밀어 넣었기 때문에 그 팔걸이가 다 헤졌고, 상사의 책상의 가죽 팔걸이도 다 헤졌다고 나에게 느닷없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는 당황한 나머지 웃음밖에 나오지 않더이다. 그러면서 짜증 내는 상사 앞에서 나 또한 당황스럽게 웃으며 '제가요? 제가 그랬군요.' 하며 답했다.

얼굴에 경련이 존나게 났다. 이 상황에서 웃는 내가 참 바보 같았다. 그렇다고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상사를 면박 줄 수 없으니 그냥 '네. 다음부턴 조심하겠습니다'하고 나왔다.

내 자리에 돌아와서 든 생각. '아니 난 절대 그러지 않았어. 저 가죽 시트는 원래부터 약했고, 회의실 의자는 내가 밀어 넣지 않아도 누구든 밀어 넣기에 그 원인이 나라고 단정하면서 모두에게 면박을 주는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는 걸까?'


객관적으로 따져보자.

일단 나는 자리를 2주간 비웠다.

회의실은 내가 온 뒤로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우리 회사의 청소일은 금요일.

내 대체자가 청소를 한 뒤 회의실의 의자를 책상에 구겨 넣은 게 분명하다.

왜냐면 난 회의실에 들어간 적도 의자를 손댄 적도 없으니깐.

그리고 평소에도 나는 억지로 구겨서 의자를 넣은 적이 없다. 맹세코.

근데 나는 그 모든 잘못을 뒤집어썼다.

이러니 내가 억울해 안 억울해

어쨌든 분한 마음과 잘못했는지 이유도 모르지만 잘못한 것에 대해 돌려놓으려고 검은색 테이프로 붙여놨다.

상사가 본인의 책상도 다 까졌다고 했는데 상사의 책상과 의자의 팔걸이는 아주 여유롭게 절대 헤질 수 없을 공간을 확보하고 있었던 것.


그러니깐 정리해보자면

1. 눈으로 얼핏 본. 2. 정확한 확인 없는. 3. 지레짐작한 것들로 나를 쥐 잡듯 잡은 것.

그렇지만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리고 소심하게 테이프로 땜질이나 해놓고, 소심하게 글이나 쓰고 앉았다.

만약 상사가 테이프가 붙여진 책상을 보고 나에게 '너 테이프 붙여놨드라'하면 그제야 난 말하겠지.

1. 제가 오기 전과 후에는 의자가 멀쩡했느냐.

2. 멀쩡했다 하면 주의하겠다. 그러나 상사님 책상과 의자의 거리는 멀다. 그렇기 때문에 팔걸이 가죽이 나로 인해 상했다는 건 잘못된 생각이셨다. 회의실을 청소할 때도 무얼 할 때도 나는 의자를 구겨 넣은 적이 없다. 이사 오기 전이나 어떤 이동을 할 때 상한 거 같다. 

라고 이야길 할꺼다. 라는 말들은 속으로 삭힌다.


방향성을 잃었다면 거기서부터 다시 방향을 잡아서 가면 된다.


굉장히 쿨한 말이다.

나는 사람에 대해서 '그러려니'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나 조차도 내가 너무나 친절했던 나였다가 소시오패스나 사이코패스처럼 굉장히 냉철해지는 모습을 마주하면 나도 이런 사람인데 누군들 안 그러겠나. 하는 자각이 생긴다.

소심해지니깐 발견하게 되는, 아니 내가 상처 받으니깐 발견하게 되는 나 자신과 그 자신을 넓게 확장하여 마주한 나로 인해 상처 받은 모든 이들. 솔직한 말로 지금도 내가 의도하지 않은 언어적 비언어적인 표현으로 상처 받은 모든 이들을 나는 포용할 수 없다. 일일이 하나같이 찾아서 '죄송 죄송'하며 상처를 보듬어 줄 수 없다.


최근에 또 그런 마찰을 겪은 일이 있었는데 옳음 강하고 주장 강한 나는 주장을 하다 보니 굽혀지지 않은 간극으로 인해 '또 내가 무언가를 잘못했구나.' 보다 하면서 주변인들에게 나의 상황을 객관화 적으로 이야기했다.

찰지게 욕을 먹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모두가 '네 의견이 맞는데? 그건 아니지! 근데 대체 뭐가 문제야?'라고 나에게 답해줬다. 솔직한 말로 '에?'싶었다.

내 의견이 맞지만 나도 좁혀지지 않는 의견 차이로 '내가 또?' 하면서 스스로를 타박했으니깐.

그러나 내가 고민하던 내용과는 다르게 그분의 결론은 그거였다 '너는 누구에게든 주장이 강하다. 옳음이 강하다. 배려가 없다. 그런 말들로 내가 너에게 해줄 말을 못 하게 한다' '너는 청년이고 나는 부인이야. 당연히 어른인 나를 어려워해야지.' 

사실 그분이 그런 말을 할 때 모두가 (5명 이상의 사람들) 말했다. '네가 맞지만 그 일 때문에 너를 잡는 게 아닌 거 같다. 그냥 너한테 한마디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 같다'


마주한 꼰대 스타일에 조금 당황은 했지만, 나로 인해 상처 받았다면 ㅈㅅ.

앞서 말했지만 나는 내가 했던 모든 언어적 비언어적인 표현에 대해 상처 받은 사람들의 상처를 치료하고 보듬어주고 싶지 않다. 상처 받은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 말도 안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나를 몰아 부친다. 위의 상황처럼.

사실 나도 벙졌다. 이야기를 하면서 알게됬다. 그 사람이 말하는 상황과 내가 말하는 상황의 자체가 전-혀 다름을. 나는 객관적인 사실만 놓고 '잘못'을 온전하게 주장하는 반면, 그 분은... 내 말들로 인해서 상처 받은 언제인지 모를 감정적으로 예상하는 시간들을 오늘에서야 한.꺼.번.에 폭발시킨 거였구나. 그러면서 자신의 위치가 어른임을 이야기 해주는구나. 물론 나도 같은 어른인데 나는 그 사람보다 나이도 먹지 않았고, 결혼도 하지 않았고, 애도 없으니깐 난 예의를 갖춰야 하는 사람. 내가 옳아도 저 사람이 그렇다하면 논지를 바꿔서라도 나는 꾸지람을 들어야 하는 사람~~~? 하하핳ㅎㅎㅎㅎ

솔직히 '제가요? 제가 언제요?'라면서 말꼬리를 잡고싶지 않았다. 정확하게 '너로 인해서 상처받았어'라고 들리는 말들은 뱅글뱅글 돌리면서 '너는 말투가 참 따뜻하지 않어.'라면서 때로는 '주변인들도 그러더라'라며 두리뭉실하게 자신이 느낀 부분에 대해서 자존심 굽히지 않을 정도로 나에게 사과 받기를 바란다.


그러든가 말든가,

나의 주변은 그런 미묘한 생채기에는 면역이 되어있으니깐. 그렇기 때문에 나 같은 사람들과 나를 받아주는 지금의 사람과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읽씹 당한 카톡, 답이 없는 물음들, 방향성 잃은 상대방에 대한 나의 생각들.

원수가 아니라면 다시 마주하면서 웃고 떠들고를 반복할 사이들이면서 왜 이토록 주절주절 재고 따지고 의미 없이 생각하고 결론 내는지. 결국 친구란 나의 거울과도 같은데 가끔은 소심해져서 나를 돌아보는 나 자신도 나쁘지 않은 거 같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